“임신중단, 더는 숨기기 싫다”···헌재 결정 4년, 여전히 먼 ‘안전한 재생산권’

윤기은 기자 2023. 4. 9.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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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이 9일 서울 용산구 용산역 광장에서 낙태죄 폐지 2주년을 맞아 9일 국가에게 임신중지를 건강권으로 보장할 것을 유지한 집회를 한 후 연막탄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윤슬기씨(26·가명)는 지난해 원치 않는 임신을 했다. 2021년 1월1일부터 낙태죄가 효력을 잃었지만 윤씨가 임신중단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유산유도제와 자궁수축제를 구하기 위해 웹사이트 ‘위민온웹’과 채팅 애플리케이션(앱) ‘텔레그램’에 접속했지만 약품 품질과 배송시기를 알 수 없어 약품 주문을 포기했다. 이곳저곳을 알아본 끝에 겨우 임신중단 시술을 하는 병원을 찾은 윤씨는 의료비 120만원을 계좌이체했다. 의료보험 지원은 한 푼도 받지 못했고, 시술 이후 부작용 증상까지 겪었다.

윤씨를 비롯해 ‘안전한 임신중단권’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9일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4주년을 맞아 서울 용산구 용산역 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임신중단을 ‘보편적 건강권’으로 보장할 것을 정부에 촉구했다. 윤씨는 이날 “아직도 저와 같은 여성들이 불법도 합법도 아닌 모호한 경계 위에서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울고 있다”며 “자신을 탓하는 여성이 없어야 한다. 제도적으로 임신을 중단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했다.

집회를 주최한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모임넷)는 헌재 결정(2019년 4월11일)이 내려진 지 4년이 다 돼 가고, 낙태죄가 효력을 잃은 지 2년이 지났지만 정부와 국회가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제도를 만들지 않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산부인과 전문의인 최예훈 색다른의원 원장은 정부가 다른 의료 서비스처럼 임신중단 정보 접근성을 높일 의무가 있다고 했다. 최 원장은 “인터넷과 앱을 통해 소위 ‘낙태약’을 구하기도 하지만 약 복용 과정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얻기 어렵다”며 “임신중지는 다른 의료서비스와 마찬가지로 본인이 원한다면 최대한 안전한 방법으로 제공돼야 한다”고 말했다.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이 9일 서울 용산구 용산역 광장에서 낙태죄 폐지 2주년을 맞아 9일 국가에게 임신중지를 건강권으로 보장할 것을 유지한 집회를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모임넷은 정부가 ‘입법 공백’을 명분으로 유산유도제 도입과 임신중단 시술에 건강보험 적용을 미뤄왔다고 비판했다. 현대약품은 2021년 7월 식약처에 경구용 임신중절의약품 ‘미프지미소(성분명 미페프리스톤·미소프로스톨)’ 수입 허가를 신청했지만 식약처의 두 차례 자료 보완 요구에 답하지 못하다 지난해 12월 신청을 철회했다.

모임넷은 안전한 임신중단을 위한 입법을 외면하고 있는 국회도 비판했다. 헌재는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며 2020년 12월31일까지 대체 법안을 마련하라고 했지만 발의된 19개 관련 법안은 모두 국회에 계류 중이다.

모임넷은 지난달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추진 전략에서 ‘포괄적인 성·재생산권 보장’ 등 성평등 목표 계획을 삭제한 윤석열 정부를 향해서도 쓴 소리를 냈다. 이들은 “윤석열 정권은 여성가족부 폐지를 몰아붙이며 ‘성평등’을 지우고, ‘여성’을 인구정책의 수단으로만 바라보면서 재생산권 보장에 대한 책임 또한 방기하고 있다”고 했다.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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