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K-반도체를 몽땅 빼앗아 간다고?
● 여야 막론한 성마른 호들갑
● 트럼프→사이머→ASML…
● 가장 복잡한 다국적 공급사슬
● 마오의 ‘인민의 반도체’ 文의 ‘소부장 독립’
● 메모리 반도체 생산과 감자 농사
● ‘반도체 산유국’이란 착각
3월 17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한 식당에 50대 혹은 60대로 보이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슷한 연배의 세 남자가 모여 앉아 보쌈에 소주 한 잔을 걸치며 이런 저런 대화를 하던 중 언성이 높아졌고 옆 테이블에 앉은 내 귀에 들어왔던 것이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이야기의 골자는 이랬다. 미국은 이른바 '반도체 과학법'이라는 것을 발표해 한국 기업이 미국에 투자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것만 해도 한국에 공장을 덜 짓게 하는 것인데, 그 세부 내용을 보면 미국에 한국의 반도체 기술을 퍼주라는 이야기가 한가득하다. 아무리 미국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라지만 이건 너무 부당한 일이다.
문제의 식당은 더불어민주당의 '텃밭'으로 꼽히는 마포을 지역구에 위치해 있다. 세 중년 남성은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을 향해 이른바 '굴욕 외교'를 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대화의 맥락을 놓고 볼 때 그들은 야당 지지자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반도체를 자국에서 생산하는 산업 정책, 이른바 '리쇼어링(Reshoring)'을 추구하는 미국이 한국의 '반도체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인식은 야당과 그 지지자들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여당 지지자, 현 정부의 외교 정책을 지지하는 언론을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의견이다.
자유무역의 수호자였던 미국이 보호무역주의로 돌아서고 자국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공격적인 수단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미국이 우리의 국익을 침해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미국이 한국의 반도체 주권을 빼앗아가려 한다'는 식의 성마른 호들갑은 옳지 않다. 잘못된 네이밍은 잘못된 현실 인식을 가져오고, 잘못된 현실 인식은 그에 상응하는 쓰라린 대가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해보자. 2023년 현재, 지구상에 반도체 '주권'을 가진 나라는 단 한 곳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도체는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제품 중 가장 복잡한 다국적 공급사슬을 지닌 상품이며, 그 공급사슬 없이는 생산 불가능하다.
물론 반도체 산업에서의 '주도권'은 분명히 있다. 가장 큰 지분을 가진 나라는 당연히 미국이고, 그 다음이 일본, 대만 순이다. 한국은? 약간의 주도권을 지니고 있는 것은 분명하나, 일본은 고사하고 대만과 같은 입지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반도체 '주권'이라는 잘못된 프레임은 그래서 위험하다. 반도체 '주권'이라는 허깨비를 쫓아서는 안 된다. 그러다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반도체 '주도권'을 상실할 수 있다. 필자가 최근 번역을 마치고 4월 첫째 주 현재 출간 준비 중인 '칩 워: 누가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것인가'의 내용을 일부 참고해 오늘날의 반도체 산업이 지니고 있는 특성과 그로 인한 전후 사정을 이해해 보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기서 기술적으로 가장 난이도가 높은 과정이 바로 광선을 쬐는 것, 이른바 '포토' 공정이다. 그 공정을 수행하는 장비를 리소그래피 장비라고 부른다. 독자 여러분도 이름을 들어봤을 네덜란드 기업 ASML은 첨단 리소그래피 장비를 공급하는 사실상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회사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가시광선은 빛의 파장이 크고 난삽하다. 마치 볼펜심의 구경이 작을수록 더 세밀하게 글씨를 쓸 수 있듯, 최대한 파장이 좁은 광원을 사용해야 더 섬세한 반도체 회로를 그릴 수 있다. 반도체 업계는 가시광선을 넘어 자외선, 자외선보다 파장이 좁은 심자외선, 이제는 파장이 10~100㎚(나노미터) 내외인 극자외선을 동원해 실리콘 웨이퍼 위에 패턴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극자외선은 형광등처럼 전구를 끼워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생성하는 과정 자체가 인류 과학 기술의 승리다. 직경 0.003㎜의 주석 방울을 진공에서 시속 321.8㎞로 날려 보낸다. 그것을 레이저로 두 번 적중시켜야 한다. 그래야 플라스마 상태가 된 주석 방울이 폭발하면서 극자외선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1초에 5만 번이 넘도록 극히 미세한 주석 방울을 터뜨려야 반도체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에너지를 지닌 극자외선을 확보할 수 있다.
