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꽃의 영화뜰] 엄마가 싸준 김밥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미디어오늘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라이스 보이! 라이스 보이!” 1990년 캐나다의 어느 학교, 한 무리의 백인 아이들이 신이 나 외친다. 놀림의 대상이 된 건 검은 머리의 앳된 꼬마다. 주문처럼 반복되는 '라이스 보이'(Rice Boy)는 다름 아닌 '쌀을 먹는 아이'라는 뜻, 동현(노엘 황)이 도시락으로 싸온 김밥이 화근이었다. 샌드위치 같은 밀가루 음식만 먹고 자란 캐나다 아이들에게 고소한 참기름을 두른 흰 쌀밥에 갖은 야채를 넣어 만든 한국의 김밥은 '냄새나는 이상한' 음식이었던 모양이다. 그 음식을 싸온 주인공 동현은 가차없는 따돌림을 당한다.
19일 개봉하는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쉽게 입 밖에 낼 수 없는 사정을 안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어린 아들과 젊은 엄마의 적응 분투기를 섬세한 시선으로 되돌이켜보는 작품이다. 실제 캐나다 이민을 경험한 한국계 앤소니 심 감독이 자전적인 일화를 담아 연출했다. 관객으로서는 배우 윤여정에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안겼던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의 캐나다 버전으로 견주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미국 이민 1세대 부부(스티븐 연, 한예리)와 달리 캐나다 이민 1세대 싱글맘(최승윤)에게는 배우자가 없고, 할머니 순자의 보살핌을 받았던 꼬마(앨런 김)와 달리 '라이스보이 슬립스' 주인공 동현에게는 아버지도, 조부모도 없다는 점이다.
자기 삶의 뿌리를 추정해볼 만한 아무런 단서 없이 청소년으로 성장한 동현(이든 황)은 점차 한국 음식에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캐나다 사람과는 다르다'는 상징 그 자체인 한국 음식을 왜 계속 먹으며 살아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화가 난다. 엄마는 먹는 것뿐 아니라 침대에서는 신발을 벗는 등 생활방식도 한국식을 고수하는데, 그러면서도 동현이 궁금해하는 중요한 질문에는 답해주지 않는다. 한국에 다른 가족이라도 살고 있는 걸까, 왜 엄마와 나만 단둘이 캐나다로 왔을까, 아빠가 일찍 돌아가신 이유는 뭘까.
영화는 동현의 엄마 소영(최승윤)에게도 그럴 만한 사정은 있다는 걸 보여주는 데에도 결코 소홀하지 않다. 소영은 짧은 영어로 어렵게 취직한 공장에서 툭하면 엉덩이를 쳐대는 백인 남자들의 성희롱에 응수하며 돈을 벌어야 하고, 아들 이름을 “발음하기 쉬운 영어식으로 바꾸라”는 교사의 편의적인 권유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캐나다 생활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한국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남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아들과 자신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만 차마 아들에게 남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지 못했을 뿐이다.
모자의 복잡한 입장을 두루 이해하게 된 즈음, 관객은 이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과 마주한다. 두 사람이 모종의 연유로 짧은 기간 한국을 다시 찾게 되기 때문이다. 동현은 이 대목에서 처음으로 평생 본 적 없던 친척과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아버지 유품을 건네받는다. 여전히 명쾌한 답을 말해주는 이는 없지만, 적어도 부모님의 지난 시간과 지금의 자신이 있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가늠해볼 만한 약간의 단서는 얻게 되는 셈이다. 쓰레기통에 김밥을 쏟아버렸던 어린 시절의 자신으로부터 10년쯤 흐른 뒤에야 어렵게 얻게 된, 자기 뿌리에 대한 희미한 단서다.
긴 여정을 거쳐 다져진 '라이스보이 슬립스' 모자의 관계가 정성스럽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감독이 공들여 완성한 영상 덕분이기도 하다. 30여 년 전 과거를 회상하듯 아련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전체 분량을 16mm 필름 카메라로 촬영했고, 약 4:3에 가까운 화면비(1.33:1)를 한국 촬영 분량부터는 1.85:1로 확장하는 변화를 줬다. 지난달 30일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한 앤소니 심 감독은 고단한 삶에 갇혀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주인공들의 캐나다 생활은 좁은 화면비로, 한국에 잠시 돌아와 가족의 역사를 알게 된 뒤 보다 편안한 마음을 품게 된 이들의 며칠 간은 넓은 화면비로 대조 연출했다고 설명했다. 영화의 맥락과 메시지를 강화하는 영상적 시도를 눈여겨 보는 것 역시 관람의 또다른 재미가 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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