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포퓰리즘은 그만 봐야 하지 않겠는가
내 눈에만 이상해 보이는 것인지 모르겠다. 올해 들어 이어지는 정부와 여당의 갈지(之)자 정책 행보 말이다. 처음에는 실수로 그럴 수도 있었겠다 했는데, 반복되니 이제는 정부와 여당의 정책 철학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연초부터 정부는 반도체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을 부랴부랴 올리는 촌극을 벌였다. 반도체는 한국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이다. 반도체가 심하게 부진하면 경상수지는 적자로 돌아서고, 경제성장률까지 영향을 받는다. 지금 한국의 상황이 딱 그렇다. 더구나 반도체 산업은 미국과 중국 사이 벌어지는 패권전쟁의 핵심 전장(戰場)이다. 각국은 앞다퉈 지원책을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애초 특정 산업을 과도하게 지원할 수 없다며 세액공제 확대에 선을 그었다. 그러다 대통령의 한 마디에 갑자기 세금을 깎아주겠다며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꿨고, 결국 야당에 쩔쩔 매가며 간신히 법안을 통과시켰다. 헛웃음이 나온 장면이지만, 정부가 좋은 방향으로 입장을 바꾼 것이니 다행한 변덕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이후에는 다행한 변덕이라고 보기 어려운 일들이 이어지고 있다. 국정 운영 철학 자체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은 아닌지를 의심케 한다. 전기·가스 요금과 쌀 생산 관련 정책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작년부터 원가에 못 미치는 전기요금과 가스요금을 정상화하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수요가 많은 겨울철임에도 요금을 올리는 강수를 뒀다. 문재인 정부가 요금을 올리지 않은 부작용이 컸던 상황이라서다. 한국전력의 지난해 연결 기준 적자는 32조원을 넘어섰고, 사실상 적자의 결과인 가스공사의 미수금은 9조원에 육박했다.
에너지 요금을 올리면 지지율이 하락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래도 정부는 할 일은 한다는 뚝심으로 요금을 올렸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은 최근 2분기 전기와 가스 요금 인상을 보류했다. 아직 갈 길이 먼 상황인데 말이다. 한전과 가스공사의 자구노력부터 해야 한다는 논리를 갑작스레 들고 나왔는데 군색하기만 하다.
쌀 관련 정책도 마찬가지다. 야당이 주도해 통과시킨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과잉생산된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사들이는 것을 골자로 한다. 많은 예산이 드는데다 줄여야 할 쌀 생산을 오히려 늘리는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줄곧 이 법안에 반대했다. 대통령은 정치적 논란을 감수하고 양곡법에 대해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는 올해 수확기에 80㎏ 쌀 한 가마니 가격이 20만원이 되도록 하겠다는 정책을 슬그머니 내놨다. 정부가 시장에서 쌀을 적극적으로 사지 않고서는 실현이 불가능하다. 쌀값이 오를 거라는 신호로 받아들인 농민들이 쌀 생산을 늘릴 가능성도 있다. 양곡법 개정안과 비슷한 부작용이 뻔히 보이는데 이를 어찌 설명할까.
에너지 요금을 올리고 쌀 매입을 줄이는 정책은 인기가 없는 정책이다.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 하락하는 경우라면 이런 정책부터 손을 대고 싶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남아있는 지지자의 상당수는 당장 자신에게 조금 손해가 있더라도 국가의 장기 전략에 부합하는 정책을 써주길 바라는 사람들이라서다.
전기요금 인상을 내일로 미룬다 한들 빚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자까지 붙어 조만간 더 큰 부담으로 온다. 농업 정책 역시 쌀 생산을 줄이는 데에 집중하는 것만이 불균형을 바로잡을 바른길이다. 이것을 알고 내 주머니가 조금 가벼워지더라도 묵묵히 정부를 응원하던 이들이 지금 정권을 떠받치는 지지층이다. 이들마저 정부에 등을 돌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당선 인사에서 정치적 유불리가 아닌 국민의 이익과 국익이 국정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에너지 요금 인상을 미루고 쌀을 더 많이 사서 농심을 얻는 것이 과연 국민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정책을 잠시라도 바꾸자고 속삭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부터 멀리 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부의 포퓰리즘을 비난하던 사람들이 점점 그들과 비슷해져서야 되겠는가.
[이재원 경제정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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