기술적으로 들어가면 한도 끝도 없이 복잡한 내용이지만 결론은 단순하다. 우리가 흔히 쓰는 스마트폰 속에 들어 있는 반도체, 그 중 핵심인 AP는 네덜란드 기업 ASML이 조립하는 리소그래피 장비 없이 만들 수 없다. 그런데 ASML은 앞서 말했듯 현 시점에서 극자외선 광원을 만들 수 있는 기업인 사이머(Cymer)를 필요로 한다.
사이머는 미국 기업이다. 그 사이머의 극자외선 생성기가 작동하게끔 하는 강력한 레이저는 독일의 정밀 기계 업체인 트럼프(Trumpf)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트럼프의 아성에 도전하는 기업들이 세상에 없지 않으나, 현재로서는 독일 기업 트럼프의 레이저가 미국 기업 사이머의 광원 생성기에 들어가고, 사이머의 광원이 있어야 네덜란드 기업 ASML의 리소그래피 장비가 작동한다.
반도체 생산의 공급 사슬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극자외선을 통제하려면 반사하는 과정이 필수적인데, 극자외선은 파장이 너무 짧아 거의 모든 사물에 그대로 흡수될 뿐 반사되지 않는다. 극자외선 반사판 제작은 그 자체로 인류 공학 기술의 한계에 도전하는 일이며, 현재 ASML의 장비에 들어가는 극자외선 반사판을 공급하는 업체는 독일의 자이스다. 여기 등장한 내용은 말 그대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첨단 기술 기업이 첨단 기술 기업을 필요로 하는 공급사슬이 있어야 반도체 제조가 가능하다.
20세기의 마오쩌둥, 21세기의 문재인
반도체 산업에 있어서 '주권'을 논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물론 리소그래피뿐 아니라 집적회로, 반도체를 이루는 개별적인 단위인 트랜지스터마저도 미국의 발명품인 것은 맞다. 하지만 미국도, 일본도, 심지어 '반도체 굴기'에 성공한다 해도 중국조차, 이 엄청난 공급사슬을 자국 내로 모두 빨아들일 수는 없다. 세상 그 어떤 나라도 반도체 '주권'을 누릴 수는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어떤 나라가 '100% 국산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시도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세상에는 종종 말도 안 되는 짓을 스스로 시도함으로써 타산지석의 교훈을 전하는 선량한 모험가들이 나타난다. 문화혁명 당시 마오쩌둥이 호령하던 중국이 바로 그랬다. 중국은 갓 시작된 반도체 산업을 사실상 스스로 해체하고, 전자공학자와 물리학자, 반도체 엔지니어들을 각지의 농어촌으로 내려 보냈다. 거대한 제철소를 폐쇄하고 대신 집집마다 나무를 떼어 고철을 녹여서 농기구를 만들라고 지시했던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마오쩌둥 주석은 하방 보낸 반도체 기술자들에게 '인민의 반도체' 제작을 명했다. 이 얼토당토않은 지시는 중국 반도체 산업, 더 나아가 중국 경제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일으켰다.
오늘날의 중국은 스스로의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일단 미국의 반도체 장비 수출 제재를 당하고 있는 현재는 삼성전자와 TSMC로 대표되는 첨단 반도체 제조 사업에 아예 끼어들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인민의 ASML'을 설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기에, 현재 중국은 높은 기술 수준을 요구하지 않는 저가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쪽으로 방향을 튼 상태다.
이 대목에서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다. 문재인 정권이 추구했던 '반도체 소부장 독립'은 무모한 수준을 넘어 일종의 자폭행위였다는 것이다. 그 엄청난 돈을 반도체 산업 육성에 쏟아 붓고도 중국은 반도체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 여러 차례 강조하지만, 특히 첨단 반도체 제조에 있어서 그런 식의 '반도체 주권'은 그 어떤 나라도 가질 수 없다. 한국처럼 소재, 부품, 장비 분야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나라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 정권은 마치 그런 일이 가능하기라도 한 것처럼 국민 여론을 호도하며 대중 감정을 증폭시켜 정치적 밑천으로 삼고자 했다. 20세기의 마오쩌둥이 '인민의 반도체'를 만드는 일에 실패했는데, 21세기의 문재인이 '민족의 반도체'를 만드는 일이 과연 가능하기나 했을까. 돌이켜보면 실로 아찔한 일이다. 2010년대 말, 대한민국은 반도체 '주권'을 외치면서 반도체 '주도권'을 빼앗기는 모순의 구렁텅이로 향하고 있던 것이다.
석유 대신 반도체가 나오는 나라?
