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옥수숫대 베놔서 어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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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뭐 할 거여?" 요즘 진부에 가면 인사 대신 오가는 말이다.
우리는 지난가을 옥수수 따고 옥수숫대를 베지 않고 세워둔 채 겨울을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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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뭐 할 거여?” 요즘 진부에 가면 인사 대신 오가는 말이다. “옥수수죠, 뭐.”
뾰족한 대안이 없다. 우리처럼 상주하는 농부가 아니면 감자나 옥수수인데, 감자보단 옥수수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맛있다. 물론 감자도 맛있다. 그런데 겨울에 여행 가서도 진공포장된 현지 옥수수를 사 먹어보고(어디 얼마나 맛있나보자), 옥수수 가공 과자도 사 먹고, 숯불구이 영상을 보는데 불에 굽는 옥수수가 제일 맛있어 보이고, 옥수수 캐릭터나 모형을 보면 꺅 소리를 지르고…. 어, 나 옥수수 좋아했네? 그런 이유로 올해도 옥수수로 정했다.
지난해에 심고 남은 얼루기 씨앗이 반 봉지 남아 있고, 이장님 통해 농협 미백 찰옥수수 씨앗도 한 봉지 구해놓았다. ‘이걸로 준비 끝!’이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밭을 갈아야 한다. 우리는 지난가을 옥수수 따고 옥수숫대를 베지 않고 세워둔 채 겨울을 났다. 2월에 농막에 가보니 온 동네 새란 새는 다 모여 옥수숫대 사이를 드나들고 있었다. 산비둘기 떼가 뒷산에서 낮게 날아 들어왔다 산으로 돌아가고 턱이 노란 놈, 몸통이 파란 놈, 조그마한 새들이 포롱포롱 날아오는 사이로 한 무리의 까마귀 떼가 전깃줄에서 대기하고 있다 내려앉아 잔치를 벌였다. 이러다 새 불러들인다고 욕먹겠다 싶어 옥수숫대를 정리하기로 했다. 남편은 예초기로, 나는 낫을 들고 작업에 들어갔다. 낫을 높이 쳐들고 잘 마른 옥수숫대 위쪽을 감아쥐고 아래쪽을 내려치면 원샷 원킬. 한나절 그렇게 하니 밭이 휑해졌다. 땀이 쪽 빠지고 무슨 큰일을 한 것처럼 기분도 좋았다.
남편이 예초기를 돌리다보니 밭에 두더지가 파놓은 흙더미가 많더라며, 두더지가 사는 자연친화적 환경에서 키운 옥수수라고 광고하자고 한다. 그래, 아예 밭 가는 것부터 씨 뿌리고 키우는 과정을 블로그에든 에스엔에스(SNS)에든 올려서 직거래로 팔자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
지난주 진부에 가서는 아랫집 어르신을 찾아 여러 번 댁에 들렀다. 이 댁 밭이 우리 밭 옆에 붙어 있는데, 트랙터로 밭을 갈 때 우리 밭도 같이 갈아달라고 부탁드릴 생각이었다. 본격적으로 농사를 준비하는 철이라 그런지 갈 때마다 만나기가 어려웠다. 전화를 해도 되지만 그래도 얼굴 보고 부탁드리려 다음날 오전에 다시 들렀다. 그리고 들은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 “옥수숫대를 베놔서 어려와. 그게 옥수수 따고 바로, 파랄 적에 갈아놔야 하기도 쉽고 거름도 되는데, 마르면 어렵다고. 그나마 마른 채로 서 있으면 갈리는데, 저렇게 땅에 있으면 젖어서 갈리지는 않고 머리칼처럼 기계에 감겨. 감긴 거 푸느라 일을 할 수가 없어. 돈 주고 트랙터 불러도 밭이 저러면 둘러보고 그냥 간다고. 조금 하다 풀 감긴 거 풀고, 조금 하다 풀고 그럴 시간이면 밭 하나 더 갈지.”
올해는 그냥 풀이나 키워야 하려나. 아, 블로그… 직거래… 온갖 생각이 스치는데, “요즘 바빠서 당장은 힘들고 댕기다가 봐서 해 좋은 날, 말라 있을 때 한번 갈아볼게. 될지 안 될지는 아직 몰러” 하신다.
해가 쨍하고 옥수숫대가 잘 마르고, 어르신이 짬이 나 밭을 갈아줄 수 있으면 블로그 오픈 소식 전하겠습니다.
글·사진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박기완 토종씨드림 활동가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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