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빌라왕’ 상속인은 어디에···정부 대책에도 보증금 회수 ‘산 넘어 산’
A씨(30)는 얼마 전 숨진 ‘청년 빌라왕’ 송모씨의 피해자다. A씨는 지난해 7월 계약연장의사가 없음을 알린 뒤 갑자기 연락을 피하는 송씨를 보며 전세사기를 직감했다. 송씨가 숨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그는 언론에 전세사기 사실을 제보하고, 기자회견에 나섰다. A씨와 같은 피해자만 60여 명이 모였다.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모으자 정부가 대책 마련에 나섰다. 임대인이 사망했더라도 임차권등기 절차를 간소화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대법원은 지난 1월 임대인(집주인)의 상속인(상속을 받는 사람)이 ‘상속등기’를 하지 않아도 보증금 채권자인 임차인(세입자)이 상속인을 상대로 임차권등기명령을 청구할 수 있도록 업무처리지침을 개정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보증보험 가입자인 A씨는 “임대인이 사망해도 보증금을 회수할 수 있게 됐다는 보도를 보고 ‘한숨 돌렸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지금 A씨에게 보증금 회수는 여전히 먼 일이다. 숨진 송씨에겐 6살 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이 1순위 상속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A씨와 같은 임차인이 HUG에 보증이행청구를 하려면 우선 ‘임차권등기’를 해야 한다. 임차권등기란 등기부등본상에 ‘임차인이 보증금 만큼 해당 건물에 우선권리가 있다’고 명시하는 것을 말한다. 집주인이 사망한 경우 세입자는 집주인의 건물과 채무를 상속받을 상속인을 상대로 법원에 임차권등기명령 신청을 해야 한다.
대법원이 상속대위등기(상속인이 상속 절차를 밟기 어려운 상황일때 채권자 등 제3자가 상속인 대신 상속등기를 하는 것)를 별도로 하지 않아도 상속인을 상대로 임차권등기명령을 할 수 있도록 업무처리지침을 개정했지만 1순위 상속인이 법적 의사결정능력이 없는 미성년자나 한정치산자라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상속인이 미성년자인 경우 스스로 상속을 포기할수도, 임차권등기명령을 받을 수도 없다.
송씨 아들은 현재 군포시의 한 보호시설에 있는 상태로 후견인도 지정되지 않았다. 피해자들로서는 “임대차 계약을 종료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할 상대가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된 셈이다.
A씨는 “보호시설로 내용증명을 보내도 계속 반송되고 있다”면서 “전세사기 때문에 결혼까지 미뤘지만, 신혼집과 피해주택의 대항력을 모두 유지하느라 두 집 합쳐 이자만 200만원 넘게 내고 있다. 생활고는 점점 심해지는데 국토부도 HUG도 ‘전례가 없어 시간이 걸린다’는 말 뿐”이라고 했다.
상속인의 주민등록이 말소되거나, 거주지가 불분명해 누가 상속을 받는 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또다른 전세사기 피해자 B씨는 사망한 임대인의 상속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구 제적등본을 떼어 집을 찾아갔지만 빈 손으로 돌아왔다. 1순위 배우자의 집엔 각종 고지서와 내용증명만 수북했다. 2순위인 부모는 사망했고, 3순위 형제는 8명이나 됐다. 일부는 주민등록도 없었다. 생존여부 자체가 불분명하다는 얘기다. 4순위인 조카나 삼촌·고모·이모 등까지 합치면 상속인들은 끝없이 늘어난다.
B씨는 “HUG에선 1순위가 상속포기 상태면 2순위, 3순위, 4순위 상속인들에게 차례로 연락해 상속포기여부를 직접 확인해와야 이행청구가 가능하다고 한다”면서 “이것은 개인이 혼자서 확인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 것”이라고 했다.
피해자들은 법원에서 내용증명을 보낸 뒤 우편을 통해 ‘폐문부재(사람이 없어 내용증명을 받을 수 없음)’확인을 받고 공시송달을 거쳐 ‘상속인과 연락이 안된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다음 순위 상속인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상속을 포기했는지까지 알 순 없다. 최근 전세사기 피해자 급증으로 법원의 업무처리도 점차 늦어지고 있다.
A씨는 “피해자 단톡방에서는 ‘보증금을 떼먹은 사기꾼이 제발 살아만 있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한탄도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9일 국토부 관계자는 “상속과 관련해서는 민법이나 민사집행법에 규정된 절차를 따를 수 밖에 없다”면서 “임차권등기 절차를 신속화하는 등 관련 제도를 개선 중”이라고 했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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