반도체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계산을 수행하는 '프로세서' 혹은 '로직 칩', 정보를 저장하는 '메모리', 전파나 가시광선, 소리 등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로 전환하는 '아날로그'가 그것이다.첫 번째 분야인 로직 칩은 대만이 시장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고객들이 설계해온 반도체를 제작해주는 일을 전담하는 이른바 '파운드리' 사업 모델을 개척한 회사, TSMC 덕분이다. TSMC는 창업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파운드리 분야의 선두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다른 회사가 따라오지 못할 공격적인 투자를 반복하며 경쟁자를 말려 죽이는 이른바 '초격차' 전략의 선두주자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극자외선 장비의 경우 TSMC는 수백 대를 보유하고 있으나 삼성전자는 수십 대, SK하이닉스는 고작 두 대를 운용하고 있다는 점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메모리 칩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1, 2위 기업이다. 미국의 마이크론이 SK하이닉스의 뒤를 바싹 쫓으며 3위를 기록 중이다. 1위와 2, 3위 사이의 거리는 멀지만 2위와 3위의 격차는 그리 크지 않다. 3위 마이크론의 뒤로도 여러 경쟁자가 따라붙어 있다. 요컨대 메모리 반도체 시장, 특히 D램 시장의 경쟁은 파운드리 시장보다 훨씬 치열하다. 로직 칩과 메모리 칩의 근본적인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로직 칩은 고객의 주문을 받아 제작 생산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TSMC와 삼성전자의 기술 격차가 엄연히 존재하는 터라, TSMC에서만 제작 가능한 영역이 있고, 그 자리를 삼성전자가 적어도 지금 당장 대체할 수는 없다. 반면 메모리 칩은 범용성을 지니는 상품(commodity)이다. 삼성전자의 기술력과 생산 노하우 덕분에 경쟁업체보다 저렴한 가격에 많은 칩을 만들어낼 수 있다. 경쟁력의 본질이 가격에서 나온다는 소리다. 자칫하면 2위와 3위의, 혹은 1위와 2위의 순위가 바뀔 가능성이 파운드리에 비해 더 높다.
미일반도체협정과 플라자합의로 연달아 결정타를 맞은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순식간에 한국에 그 자리를 빼앗긴 이유를 이제 독자 여러분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이크론의 창업자 워드 파킨슨과 조 파킨슨 형제에게 자금을 대고 경영 노하우를 전수했던 아이다호의 '감자 사나이' 존 리처드 심플롯이 잘 간파했듯, 메모리 반도체 생산은 감자 농사와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더 낮은 가격에 더 균일한 품질의 제품을 많이 찍어내는 자, 불황을 버텨내고 경쟁자를 털어내는 자가 더 큰 시장 점유율을 가져가는 게임이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1990년대 이후 메모리 반도체 칩 싸움에서 연이어 큰 판돈을 걸었다. 상대가 '다이'를 외칠 때까지 콜을 부르거나 레이스를 외쳤다. 그리하여 그 게임의 승자가 됐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함부로 장담할 수는 없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타국에 비해 높은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맞지만, 우리 스스로를 '석유 대신 반도체가 나오는 산유국'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 기업이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차지하고 있는 입지는 '주도권'일 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지니고 있는 양도 불가능한 '주권'이 아니다.
양향자와 민형배 사이에서
미국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향해 '보조금을 줄 테니 기술을 내놓으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현상을 두고 민족주의적 감정에 휩싸여 분통을 터뜨리며 '반도체 독립'을 꾀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반도체의 소재, 부품, 장비 분야에도 힘을 쓰는 것은 좋은 일이나, 민족주의적 열정에 사로잡힌 대중 정서를 타고 '반도체 독립'을 운운하는 것은 자폭이다. 2010년대 말의 패착을 또 반복하는 일이다. 이는 메모리 반도체 3위 업체인 미국의 마이크론과 다른 경쟁자들에게 우리를 따라잡을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이 글을 시작하며 인용한 술자리 발언을 다시 떠올려 보자. "미국 놈들이 우리나라 반도체를 몽땅 빼앗아 가려고 한다니까" 이제 독자 여러분은 이 말의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미국이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을 '빼앗아' 갈 수 없다. 반도체 제조는 엄청난 고가의 설비와 그것을 장시간 운용하는 노하우가 결합돼야 가능하며,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잡한 글로벌 공급 사슬의 지배를 받는 산업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실에 안심할 수는 없다. 외려 더 긴장해야 한다. 사실 미국으로서는 메모리 칩에 집중된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빼앗을' 필요조차 없다. 한국 스스로 허점을 보이기를 기다렸다가 합법적이고 깔끔한 시장 논리에 따라 마이크론이나 다른 기업이 그 시장을 차지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문제는 미국이 아니라 한국, 특히 한국의 정치다. 민주당 출신 김진표 국회의장은 국회 첨단전략산업특별위원회에 국회 내 유일한 반도체 전문가 양향자 의원 대신 민주당에서 위장 탈당한 민형배 의원을 넣었다. 앞으로 대한민국이 반도체 주권은 고사하고 주도권이라도 지킬 수 있을까.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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