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사고문단 '갑' '을'인 한국 군경의 민간인 집단학살 현장 동행
[한미관계 탐구 (12)] 미국, 미군정과 6·25 전쟁 전후 발생 한국 민간인 학살 책임져야 ②
[미디어오늘 고승우 민언련 고문·언론사회학 박사]
1948년 이승만 정부 수립이후 점령군 미군이 철수했지만 미 군사고문단이 잔류해 한국군경의 실질적으로 지휘권을 행사했다. 미군사고문단은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한국에 대해 군사원조의 집행, 미군장비 및 무기의 이양, 한국군의 편성 및 훈련지도 등의 업무를 주관했다.
미군사고문단은 동시에 한국 육군, 해안경비대, 경찰로 구성된 한국치안대를 조직, 관리, 무장, 훈련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한국 국내 치안과 질서 유지, 38도선의 방어, 불순세력 제거, 게릴라 침투방지와 방어전쟁 수행, 그리고 해안질서 및 치안유지 등에 관하여 자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미 군사고문단은 '자문'하는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국군과 경찰, 치안대의 조직을 관리하고 무장, 훈련시키면서 그에 따른 군사원조를 집행하고 무기를 이양하는 것이 업무이니 한국군과 경찰은 그 하부 조직이나 다름없었다.
즉 미군사고문단이 슈퍼 갑이고 한국 군경은 을이었던 셈이다. 미군정 3년 동안 미군 7만 명이 그 하부조직으로 조선인 군경을 거느린 상황에서 남한을 통제했다. 이런 사실은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작성해 놓은 이승만 정부 수립 직후 주한미군과 관련한 아래의 간략한 자료에서 입증된다(http://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6388).
-- 주한 미군은 일본이 항복한 뒤 1945년 9월8일, J. R. 하지 중장이 이끄는 제24군단 소속 미군 제7사단이 1진으로 인천에 상륙했고, 이후 9월29일과 10월8일에 제40사단과 제16사단이 각각 부산과 목포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군정업무를 시작했다.
1945년 11월말 당시 남한에 주둔한 미군 제24군단 병력 수는 약 7만 명이었으며, 이들에 의한 미군정의 통치는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정부가 수립되자 주한미군은 1948년 9월 15일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이듬해인 1949년 6월 29일 군사고문단 500명만 잔류시키고 철수를 완료했다. --
이승만, 주한 미군사령관과 군사안전에 관한 잠정적 행정협정 체결
한미 두 나라는 주한미군 철수가 시작되기 직전인 1948년 8월24일 서울에서 한·미 군사안전잠정협정을 체결했는데 이 협정 당시 한.미관계를 설정하는 중요한 근거였다. 이 협정에 따라 주한미군으로부터 국군 창설에 필요한 장비와 교육훈련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동시에 이승만 대통령이 대미관계를 중시하면서 유대강화를 위한 정책을 추진한 데 따른 것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과 주한 미군사령관간에 체결된 과도기에 시행될 잠정적 군사안전에 관한 행정협정의 내용은 전문과 본문 5개 조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에서는 미군의 한국철수와 한국점령종결을 목적으로 주한미군사령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정권이양을 점진적으로 질서 있게 하기 위한 각서의 교환 취지를 밝혔다. 동시에 대한민국 헌법 제61조에 국군의 통수권자인 대통령과 주한미군사령관간의 한국에서 미군철수완료시까지 본 조약의 군사 및 안전보장에 대한 조치를 합의했음을 밝히고 있다.
각 조항의 세부내용을 보면, 제1조에서는 주한미군사령관은 본국의 지시나 자신의 직권 범위 내에서 대한민국 국방군을 계속적으로 조직, 훈련, 그리고 무장할 것에 동의한다. 제2조에서는 주한미군사령관은 한·미 공동안전에 부합될 경우에 점진적이며 가급적 속히 전 경찰, 해안경비대, 현존 국방경비대의 지휘책임을 대한민국 정부에게 이양하기로 동의한다.
