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입겠지’…봄날, 과감하게 버리고 정리할 시간
냉장고 정리하며 낡은 소망 버리기
엄마가 준 이불은 다시 이불장으로
성 확정 전 산 셔츠는 신랑이 입는 중
서로 가진 것 보여주고 이해 구하기
먹고사는 일 앞에 서면, 키까지 줄어드는 느낌이다. 몸도 마음도 쪼그라들어 무릎 언저리다. 추궁을 당한 것도 아닌데 답을 찾고, 다그친 사람도 없는데 내가 나를 야단친다. “이번 달은 어떻게 살래, 그래 가지고 나이 들면 어쩔래?
한달 동안 필요한 물품들의 목록을 가늠하고, 그 개수와 값을 살피는 일은 그나마 쉽다. 쿠폰이 나오는 날이 언제더라? 봄날이라고 중복 쿠폰이 추가되진 않았나? 몇개를 사야 이득일까? 가격을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눈다. 특별 쿠폰이라고 기간까지 정해 광고를 하더니, 아무리 비싼 걸 사도 할인 한도는 3천원, 끽해야 5천원. 행사 기간이라고 대단히 선심 쓰는 듯 떵떵거리지만, 쿠폰을 여러 장 써도 행사 이전 가격에서 겨우 몇백원 차이라는 걸 깨닫고 나면, 허탈해진다.
쓸모없는 자학이나 자책은 또 어김없이 내 손해다.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자괴감과 낙담의 발진을 쓰다듬으며, 아무렇지 않게 그 위에 손톱으로 열십자를 눌러놓고서 잊어야 한다. 내가 해야 할 건 다 했으니 이제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 믿으면서. 생존의 계산이란 예외 없이 간단하고, 그 해답을 따라 움직이면 그뿐이라고 결론지으면서.
‘언젠가 입겠지’의 ‘언젠가’는…
봄을 맞아, 냉장고를 정리했다. 어차피 먹지 못할 음식은 버려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 쌀 한 톨 어쩌고 하는 얘기를 들으며 자란 세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냉동실에 넣으면 어떤 것도 썩지 않고 몇년쯤 거뜬히 보관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썩지 않은 것이라고 처음 그대로일 리 없는데, ‘먹을 수 있다, 아직 멀쩡하다’는 낡고 낡은 염원을 2023년의 나마저 반복한다. 형체도 알 수 없이 돌덩이가 된 무언가를 들고서, 도저히 먹을 마음이 들지 않을 것만 같은 재료들을 물속에 담그며, 유효기간이 지난 소망을 놓지 못한다. 아깝다고 꾸역꾸역 입속에 밀어 넣다간, 이제 몸이 탈 날 나이.
낡은 소망을 먼저 버려야 한다.별 효용도 없는 이유나 근거를 붙들고서 놓지 못하는 습성을 바꿔야 한다.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지켜야 하는 많은 것 중에 마지막까지 남겨야 하는 것은 돌덩이가 된 그것이 아니라, 냉장고. 낡은 염원이나 믿음으로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다. 미래의 나와 우리를 위해 지켜야 할 것은 따로 있는지 모른다.
이불도 정리했다. 쓸모가 겹치는 순으로 일단 이불들을 끄집어내 나눴고, 겹친 것 중에서 다시 구입 순서대로 나눴다. 오래된 것은 낡은 것, 끌어안고 쓰지 않으면 쓰레기를 끌어안은 것과 다르지 않은 것. 무더기로 이불들을 끌어내 종량제 봉투 안에 밀어 넣다가, 꽃분홍 이불 한 장에 마음을 뺏긴다. 가져다가 덮으라고 언젠가 엄마가 건네주었던 이불 한 장. 그때 싫다고 물리칠걸, 그래도 엄마가 주는 건데 하며 받아왔던 내가 후회스럽다. 지워진 기억 속 엄마와 나를 하나로 둘둘 싸맸던 포대기 천과 비슷한 그 얄팍한 누빔 이불을 들고서, 생각이 많아진다. 이것도 낡은 건가, 오래되었으니 낡았나?
