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총수들의 ‘장외 대결장’ 된 프로야구
불황과 사업 재편기 맞아 오너 리더십 강화 발판으로 부상
(시사저널=오종탁 기자)
한국프로야구 KBO리그가 4월1일 42번째 시즌의 막을 올렸다. 2023 KBO리그는 이날 LG 트윈스-kt wiz, 롯데 자이언츠-두산 베어스, NC 다이노스-삼성 라이온즈, 한화 이글스-키움 히어로즈, KIA 타이거즈-SSG 랜더스의 대진으로 팀당 144경기 대장정의 첫발을 뗐다.
여느 시즌처럼 팀과 감독·선수들 간 경쟁이 치열하지만, 올해 유독 도드라지는 점이 있다. 바로 구단주의 존재감이다. 시사저널이 프로야구 10개 구단 중 재벌기업을 모기업으로 둔 9곳을 취재한 결과 구단주, 즉 모기업 총수들의 역할과 영향력이 부쩍 커진 분위기가 감지됐다. 글로벌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국내 대기업들은 경영 효율화와 새로운 먹거리 발굴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이런 가운데 프로야구단 운영에서도 강력한 오너십을 바탕으로 목표 의식을 구체화하고 주력 사업과의 시너지를 극대화하려는 모습이 나타난다.
롯데 "그룹과 구단은 '원팀'"
최근 들어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는 구단주는 롯데 자이언츠의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다. 롯데그룹은 본업인 유통과 신(新)성장동력인 화학 외에 바이오, 모빌리티, 메디컬 등으로도 사업 영역을 거침없이 확장해 가고 있다. 그만큼 프로야구단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더 활발히 홍보·마케팅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다. 신 회장은 2023년 정기 임원 인사에서 이강훈 롯데지주(롯데그룹 지주사) 커뮤니케이션실 홍보팀장(전무)을 롯데 자이언츠 대표이사로 선임하며 야구단을 홍보·마케팅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강훈 대표는 시사저널과의 통화에서 "롯데 자이언츠는 2023 시즌 그룹과 구단의 '원팀(One Team)' 시너지를 이끌기 위해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소비자 접점이 있는 계열사와의 공동 마케팅을 여러 각도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미 롯데 자이언츠는 올 시즌 구단 캐치프레이즈를 '하나 되는 힘(The Power of One)'으로 정하고 롯데웰푸드, 롯데월드 등 그룹 계열사들과 홍보·마케팅 협업을 펼쳤다. 선수단이 착용한 유니폼은 롯데케미칼의 자원 선순환 프로젝트를 통해 제작됐다. 롯데 자이언츠는 '2030부산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를 위한 그룹 차원의 지원 노력에 대해서도 선수단 홈·원정 유니폼에 엑스포 유치 기원 패치를 부착하는 방법으로 힘을 보탤 예정이다. 신 회장은 올 시즌을 겨냥한 '빌드업'을 차근차근 진두지휘해 왔다. 롯데지주 이사회가 지난해 10월 자회사인 롯데 자이언츠의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190억원의 유상증자를 의결한 게 대표적이다. 롯데 자이언츠는 확보한 자금으로 선수 계약과 영입, 인프라 투자 등을 진행했다.
롯데 자이언츠의 올해 향방은 신 회장의 대외 이미지나 리더십과도 직결될 전망이다. 최근 몇 년 새 프로야구단의 성적이 모기업 총수의 관심과 역량에 따라 좌우되는 경향이 짙어졌기 때문이다. 롯데 자이언츠의 2022년 KBO리그 최종순위는 64승 76패 4무로 8위를 기록했다. 5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는 등 부진이 이어지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상대적으로 성적이 좋았던 다른 구단의 구단주들과 신 회장이 비교 선상에 놓이는 경우가 잦아졌다.
