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의 ‘주거 사다리’였던 빌라...누가 애물단지로 만들었나
서울 평균가 아파트 12.6억, 빌라 3.3억
아파트 666% 오를 때 빌라는 183%
빌라 구입하면 아파트 청약 불이익
“아파트만 바라보는 정부 부동산 정책
공용 주차장 확대 등 인프라 지원 늘려야” 차학봉기자의>
빌라왕으로 대표되는 전세 사기극의 직격탄으로 다세대, 연립주택 등 빌라 시장이 얼어붙고 있다. 한국부동산원 주택거래량에 따르면 2월 주택 거래량은 7만7490건 중 아파트가 6만3909건으로 전체의 82.5%를 차지했다. 아파트 거래비중이 통계 작성이후 가장 높다. 반면 전국 빌라 거래는 2월 7021건으로 전체 거래의 9.1%에 그쳤다. 통계 작성 이래 가장 낮은 비중이다. 2월 서울의 빌라 거래는 1872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50% 감소했다.
신축도 급감하고 있다. 2월 서울 빌라 건축허가 면적은 1만8866㎡로, 지난해 같은 기간(10만2462㎡)보다 81.5% 감소했다.
빌라왕 사기극의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만신창이가 됐지만 빌라는 대표적 서민주택으로, 한국 주거사다리의 출발점이다. ‘2021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주택 총수는 1881만호이다. 이중 아파트 1195만호로 63.5%이다. 연립·다세대 278만호로 14.8%이다. 서울은 아파트가 주택재고의 59.3% 빌라는 30.1%이다.
작년 말 기준으로 서울 아파트의 평균 매매가격이 12억60003만원인데 반해 연립주택은 3억3000만원이다. 전세는 서울아파트 평균가격이 6억3694만원, 연립주택은 2억2739만원이다. 아파트를 구하기 어려운 서민이 선택할 수 있는 주거수단이 빌라이다. 주거 사다리의 출발점이다.
집값에서 전세가가 차지하는 비중을 뜻하는 전세가율의 경우, 아파트는 50%, 연립이 70%이다. 아파트는 집값이 반토막이 나지 않는 한 전세보증금 반환이 가능하다. 그러나 빌라는 전세가율이 높아 집값이 조금 떨어지면 전세보증금 반환이 쉽지 않다. 전세사기의 비극을 구조적으로 잉태한 것이다.
◇서구의 별장이 한국서 빌라
다세대주택과 연립주택을 통칭하는 빌라의 어원은 고대 로마의 농지를 뜻하는 ‘villa’라고 한다. 영어 사전을 찾아보면 빌라는 휴가용 주택이나 별장이다. 한국에 빌라라는 명칭이 도입된 과정은 명확하지 않다. 70~80년대 강남에 신축붐이 불었던 빌라촌은 초대형 고급주거지로 각광받았다. 이때 붙은 특정 단지의 ‘빌라’라는 명칭이 화제를 모으며 유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법적으로 다세대와 연립주택은 4층 이하의 공동주택이다. 5층 이상은 아파트이다. 동당 건축 연면적이 660㎡이하이면 다세대, 660㎡이상이면 연립주택이다. 빌라는 아파트에 비해 건축규제가 까다롭지 않고 소규모이다 보니 건축기간이 짧다. 아파트가 보통 2년 6개월 이상인데 반해 6개월 이내에 건축이 가능하다. 빌라는 규모가 작아 커뮤니티 시설 등 편의시설이 거의 없고 건축자재도 아파트에 비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아파트는 중대형 건설사들이, 빌라는 이른바 동네 집장사라는 건축 업자들이 주도한다.
