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간 유산재분배 소송, LG에 무슨 일이
재계 “경영권 위협 가능성은 높지 않아”
“시대 흐름에 맞게 승계방식 재검토해야” 지적
[주간경향] 구본무 전 회장이 사망(2018년 5월 20일)한 뒤 40여일 만에 첫 출근을 한 구광모 회장이 가까운 직원들에게 당부한 것은 두 가지였다. “당분간 회장보다는 대표로 불러달라”, “구 전 회장님의 집무실(30층)은 추모공간으로 보존해 달라”다. 회장으로서 공식 취임식도, 대외적인 취임사도 없던 구 회장의 출근 첫날은 그렇게 ‘갑자기’ 시작됐다.
구 회장은 2004년에 구 전 회장의 양자로 입적돼 일찌감치 그룹의 후계자로 낙점됐다. LG그룹의 4대 회장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회장이 된 시점은 예상된 게 아니었다. 평소 건강에 큰 문제가 없던 구 전 회장에게서 뇌종양이 발견된 게 2017년 봄. 회복되리라는 주변 기대와 달리 구 전 회장은 발병한 지 불과 1년여 만에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구 전 회장 사후 부회장급의 직함으로 경영에 나서리라는 전망과 달리 구 회장은 당시 상무에서 곧장 회장으로 직행했다. 1947년 LG그룹의 모태인 락희화학이 설립된 이래 이어져온 가문 내 ‘장자승계원칙’에 따른 결정이었다. 재계에선 구 회장의 과제 중 하나로 ‘친인척 간 지분 정리 및 계열분리 문제’를 꼽았다.
지난해 말 구본준 LX그룹 회장과의 계열분리가 원만히 끝나면서 이 과제는 완료되는 듯했다. 그간 한 번도 친인척 간 경영권 다툼이 없던 전통을 들어 재계에선 “역시 LG”라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76년째를 맞은 이 전통이 올해 들어 위기를 맞았다. 지난 2월 28일 구 전 회장의 부인 김영식씨와 자녀인 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 구연수씨 등 3명이 구 회장을 상대로 ‘상속회복청구권 소송’을 제기했다. 구 전 회장의 유산을 다시 나누자는 취지다. “소송 여건조차 안 된다”는 LG그룹의 강경한 입장과 달리 소송 배경과 향후 파장을 놓고 재계에선 온갖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
70년 넘게 이어온 LG 가문경영 최대 위기
표면적으로 드러난 양측의 갈등은 구 전 회장의 유산 재분배 문제지만 이면에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재구성된 ‘가족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구광모 회장이 구 전 회장과 김영식씨의 친자였다면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문제”라며 “안타깝지만 구 전 회장의 사망 이후 가족으로서의 연대 고리가 무너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익히 알려진 대로 구 회장은 구 전 회장의 양자다. 구 회장의 친부(생부)는 구 전 회장의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이다. 구 전 회장의 장남이었던 고(故) 구원모 씨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면서 LG가문의 장자승계원칙이 흔들리자 구 전 회장은 큰조카였던 구 회장을 양자로 들여 그룹의 후계자로 삼았다. 2004년 구 회장의 양자 입적 사실이 공개되자 여성단체들은 “지금이 조선시대인가”라며 비판했다. 대대로 여성은 경영일선에서 철저하게 배제해온 LG가문의 ‘전통’을 지적한 것이다. 구 전 회장의 친자이자 장녀인 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는 1978년생으로 구광모 회장과 동갑이지만, 생일이 한 달 늦어 여동생이 됐다. 구 회장은 그렇게 큰집의 ‘가족’이 됐다.
김영식씨 등이 구 회장을 상대로 유산소송을 제기하면서 더 이상 이들을 ‘가족’의 범주로 묶기는 어렵게 됐다. 법원에서 소송이 받아들여질지 여부가 결정되기 전이고, 소송이 진행된다고 해서 유산이 재분배된다는 보장 역시 없다. 다만 소송제기 자체만으로도 4대에 걸쳐 큰 잡음 없이 이어져온 LG의 ‘가문경영’ 전통이 최대 위기를 맞았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2022년 4월 공개한 자산총액 기준 재계 순위에서 LG그룹은 4위(167조5000억원)를 차지했다. 2000년대 들어 재계 순위 8위인 GS그룹(76조8000억원)과 17위인 LS그룹(26조3000억원), 아직 순위권엔 없지만 자산이 10조원을 돌파한 LX그룹 등이 차례로 LG그룹으로부터 분리돼 나왔다. 이렇게 굵직한 계열분리가 여러 번 있었는데도 외부로 알려질 만큼의 큰 잡음은 한 번도 없었다.
2005년 마무리된 GS그룹과의 계열분리는 재계에서 ‘아름다운 결별’로 지금도 회자될 만큼 모범적인 분리 사례로 꼽힌다. 락희화학은 능성 구씨 가문의 구인회 창업주와 김해 허씨 가문의 허만정 창업주가 공동으로 설립한 회사다. 2000년대 들어 회사가 커지고 양 가문의 후손이 늘자 양측 모두 향후 벌어질 수 있는 경영권 분쟁 문제를 우려했고, 수년간 준비과정을 거쳐 GS와의 계열분리가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LG는 재벌기업 최초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다. GS는 정유와 유통, 건설을 주축으로 재계에 안착해 계열분리는 양측 모두에게 ‘윈윈’이 됐다.