정용진, 올해도 야구단-본업 시너지 극대화 예고
단골 비교 대상은 '유통업계 맞수'인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다. 신세계 계열사인 이마트는 2021년 SK 와이번스를 인수해 KBO리그에 뛰어들어 SSG 랜더스를 창단했다. 1975년 창단한 롯데 자이언츠와 46년 차이가 난다. SSG 랜더스는 2022 시즌 구단주인 정 부회장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개막일부터 마지막 날까지 1위를 지키는 '와이어 투 와이어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하더니, 한국시리즈에서도 우승해 통합 우승을 완성했다. 정 부회장은 올해도 '2년 연속 통합 우승' '홈 관중 1위 수성' 등의 목표를 직접 제시하며 구단 운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지난해 SSG 랜더스의 홈 관중은 98만1546명으로 10개 구단 중 톱이었다. 세간의 시선은 자연스레 정 부회장과 모기업 신세계그룹으로 향했다. 정 부회장을 위시한 신세계그룹은 구단 인수와 동시에 돔구장 건설, 야구장 내 신세계 유통시설 대거 입점, 야구 관련 상품과 서비스 개발 등 비전을 과감히 제시하고 궤도에 올렸다. 아울러 정 부회장은 경기장을 자주 찾아 응원하고, 경기장에서 마주친 관람객들과도 함께 사진을 찍는 등 허물없이 소통했다. 구단 성적도 성적이지만, 수많은 고객을 정 부회장과 신세계그룹에 우호적인 '팬'으로 만들었다는 게 진정한 성과란 평가가 많다.
정 부회장도 2월13일 SSG 랜더스의 미국 스프링캠프 훈련장을 찾은 자리에서 "야구장에 오는 팬들과 우리 기업의 고객이 동일하다. 야구장을 찾아주는 팬들이 아침에 스타벅스에 가고, 오후에 이마트에서 쇼핑을 하고, 또 신세계푸드에서 식품을 먹는다"며 "그만큼 야구는 유통업과 직접적인 시너지가 난다. 시간을 점유하는 점, 소비자 접점이 크다는 점에서 유통업과 시너지 나는 스포츠가 야구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4월1일 열린 2023 KBO리그 개막전에 참석한 사실이 알려진 구단주는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이 유일하다. 박 회장은 2009년 3월부터 두산 베어스 구단주를 맡아왔다. 그동안 물밑에서 조용히 구단 운영을 도왔던 그는 지난해 하반기 들어 스타일을 바꿨다. 지난해 10월 '국민타자'라 불렸던 이승엽을 두산 베어스 새 사령탑으로 영입한 데 이어 구단 쇄신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이를 대외에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구단의 얼굴 역할을 하는 구단주' 대열에 진입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존재감은 누구 못지않게 강렬하다.
공개 행보 대폭 늘리는 박정원
박 회장은 지난해 11월21일 밤 인스타그램 친구공개 계정에 올린 사진에 이승엽 두산 베어스 감독, 국내 최고 포수이자 FA(자유계약선수) 최대어인 양의지와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을 게재했다. 그 아래엔 '웰컴백! 양 사장'이라고 적어 양의지의 두산 베어스 이적을 암시했다. 당시 양의지의 거취에 관한 그 어떤 소식도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구단주가 직접 올린 SNS 게시물은 큰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양의지는 NC 다이노스를 떠나 두산 베어스와 6년 최대 152억원의 초대형 계약을 맺었다. 박 회장이 스스로 양의지의 두산 이적에 자신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음을 알린 셈이다. 양의지도 올 1월 입단식에서 "두산 구단과 처음으로 협상하는 자리에 구단주가 오셔서 나도 당황했다"며 "내가 (2018년 두산에서) NC로 떠날 때 밥 한번 사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 약속을 지키러 왔다며 함께하고 싶다고 (친정팀) 복귀를 권유하셨다"고 해당 사실을 인정했다.