제3조에서는 대한민국 대통령은 주한미군이 철수를 완료하기 위하여 필요한 중요지역과 시설(항구진지·철도·병참선·비행장·기타)에 대한 통제권을 보유한다. 제4조에서는 대한민국 대통령과 주한미군사령관은 이양에 따른 제반 세목은 대한민국 정부와 주한미군의 적당한 관리간에 결정한다.
제5조는 협정 서명과 효력에 관한 확인란이다. 이러한 군사협정 체결 이후에 9월11일에는 재정 및 재산에 관한 한·미 협정이 체결되었고, 다시 12월10일 한·미 경제원조협정이 체결되면서 한·미 관계의 기본적인 틀이 형성되었다. 대한민국 건국초기에 대미관계는 미국의 경제 원조를 비롯하여 군사적으로도 주한미군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던 만큼 기본 정책 및 국방정책 역시 미국의 극동전략의 일환으로서 대한군사정책에 영향을 받았다.
정부는 정부수립 초기부터 국방정책의 기본방향은 반공사상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주변국에 대해서는 외교적 차원에서 유엔 헌장을 기본으로 한 집단 안전보장 체제를 강화시켜 나가는 한편, 안으로는 국방 역량의 육성과 방위력의 향상에 목표를 두었다.
미국은 당시 한국의 내부경제안정에 비중을 두는 한편 한국 정부의 대북 공세적 자세를 우려하여 군사지원에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소극적 지원정책으로 인해 국방역량의 육성 강화는 북한의 남침 전까지 체계적으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주한미군사고문단은 군정 당시 국방경비대를 비롯하여 해안경비대와 경찰대의 조직과 훈련을 담당했던 미 고문관들의 역할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정부 수립 이후에도 존속되어 1948년 8월26일 한·미 군사안전잠정협정에 의거하여 주한미군사고문사절단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임시군사고문단(PMAG)을 두어 단장에는 로버츠(W. L. Roberts) 준장이 임명되었다.
정부수립 직후 설치된 임시군사고문단은 1949년 6월말 주한미군의 철수가 완료되자 7월1일부로 주한미군사고문단(KMAG, The United States Military Advisory Group to the Republic of Korea)으로 발족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고문관의 활동은 미군정 당시인 1946년 1월 국방사령부에서 미군장교 2명과 사병 4명으로 구성된 '연대편성 및 훈련조'를 파견한 것이 효시가 되었다. 그 후 미 합참이 1948년 3월10일 국방경비대의 5만 명 증강을 승인하자 군사고문단은 3개 여단사령부(서울·대전·부산) 창설을 지원하는 한편 증강연대의 창설을 지원하였다.
임시군사고문단은 대한민국 국군의 조직·훈련 및 무장을 지원했다. 그러나 1949년 1월 미 안전보장회의(NSC)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1949년 6월30일한으로 완료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자 군사고문단으로 개편되었다. 군사고문단의 설치에 관한 협정은 1950년 1월26일 서울에서 조인되었으나 소급 적용되었다.
1949년 4월9일 미 육군부에서는 500명 범위 내에서 군사고문단을 조직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당시 실제 병력은 장교 92명, 사병 148명으로 240명으로 주한미군의 철수 업무를 진행하다가 6월에 미 육군부의 임시조치로 480명의 인원을 배정받았고, 주한미군 철수 시 잔여병력이 해당 고문단에 편입되어 500여명이 되었다.
6·25 이전 미군의 한국군 작전지휘권자는 무초 미 대사
주한미군 철수가 완료된 1949년 7월1일 군사고문단으로 발족한 후 군사고문단의 행정감독과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은 무초 대사에게 있었다. 맥아더 장군이 주 필리핀 합동군사고문단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건의한 결과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발발 당시 맥아더 장군에게는 미군사고문단에 대해서는 전혀 지휘권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주한미국사절단(AMIK)과 주한미군사고문단 관계는 군원문제에 집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고문단의 내부 지휘권은 전적으로 로버츠 장군에게 있었다. 게다가 군의 지휘 및 행정에 관한 사항은 극동사령부, 육군부, 국방부 등에 직접 보고 되었다.