아무리 오래되어도 낡을 수 없는 마음을 들고서, 나는 꽤 오래 머뭇거렸다. 빵빵해진 이불 종량제 봉투를 뒤적거리며, 다른 핑계를 찾아본다. 두껍지 않으니까, 뭐 얇은 이불이니까, 엄마가 준 거니까, 나는 끝내 꽃분홍에 흰 강아지 그림이 점점이 박힌 이불을 이불장에 개어 넣는다. 완벽한 정리는 또 올해도 실패.
실패한 나를 눈감아준다. 이 정도 정리했으면, 이 정도 정리하지 못한 마음도 용인받아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넉넉한 마음을 흉내 낸다.
옷들도 한 무더기 내다 버렸다. ‘언젠가 입겠지’의 ‘언젠가’는 끝내 오지 않았다. 오지 않을 미래를 핑계로 나는 너무 많은 현재를 양도한 채 살았구나 깨닫는다. 버려야 할 것들에 성별은 없었다. 항상 그랬듯이 내 옷장엔 여자 옷과 남자 옷이 뒤섞였는데, 버려야 할 때는 그저 꾸역꾸역 담긴 쓰레기일 뿐이었다.
끝까지 계산에 매달리고 어떻게든 이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떤 경우엔 이익이 아니라 짐이 된다는 걸 알게 된다. 이 정도 할인이라니 돈 벌었다고 믿으며 쓴 돈들은 결국 쓰지 말아야 할 돈이었고, 벌기는커녕 온전한 낭비였던 걸 깨닫는다. 공짜나 다름없다는 말은 공짜가 아니라는 말과 다를 게 없는데, 그 사이에서 허우적거렸던 나를 발견한다. 나 스스로 나에게 속아, 내 믿음에 속아, 쓰레기들을 나 자신에게 떠넘겼던 날들.
소외를 이겨내기 위한 해결책
낡고 낡은 옷 더미 중에 20년도 넘은 티셔츠 두 장을 발견한다. 성 확정 치료를 시작하기도 전에 입었던, 그러니까 호적상 남자였을 때 샀던 오래된 남자 옷들이다. 지금은 내가 아니라, 신랑이 그 옷을 입는다. 언젠간 찢어지겠지 기다렸는데, 두 장 다 아직 멀쩡하다.나일론으로 만든 얄팍한 그래픽 티셔츠 두 벌인데, 어떻게 몇십년을 버틴 건지. 내가 남자였을 때 입었던 옷이, 무슨 이유로 지금 내 신랑이 입는 옷이 된 건지. 우연과 마주침 속에 숨은 그 이어짐은 날마다 우리에게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걸까? 우리는 알 수 없다. 섣불리 확신하지 말아야 한다.
끝내 그 셔츠 두 장은 버리지 않고 남겨둔다. 정말 어디까지 버틸까 한번 지켜보자는 심정이다. 얼마나 오래갈까, 어느 순간에 정리될까, 나의 외피였다가 지금은 신랑의 외피가 되어버린 그 옷은.
그러나 어떤 계절이 돌아와도 정리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퀴어라면 누구라도 그런 게 한두 가지 떠오를 것이다. 아무리 쿠폰을 쓰고 계산기를 두드려도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으니, 정리도 안 되고 계산도 안 되어 끌어안고 사는 수밖에 없는 지긋지긋한 것들. 앞으로 그런 채로 또 여러 해를 버티며 살아야 한다니 답답하고 곤혹스러워도, 벌겋게 부풀어 오른 내 좌절 위에 열십자를 꾹꾹 눌러놓고 버텨야 하는 날들.
어쩌면 삭막한 생 위에 홀로 버려진 마음이라면 퀴어가 아닌 누구라도 마찬가지인지 모른다. 이 시대의 소외는 모든 방향으로부터 떠밀려오고, 그 소외를 이겨내기 위해 계산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면, 여러 마음을 기꺼이 모으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면, 서로가 끌어안은 쓰레기를 보여주고 이해해달라 부탁하는 수밖에는. 형편없이 낡고 불편한 꼴이어서 미안하지만, 나 가진 게 그것뿐이라고 무릎을 감싸는 수밖에는. 먹고살아야 해서, 살아남아야 해서.
또 봄날이 왔다. 정리의 시간이다. 과감하게 버리고, 최소한만 남겨야 한다. 그 한 몸 생존을 위해 너무 많은 걸 꽁꽁 싸매고 둘렀다. 생필품이라고 믿는 그것들도, 그 마음까지도.
소설가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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