두산 베어스가 개막전에서 연장 끝내기 홈런으로 짜릿한 승리를 거두자 박 회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크게 기뻐했다. 경기가 끝난 후 끝내기 홈런공을 들고 기념사진 촬영을 하는 이승엽 두산 베어스 감독 뒤론 두산그룹의 신성장동력이자 주력 계열사인 두산에너빌리티(원자력·수소 등 에너지 사업) 로고가 찍혀 있었다. 두산그룹의 한 관계자는 "박 회장은 오래전부터 바쁜 그룹 경영활동 중에도 개막전엔 무조건 참석하고, 시즌 중 틈틈이 야구장을 찾는 등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이름난 야구광이었다"면서 "재계 총수들이 대외활동은 물론 그룹 경영에도 프로야구단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분위기에서 박 회장 역시 총수와 구단주 사이의 접점을 점차 늘려갈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 성적 상승도, 하락도 오너 영향?
양의지는 두산 베어스로 이적하며 박정원 회장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동시에 NC 다이노스 구단주인 김택진 NC소프트 대표이사에게 거듭 미안함을 표시했다. 그는 김택진 대표가 지난 4년간 자신과 팀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점이 막판까지 두산 복귀를 고민하게 만들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2011년 NC 다이노스를 창단해 구단주를 맡아온 김택진 NC소프트 대표이사는 정용진 부회장이 야구팬들 사이에서 '용진이 형'으로 불리기 이전에 '택진이 형'으로 통했다. 그만큼 극진한 야구 사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김 대표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란 측면에서 다른 재벌가 구단주들과 성격이 달랐기에, 팬들이 느끼는 친밀감도 더욱 컸다.
김 대표의 지원으로 NC는 2013년부터 자유계약(FA) 선수 영입 등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김 대표는 감독 및 코칭 스태프는 물론 선수들과도 격의 없이 만나 구단 운영 방향을 논의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NC 다이노스는 2014년과 2015년 3위, 2016년 2위, 2017년 4위에 이어 2020년 우승을 차지하는 등 신흥 명문 구단으로 도약했고, NC소프트 게임에 대한 시장의 관심도 증폭됐다. 그런데 우승 이후론 2021년 7위, 2022년 6위를 기록하는 등 주춤한 상태다. 워낙 구단에 대한 영향력이 압도적이었던 김 대표인지라 그의 심적·물적 지원 감소가 성적 하락으로 이어진 게 아니냐는 추측에 힘이 실린다.
삼성 라이온즈의 경우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구단주가 아니다.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1982년부터 2001년까지 구단주를 맡은 것을 끝으로 삼성 라이온즈에 오너가(家)가 관여하지 않았다. 15년간 전문경영인 구단주 체제였으나, 2011~13년 사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 라이온즈 경기를 7회 관람하는 등 여전한 오너가의 애정을 확인했다. 2016년 삼성그룹 산하에서 그룹 계열사인 제일기획 산하로 편입되면서 기류가 완전히 바뀌었다. 삼성 라이온즈는 공교롭게도 딱 그해부터 성적이 하락세로 돌아섰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4시즌 연속 1위를 기록한 삼성 라이온즈는 2015년 2위에서 2016년 9위로 추락한 후 2017년 9위, 2018년 6위, 2019년 8위, 2020년 8위 등으로 하위권을 맴돌았다. 2021년 3위로 반짝 반등하곤 다시 지난해 7위로 내려앉았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삼성 라이온즈 팬들은 물론 삼성그룹 임직원들의 사기마저 떨어뜨리고 있는 구단 운영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다. 시스템 반도체 300조원 투자 등 삼성전자의 사업 재편이 가속화하고, 다른 기업들의 프로야구단 활용이 활발해지는 추세도 이 같은 지적에 힘을 보탠다.
한편 프로야구단에 대한 모기업 총수의 관심과 투자가 반드시 좋은 성적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한화 이글스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통 큰 지원과 '형님 리더십'에도 지난 10시즌(2013~22년) 중 5강(2018년 3위)에 단 한 번 들고, 5번 꼴찌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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