군사고문단은 주로 1949년 후반기 주한미군의 완전철수에 따른 보완 업무를 수행했는데,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의 집행, 미군장비 및 무기의 이양, 한국군의 편성 및 훈련지도 등의 업무를 주관했다.
이외에도 주한 미 군사고문단은 한국 육군·해안경비대·경찰로 구성된 한국치안대를 조직, 관리, 그리고 무장, 훈련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동시에 한국국내 치안과 질서 유지, 38도선의 방어, 불순세력 제거, 게릴라 침투방지와 방어전쟁 수행, 그리고 해안질서 및 치안유지 등에 관하여 자문하는 임무를 맡았다.
미군사고문단 '치외법권' 신분으로 한국내 불순세력 제거 등 자문 역할
미군사고문단은 미대사관 외교관과 같은 신분으로서 치외법권을 갖고 있으면서 한국 육군. 해안경비대. 경찰로 구성된 한국치안대의 조직, 관리, 그리고 무장, 훈련을 담당했다. 동시에 한국국내 치안과 질서 유지, 38도선의 방어. 불순세력 제거. 게릴라 침투방지와 방어전쟁 수행, 그리고 해안질서 및 치안유지 등에 관하여 자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72689&cid=46624&categoryId=46624).
미군사고문단은 1950년 6월 초, 북한군이 기동력을 갖춘 8개 사단과 기갑여단, 2개 보병 사단과 T-34 탱크 부대 등을 보유하고 소련의 지원으로 전면전을 개시할 태세였지만 남한 전력은 매우 열세라면서 미 정부에 한국군 전력 증강을 강하게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전쟁이 날 때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Appleman, Roy. U.S. Army in the Korean War: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Washington: Center of Military History, 1961. 8.)
1950년 8월 맥아더는 한국군 병력을 필요한 만큼 증원하도록 주한미군에 지시했다.
미군사고문단은 전쟁이 발생한 직후 한국군이 한강교에 폭약을 설치하는 작업을 지휘하고 서울을 포기할 경우에 대비했으나 한국군이 사전통고도 없이 폭파해 버리자 서울을 탈출하는데 큰 곤욕을 치렀다((1) Interv, Col Wright. (2) Interv, Col Lewis D. Vieman with Col Appleman, 16 Jun 54. (3) MS prepared by Lt Col Lewis D. Vieman, 15 Feb 51, in OCMH files. (4) See also Ltr, Col Sedberry).
당시 수많은 피난민이 교량을 건너는 상황이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군사고문단은 그 후 1951년 중반까지 한국군 상대역에 대한 직접적 통제권을 행사하면서 패퇴하는 한국군 병력을 규합해 북한군의 전진을 막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Sawyer, Robert. Military Advisors in Korea: KMAG in War and Peace. Washington: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1962. 125 143).
1952년 6월23일 소련이 정전 협상을 시작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고 미국은 한국군이 자체 방위력을 갖도록 집중 지원했다(Gibby, Bryan. “Fighting in a Korean War: The American Advisory Missions from 1946-1953.” PhD diss., The Ohio State Univerity, 2004. 185).
미국은 미군대신 한국군이 더 많이 전선에 투입되어 자체 방위력을 갖춰야 한다면서 미군사고문단이 한국군에 대한 밀착강도를 높기 위해 그 인력을 1951년 12월 종래의 800명에서 1800명으로 대폭 증원했다.
또한 미군사고문단 소속원이 한국군 지휘관과 더욱 긴밀히 접촉토록 조치했는데 예를 들어 미군사고문단 단장의 경우 한국군 참모총장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동행했다(Gibby, “Fighting in a Korean War”, 193).
한국군은 1953년 20개 사단, 병력 50 만 명으로 급성장했는데 이는 미군사고문단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평가됐다(Hausrath, Alfred H. The KMAG Advisor: Role and Problems of the Military Advisor in Developing an Indigenous Army for Combat Operations in Korea. Chevy Chase, Maryland: Operational Research Office, Johns Hopkins University, 1957).
