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다시 만나지 말아요"...피해자전담경찰관의 특별한 작별인사

원다라 2023. 4. 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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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경찰서 엄정연 피해자전담경찰관
유족 대신해 살인 사건 현장정리·심리지원 
성범죄 피해 청소년 자해 흉터 제거 수술도 
전국 259명뿐…인력·예산 부족 땐 '한계'
엄정연 피해자전담경찰관이 6일 서울 마포경찰서에서 범죄 피해자 업무 지원 관련 일정을 조율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이태원 참사 등을 포함해 끔찍한 대형 사고나 범죄 사건의 중심에 선 피해자와 유족들의 일상 복귀는 쉽지 않다. 정신적인 트라우마 극복도 벅찬 데다, 사건 사고 이후 현실적으로 필요한 주변 정리 또한 버거운 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범죄피해자지원경찰만 한 맞춤형 도우미는 드물다. 지난 2015년부터 운영된 범죄피해자지원경찰관에게 주어진 미션은 '피해자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법률·경제·심리적으로 돕는 데 있다. 엄정연(35) 서울 마포경찰서 피해자전담경찰관(서울서북권역장·경사)은 지금까지 서북권역에선 가장 많은 985건의 범죄 피해 상담을 진행했다. 지난 6일, 서울 마포경찰서에서 엄 경사를 만나 그동안 진행해 왔던 범죄 피해자 지원에 얽힌 뒷얘기를 들어봤다. 엄 경사는 현재 각종 범죄 피해자 관련 단체에 피해자전담경찰 대표로 강연도 병행하고 있다.

엄정연(앞줄) 서울 마포경찰서 소속 피해자전담경찰관이 지원 대상 유족 요청을 받아 고인의 짐을 정리하고 있다. 마포경찰서 제공

범죄 피해자들이 '일상' 되찾을 수 있도록 돕는 피해자전담경찰관

엄 경사는 2년 전, 이야기부터 꺼냈다. 2021년 여름. 남편이 살해당한 후, 아내 A씨가 해야 했던 건 슬픔을 이겨내는 것보다도 남편의 혈흔이 튄 벽을 새로 도배하고 부서진 현관문을 수리하는 것이 먼저였다. 범인이 검찰에 송치되고 남편의 장례를 치르는 두 달 동안, 월세도 밀렸다. 아빠의 부재를 눈치채고선 "하늘나라에 가면 아빠를 볼 수 있는 거냐"고 울기 시작한 다섯 살짜리 딸을 챙기는 것도 오로지 A씨의 몫이었다. 그런 A씨 대신, 살인 사건 현장 정리와 도배, 현관문 교체 등은 엄 경사에게 주어졌다.

"차라리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덜 힘들었을 것"이라고 토로했을 만큼, 남편과 사이가 좋았던 A씨에겐 심리치료도 필요해 보였다. 엄 경사는 이에 A씨에게 심리상담센터를 소개시켜 주고 치료비용 지급 절차도 도왔다. 엄 경사는 "가족이 살해당하는 경험은 대부분의 사람이 평생 한 번도 겪지 않는 일이다 보니,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당사자는 물론 친지들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며 함께 패닉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전국 범죄피해자지원경찰관이 지원해 온 범죄 유형별 피해자 지원 건수. 경찰청 제공

일상을 회복하고 있다는 '시그널'은 …"이거 어떻게 해야 하죠?"

사건 초기, 범죄 피해자들은 공통적으로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꺼낸다고 했다. 엄 경사는 개별 상황을 감안해, 이들이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할 만한 것들로 선택지를 구성해 피해자에게 우선순위를 정하게 하는 일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그는 "큰 충격을 받은 피해자들은 간단한 일상생활에 대한 판단 능력조차 상실한 경우가 많다"며 "선택지 중에서 우선순위를 고르는 과정 자체, 또는 해 나가는 과정에서 사건 전과 같은 자신의 일상에 대한 통제감을 되찾게 된다"고 설명했다. 엄 경사는 이때 식사와 수면 여부와 같은 기본적인 안부를 묻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요령이라고 귀띔했다.

엄 경사는 피해자의 일상 회복 신호에 대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는 시점이 찾아온다고 했다. A씨의 경우, 사건 5개월쯤이 지났을 무렵, 엄 경사에게 "월세를 내려면 유산 상속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당장 상속세를 납부해야 할 만한 금전적인 여유가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물어 왔다며 소개했다.


심리상담·임시 숙소 지원, '피해자 지원'의 핵심

A씨가 기운을 차리기 시작한 건, 엄 경사가 연계해 준 범죄 피해 트라우마 지원기관 스마일센터에서 자녀 심리치료 노하우를 배우게 되면서였다. 어른과 달리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심리 상태를 말로 표현하기 서툰 데다, '죽음'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때 아이를 위한 심리치료 방법 중 하나가 부모가 대화를 통해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가족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A씨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내가 빨리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안전하고 휴식을 취하는 장소여야 하건만, 집에서 범죄를 당한 피해자들에게 집은 매일 '그날'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장소다. 엄 경사가 2020년 가을에 만난, 성폭력 피해자 B씨는 무척 피곤한 모습이었다. "요즘 잠은 잘 주무세요?"라고 묻자, "매일 밤 세탁기 옆에서 소주 반병을 마시고 쪼그리고 잔다"는 답이 돌아왔다. 자신이 성폭행을 당한 침대에선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B씨는 엄 경사의 도움으로 임시 숙소에서 안정을 취하면서 이사도 할 수 있었다.