◇재테크 애물단지가 된 빌라
국토부는 빌라왕 사기사건의 후속대책으로 거주 중인 전셋집을 불가피하게 낙찰받은 피해자는 무주택자 자격을 유지하는 내용의 ‘주택공급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전세사기 피해자가 임차주택을 낙찰받으면 유주택자로 분류돼 무주택 기간에 따른 가점(최대 32점)을 받을 수 없고 특별공급 신청도 불가능해진다. 앞으로 임차주택의 전용면적이 85㎡이하이고 공시가격이 수도권은 3억 원 이하, 지방은 1억 5000만 원 이하의 주택을 전세사기 피해자가 낙찰받으면 무주택자로 간주한다는 내용이다.
이번 조치는 한국에서 빌라가 ‘재테크 애물단지’라는 점을 공식 인정한 것이다. 분양가 상한제는 아파트 청약의 시세차익을 보장해준다. 무주택 서민들이 유주택자보다 절대적으로 유리한 제도가 아파트 청약이다. 아파트를 청약받으려면 무주택을 유지해야 한다. 수요자들이 전세와 매매가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빌라를 소유가 아닌 임차하는 이유이다. KB부동산 가격지수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가격은 지난 36년간(1986~2022) 666% 상승했다. 반면 연립주택은 183% 오르는데 그쳤다. 자금이 없어 빌라를 산 서민들이 아파트를 구매한 사람보다 재테크에서 손해를 본 것이다.
◇빌라를 고사시키는 정책
빌라는 가격이 오르지 않아 소유가 아닌 임대용 주거시장으로 전락했다. 정부는 서울 주거시장의 30%를 차지하는 빌라를 건전한 주거시장으로 육성시키기보다는 사실상 고사를 시키는 정책을 채택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아파트를 중심으로 정책을 펼치면서 빌라를 정책 사각지대에 방치한 것이다.
정부와 서울시 정책에서 빌라는 아파트로 재개발해야할 대상일 뿐이다. 일부 지역의 빌라가 지난 2~3년간 ‘투자상품’으로 각광을 받으며 가격이 뛰기도 했는데, 재개발 대상 지역의 노후 빌라들이다. 전세사기극이 벌어진 지역들은 재개발 대상이 될 가능성이 낮은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신축빌라는 재개발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재개발을 하려면 노후도를 충족해야 한다. 30년 이상된 건물이 전체의 3분의 2이상이어야 하고, 동시에 노후 건물 연면적이 60%를 넘어야 한다. 신축빌라로 인해 재개발 조합원이 늘어나면 사업성도 떨어진다. 서울시는 노후도를 완화하는 등 재개발 촉진 정책도 도입하고 있다.
◇ 저층 주거단지 활성화 대책 시급
김승배 한국부동산개발협회장은 “정부 정책이 황소개구리(아파트)만 보고 정책을 펼친다”고 비판했다. 김 회장은 “다세대 다가구 주택은 주차장, 관리서비스, 편의시설 부족으로 인기가 없다”면서 “이런 부분을 공공이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다세대 주택 사업자에게 주차장 부담금을 부과하는 대신 공공이 공용주차장을 확보하고 지역별 관리 업무와 피트니스센터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방법이다. 부동산 정보기술인 프롭테크를 활용, 다가구 다세대 주택에 아파트형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김 회장은 주장했다.
김진유 경기대 교수는 “빌라 등 저층주거 밀집지역에 놀이터, 공원, 주차장 등의 편의시설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공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빌라와 같은 저가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고 아파트 청약에서 불이익을 주는 청약제도도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일정 가격과 규모 이하의 빌라를 갖고 있을 경우, 농가주택처럼 무주택자로 인정해줘야 한다는 의미이다. 빌라 매매 시장을 활성화해야 주택품질 향상도 가능하다. 빌라 구입수요가 적어 업체들이 저렴한 임대용으로 공급하고, 주택품질은 더 낮아지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 김 교수는 “서구의 대도시에는 한국의 빌라같은 주택이 상당수이지만 우리와 달리 주택의 품질이 좋다”면서 “저층 주거지역을 모두 밀어내고 아파트를 짓겠다는 발상이 아니라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빌라의 발전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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