미군사고문단 남한 군과 경찰의 실질적 감독기구
주한미군은 1949년 4월2일 남한에서 철수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면서 미군사고문단은 그 조직을 확대 개편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에 따라 미군은 한국군 부대의 대대까지 한국군 경찰에는 지구대 사령부까지 해안병비대는 전체 부대에 미군사고문단 소속원을 파견할 조치를 취했다(DA Rad, 86379, CSGPO to CINCFE (info CG USAFIK), 24 Mar 49).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군사고문단은 맥아더 장군의 극동사령부로 편입되었다가 다시 제 8군의 지휘통제를 받게 되고 1953년 협정체결로 임시 주한 군사고문단, 그 해 9월에 임시 주한 미국 합동군사원조고문단으로 통합되었다. 1956~1963년까지 인원이 2878명으로 늘었다. 1971년 4월1일 주한 미군 합동고문단으로 정식 조직이 되었다.
미군사고문단은 맥아더 사령부와 긴밀히 접촉하면서 대표가 주기적으로 동경에 있는 맥아더 사령부를 방문해 한국군 교육 문제 등을 조율하면서 남한내 정치군사 상황에 대해 보고했다(DA Rad, WARX 90992, 1 Jul 49. (2) KMAG Relationship With FEC).
미군사고문단은 당시 무초 대사의 지후를 받고 있었지만 로버트 대장에게 장악되어 있었고 주한미국대표부(AMIK)와 미군사고문단은 남한에 대한 군사원조 문제를 협의 결정해야 하는 긴밀한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군사고문단은 남한 군정과 관련한 군사 및 행정 문제의 경우 미 국방부에 직접 보고했다(Interv, Col Wright, former CofS, 미군사고문단, 5 Jan 53. (2) Advisor's Handbook, 17 October 1949, an. 3 to Semiannual Report, Office of the Chief, U.S. Military Advisory Group to the Republic of Korea, period ending 31 December 1949).
미군사고문단과 그 소속 원들의 법적 지위는 한미 정부간 협정으로 보호받고 있었는데 미군사고문단 간부와 그 가족들은 주한미국대표부 외교관에게 부여된 면책 특권을 보장받고 있었다. 형식상 미군사고문단은 주한미국대표부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 이었다(HR미군사고문단, an. 15, pp. 14, 15. According to this report, from 1 July 1949, when the interim military agreement expired, to the end of 1949 (and presumably until the 미군사고문단agreement was signed on 26 January 1950), the advisory group).
미군사고문단 별도 사무실 없이 한국군경 지휘관 옆에서 업무수행
미군사고문단은 그 소속원을 한국 국방부 장관, 참모총장, 각 군 총사령관 실은 물론 일반 기술 및 행정군 부대와 해안경비대, 경찰에까지 파견했다. 이론적으로 미군사고문단 소속원들은 파견된 한국군 부처 책임자들의 도움을 받아 업무를 수행하는 형식을 취했다. 미군사고문단의 이런 임무형식은 한국 군경이 민간인을 집단학살하는 현장에 동행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이런 한미관계는 미국이 갑, 한국이 을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인 민간인 집단 학살에 직간접적인 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로버트 장군은 미군사고문단이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남한군 상대역과 같은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면서 부대원을 점검하거나 매일의 업무 또는 문제를 공유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미군사고문단은 별도의 지휘부 건물을 마련치 않고 한국군 사령부에서 상대역 옆에서 업무를 보는 방식을 취했다. 단지 로버트 장군과 그 참모 행정요원 등만이 별도의 사무실을 사용했을 뿐이다(SA Rpt. 미군사고문단, 31 Dec 49, sec. I, p. 3 (see also an. 3, Advisor's Handbook, pp. 15). (2) 1st Lt. Martin Blumenson et al., Special Problems in the Korean Conflict (hereafter cited as Blumenson, Special Problems), Hq EUSAK, III, pt. 14, ch. 1, 2, in OCMH files. (3) Ltr. Col Hansen, 2 Aug 52.). 미군사고문단 남한 군과 경찰의 실질적 감독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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