"경찰이 이런 일도 하나" 핀잔에도 흉터 지워 줄 병원 백방으로 수배

피해자전담경찰관이 고민에 빠질 때는 피해자에게 필요한 지원 내용이 현 제도상 지원 가능한 범주 밖에 있을 때다. C 고교생의 경우가 그랬다. 엄 경사가 이 학생을 처음 만났던 지난해 여름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에도 팔 토시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루밍 성범죄를 당한 이후, 자해로 생겨난 흉터를 다른 사람에겐 감추고 싶었던 터였다.

이 학생에겐 당장 남겨진 흉터 제거가 시급해 보였다. 하지만 자해로 생긴 흉터 치료 수술에 필요한 1,000만 원가량의 비용은 부담스러웠다. 엄 경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작정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겠냐"며 성형외과에 매달린 엄 경사의 도움 요청 전화엔 "경찰이 이런 일도 해요?", "진짜 경찰 맞아요?"라면서 대부분 퉁명스러운 답변만 돌아왔다. 그래도 엄 경사는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한 성형외과 전문의로부터 "도와주겠다"는 답변을 얻어냈다. 지난해 말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친 이 학생은 최근 대학 진학을 위해 학업에 열중하고 있다. 엄 경사는 "어린 나이에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었기 때문에, 앞으로는 더 이상 특별한 경험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며 "이 학생이 대학에 갔을 때엔, 흉터가 모두 사라져 입고 싶은 옷도 마음껏 입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엄정연 피해자전담경찰관이 한 범죄 피해자로부터 받은 편지. 이 피해자는 "제가 다시 일상을 누리도록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제게 닿았던 영향은 그 이상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받은 도움에 대한 감사함은 계속 간직하겠다"고 썼다. 엄정연 경사 제공
엄정연 서울 마포경찰서 소속 피해자전담경찰관이 한 범죄 피해자로부터 받은 편지. 편지 작성자는 "그 일이 일어난 것이 모두 제 탓이라고 자책했는데 제 잘못이 아니라고 말씀 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중간중간 안부 물어봐 주시고 제가 불안해 하는 것들에 안심시켜 주셔서 의지가 됐습니다"라고 썼다.

피해자들이 남기는 인사 "덕분에 살았어요"

엄 경사는 대부분 피해자들로부터 "덕분에 살았어요"란 고마움의 표시를 마지막 인사로 듣는다고 했다. 3개월간, 매일 밤 성범죄 피해자인 20대 딸의 방문 앞을 지켰던 D씨도 그랬다. D씨는 딸이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후부터는 딸 방문에 기대 앉아 자면서 작은 소리가 들릴 때마다 방 안을 살폈다고 털어놨다. D씨가 출근하면 다른 자녀가 방문 앞을 지켰다. 가족 모두에게 지옥과 다름없는 시간이었다. 엄 경사는 피해자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심리상담과 정신과 진료비를 지원했다. D씨가 마지막으로 엄 경사에게 보낸 병원 치료 영수증 위에는 "경찰관님 덕분에 저희 가족 모두가 살았습니다"는 짧은 메모가 붙어 있었다.

엄정연 서울 마포경찰서 소속 피해자전담경찰관에게 범죄 피해자 부모가 남겼던 메모. 엄정연 경사 제공

엄 경사는 피해자에게서 회복의 기미가 보이면 연락 빈도를 줄여 간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를 마지막 인사로 남긴다고 했다. 피해자에게 다시는 힘든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다.

누구보다 힘든 상황을 함께했음에도, 피해자에겐 피해자전담경찰관이 '다신 떠올리기 싫은 그 일'을 상기시키는 존재라는 점도 늘 염두에 둔다고 했다. 엄 경사는 "한번은 버스에서 담당했던 피해자를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피해자가 나를 보지 못하도록 일부러 창 쪽으로 몸을 돌려 숨었던 적도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에게 자신이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트리거'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다.

피해자전담경찰관 전국 경찰서 배치 현황. 경찰청 제공

피해자전담경찰관, 전국 259명뿐…예산도 부족

그러나 엄 경사와 같은 피해자전담경찰관을 만날 수 있는 피해자들은 안타깝게도 '일부'다. 인력 부족 탓이다. 피해자전담경찰관은 전국 258개 경찰서에 259명이 배치돼 있다. 1개서당 1명꼴이거나 아예 없는 경찰서도 있다.

범죄 피해자 지원 예산도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경찰청 범죄 통계에 따르면 2021년 기준 범죄 피해자는 142만9,826명이지만, 한 해 범죄 피해자와 가족에게 지급되는 치료비, 생계비, 구조금 등 직접 지원비는 283억6,900만 원뿐이다. 이 때문에 임시 숙소 지원도 1인당 최대 4박 5일까지만 지원된다. 이마저도 예산이 제한적이라, 1박씩만 지원하거나 10월쯤 되면 어쩔 수 없이 외상을 하게 되는 구조다.

엄 경사는 "예산이 부족하거나 현실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있을 때, 가장 안타깝다"면서 "이 일을 하다 보면 늘 피해자에게 필요한 지원이 무엇인지, 자원을 어떻게 확보해야 할지 고민해야 해 스스로가 사회복지사나 보험설계사, 영업사원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고 전했다.

엄 경사는 최근 4년간 985건의 범죄 피해 상담을 진행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직접 찾아가 만난 피해자만 289명이다. 엄 경사의 바람은 모든 피해자들이 스스로를 탓하며 힘들어하기보다 자신들에게 벌어진 일을 '교통사고'처럼 여기고, 다시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심리학 전공자를 대상으로 선발하는 피해자심리전문요원 경찰특채(경력경채)로 2018년 경찰에 입직한 엄 경사는 조만간 전공을 살려, 피해자 집단 상담 모임도 진행할 계획이다.

원다라 기자 dar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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