구 회장의 작은 아버지인 구본준 LX그룹 회장의 계열분리 역시 지난해 말까지 원만하게 마무리됐다. 구본준 회장이 가진 ㈜LG 지분을 내놓고 LX그룹 계열 주식을 받는 방식이었다. 시야를 넓혀 그룹 직계 내 LS, 희성, LIG, LF 등 과거 숱한 계열분리 과정에서도 문제가 된 사례는 없다. LG그룹이 김씨 등의 유산소송에 대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것도 이 같은 전통을 배경으로 한다. LG그룹 관계자는 “LG는 사업 초기부터 허씨 가문과 동업했고, 후손도 많아 재산을 두고 다투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는 가풍이 있다”라며 “이는 LG가 그간 안정적으로 운영돼온 원동력이기도 하기 때문에 재산분할을 요구하며 전통과 경영권을 흔드는 건 용인될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경영권 위협 가능성 낮지만...“장자승계 재검토해야”
일단 소송이 제기된 이상 법원에서 이를 받아들일지 여부가 최대 관건이다. 민법 제999조에선 상속회복청구권에 대해 ‘그 침해를 안 날부터 3년, 상속권의 침해행위가 있은 날부터 10년을 경과하면 소멸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LG그룹은 “유산 문제는 구 전 회장 별세 이후 5개월 동안 가족 간의 수차례 협의를 통해 법적으로 완료된 것”이라며 “상속완료시점(2018년 11월 1일) 이후 4년이 넘어 이미 제척기간(3년)이 지났다”고 밝혔다. 구 회장도 소송제기에 대한 답변서에 이 같은 내용을 적었다. 소송 성립요건이 안 된다는 취지다.
반면 김씨 등은 유언장 문제 등을 들어 제척기간이 남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김씨 등의 법률 대리인 측은 연합뉴스를 통해 “합의할 때는 (구 전 회장의) 유언이 있다고 했다”며 “유언장을 보여달라고 했는데 계속 보여주지 않았고, 유언장이 없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고 소송 배경을 설명했다.
서울 대형 로펌의 한 변호사는 “제척기간을 산정하는 시점이 되는 ‘침해를 안 날’이 언제인지가 일단 쟁점이 될 것”이라며 “김씨 등의 입장에선 침해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는 사정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LG그룹에 따르면 구 전 회장은 유언장을 남기지 않았다. 김씨 등의 주장대로 유언장이 당시 합의의 근거였다면 유언장이 없다는 사실을 언제 알게 됐는지가 쟁점이 될 수 있다.
구 전 회장의 유산은 그룹의 경영권이 걸린 ㈜LG 지분(11.28%) 및 금융투자상품, 부동산, 미술품 등 개인 자산을 포함한 총 2조원 규모다. LG그룹이 밝힌 가족 간 합의 내용에 따르면 구 회장이 ㈜LG 지분 등 경영권 관련 재산을 상속하고, 김씨와 두 여동생이 ㈜LG 지분 일부와 구 전 회장 개인자산 등 5000억원 규모를 상속했다. 이에 따라 분배된 ㈜LG 지분은 구 회장 8.76%, 구연경 대표 2.01%, 구연수씨 0.51%다. LG그룹은 “㈜LG 지분의 경우 본래 가문 전통대로라면 모두 구 회장이 상속해야 한다”면서도 “구 회장이 다른 상속인 3인의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지분도 일부 분배해 상속한 것”이라고 밝혔다.
소송이 받아들여진다고 가정하면 ㈜LG 지분의 상속분배 문제가 가장 먼저 걸린다. 민법상 상속비율(배우자 1.5·자녀 1)을 적용하면 구 전 회장이 남긴 지분은 김씨에게 3.75%가 돌아가고, 구 회장과 두 여동생에게 각각 2.51%가 배분된다. 이 경우 구 회장이 가진 ㈜LG 지분 규모는 지난해 말 기준 15.95%에서 9.7%로 크게 줄어든다. 반면 이미 지분 4.20%를 소유 중인 김씨와 두 여동생의 지분을 재분배한 후 합하면 14.09%로, 구 회장보다 많아진다. LG그룹 입장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재계에선 다만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LG일가의 ‘가문경영’이 위협받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LG 지분 중 친인척 등 특수관계인 소유비율이 46.55%인데, 여기서 김씨 등 3명의 지분(14.09%)을 빼더라도 여전히 구씨 일가의 지분보유율이 높다”라며 “특수관계인을 제외한 나머지 지분은 국민연금(6.83%)이나 소액주주들이 대부분 소유 중이라 경영권 다툼이 일어날 가능성도 낮다”라고 밝혔다.
유산소송에 따른 가문 내 비판이나 여론에 대한 부담은 김씨 등 세 모녀에게도 있다. 소송이 진행돼도 승소한다는 보장도 없고, 승소하더라도 경영권을 확보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전망이 유력하다. 이 때문에 김씨 등이 소송을 제기한 목적이 실제 ㈜LG 지분을 더 확보하기 위함이기보다는 그룹의 일부 계열사를 확보해 분리 독립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재계에선 나온다. 지금 재계 물밑에선 “세 모녀의 난”, “구연경 대표의 남편이 소송제기에 관여했다”, “구씨 자매 자녀들의 미래를 염려한 김씨의 선택” 등 온갖 풍문이 돌고 있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LG그룹의 지배구조가 비교적 건전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장자 상속’이라는 전근대적인 방식의 승계 구도가 결국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이 이번 소송으로 드러났다”라며 “소송 결과와 상관없이 LG 내부에서도 현재의 승계 방식이 시대의 흐름에 맞는지에 대한 고민을 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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