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사라진다면, 지구는 인간을 그리워할까

2023. 4. 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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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books] 그레이엄 하먼의 <사변적 실재론 입문>

[박범순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저널리스트인 앨런 와이즈먼은 <인간 없는 세상>(2007)에서 흥미로운 사고 실험을 제안한다. 어느 날 갑자기 인류가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인류 문명의 상징물인 온갖 건축물과 도로와 기계와 장비는 폐허가 되고 이미 사라진 생물종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겠지만 자연에는 새로운 생명체로 활력이 넘치지 않을까? 이때 지구는 인간을 그리워할까? 그는 그럴 수 있다고 상상한다. 인류의 멸종을 두고 거대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대신, 자연의 관리자로서 인간의 부재를 안타까워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앨런 와이즈만, <인간 없는 세상>, RH Korea, 2007, 이한중 옮김)

와이즈먼에게 인류 멸종의 상상은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너무나도 크게 변해버린 지구의 현 상황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사고 실험은 역사학자인 디페시 차크라바르티에게 인류세라는 새롭게 제시된 지질학적 개념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이어주는 인간 경험의 연속성에 대한 근본적인 가정이 무너진다면 역사를 어떻게 서술할 수 있을 것인가? 기후위기와 같은 현재 인식이 인간 없는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면, 인간의 유한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면, 과거를 연구하고 해석해 역사적 감각을 제공해온 역사가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인간이 생물학적 행위자로서 오랜 세월 생태계를 바꿔왔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 지구의 역사를 바꿀 정도로 힘이 센 지질학적 행위자로 등극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서술할 수 있을까? (Dipesh Chakrabarty, "The Climate of History: Four Theses," Critical Inquiry, vol. 35, no. 2 (Winter 2009), pp. 197-222)

철학자들은 이 같은 고민을 사변적(思辨的, speculative)이라고 할 것이다. 칸트와 같은 서양 철학자들은 경험할 수 없는 대상을 이론적으로 사유하고 논의하는 작업을 사변적으로 보았다. 공자는 중용에서 "깊게 생각하고(愼思) 분명히 변별함(明辯)"을 뜻하는 사변을 통해 "아무리 어리석은 자도 반드시 밝아지고, 아무리 부드러운 사람도 반드시 강해진다"라고 했다. (이원진, "21세기 사변의 두 흐름: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과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의 만남", <비평문학> 제83호, 2022, pp. 224-247)

하지만 21세기에 들어 사변적이란 말은 특정 철학적 조류를 뜻하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기존의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에 기대어 텍스트와 담론, 사회적 실천의 분석에 집중하기보다는, '사변적 전회'(speculative turn)를 주도하는 일군의 철학자들은 사물의 실재 자체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끌어내는 방법으로 기후변화, 인간-기계 관계, 인지과학의 최신 문제를 다루자고 제안한다. (Levi Bryant, Nick Smicek, Graham Harman, The Speculative Turn: Continental Materialism and Realism (re.press, 2011))

이들이 주장하는 사변적 전회의 출발점은 세계에 대한 인간중심적 사고를 존재론적으로 비판하는 데 있다. 그럼, 이들의 존재론은 어떤 점에서 새로운가?

그레이엄 하먼의 <사변적 실재론 입문>은 본인을 포함해 사변적인 방법으로 존재론을 연구하기 시작한 초기 연구자들이 어떻게 모였고 어떤 철학적 지향점을 공유했으며 어떻게 서로 다른 방식의 이론을 발전시켰는지를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따라서 철학사적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이와 함께 입문서의 취지를 살려 각 절 마다 핵심 개념과 주장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연습문제도 제공되어 있다. 하지만 사변적 실재론을 처음 접하는 독자가, 특히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이 책 한 권으로 사변적 실재론이 제기하는 질문의 핵심과 이에 답하는 방식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의 철학이 각각 어려운 점도 있지만, 책을 읽고 나서 과연 "사변적 실재론이 정말 존재하나?"와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변적 접근법의 필요성엔 모두 동의하는데 존재론을 전개하는 방식에선 너무 다르다. 하먼은 이런 다양성을 사변적 실재론의 잠재력이라고 애써 둘러대지만, 다른 이들은 일찌감치 짐을 싸서 이 진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심하게 표현하자면 이 책은 사변적 실재론 운동의 초기 동력을 되살려 키우려는 하먼의, 하먼에 의한, 하먼을 위한 입문서처럼 읽힐 수 있다.

하먼은 레이 브라지에의 프로메테우스주의,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의 관념론, 본인의 객체지향 존재론, 퀑탱 메이야수의 사변적 유물론을 차례로 소개하는 방식으로 책을 구성했다. 이 알파벳 순서는 2007년 런던대학교에서 열린 "사변적 실재론" 워크숍에서 이들이 발표한 순서를 따랐다. 하지만 이런 단순 중립성은 입문서의 목적에는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 중에서 가장 창의적이고 영향력이 컸던 철학자는 하먼이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메이야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서론을 읽은 후 거꾸로 메이야수-하먼-그랜트-브라지에의 순서로 독파하면 좋을 것 같다.

메이야수의 독창성은 그의 책 <유한성 이후>(2006)에서 "상관주의"(correlationism)라고 부른 오랜 철학적 난제를 극복할 방법을 제시한 데 있다, 그에 따르면, "칸트 이후 근대 철학의 중심 개념은 상관관계라는 개념인 것처럼 보인다…그 관념에 따르면 우리는 언제나 단지 사유와 존재 사이의 상관관계에만 접근할 수 있으며, 서로 별개로 고려되는 각각의 항에는 결코 접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 규정된 상관관계의 넘어설 수 없는 특질을 유지하는 모든 사조를 상관주의라고 일컬을 것이다"(346쪽). 즉, 어떤 세계가 마음의 외부에 현존하고 우리는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하는 이른바 "소박한 실재론"과, 정반대로 마음의 외부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고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다는 "사변적 관념론" 사이에 두 가지 상관주의가 가능하다고 메이야수는 본다. 하나는 칸트처럼 "물자체"(thing-in-itself)를 상정해 마음 외부의 사물을 사유할 수는 있지만 인식할 수는 없고,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모두 상관물이라고 보는 방법으로, "약한 상관주의"로 부를 수 있다. 이런 방식은 사유 외부의 물자체를 사유한다고 주장하는 "수행적 모순"을 범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기에, 메이야수는 이 문제를 "상관주의적 순환"(correlationist circle)이라 부르며, 이처럼 물자체의 사유 가능성을 부정하는 방식을 "강한 상관주의"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입장이 물자체의 실존 가능성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하먼은 메이야수가 강한 상관주의에 대한 "저돌적 반전"(362쪽)을 통해 상관주의적 순환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변적 유물론의 길로 가려는 과정을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먼의 설명은 탁월하고 이 부분이 책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한다. 바로 여기서 메이야수의 사변적 유물론과 본인의 객체지향 존재론이 갈리는 이유를 명확히 보이기 때문이다. 하먼은 메이야수가 전략적으로 동원한 선조성(ancestrality – 인간 사유 밖의 존재 가능성을 의미하는 인류 등장 이전의 지구 또는 우주 사유) 및 상관관계의 사실성(factiality – 관념론은 상관물의 우연성을 설명 못 함)을 논박하며, 관념론에서 벗어나는 일은 약한 상관관계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먼에 따르면, 약한 상관관계의 문제는 물자체를 인간의 경험에 한정했다는 데 있기에, 오히려 물자체가 다른 객체들과 연류되는 과정, 즉 객체와 객체 또는 객체와 주체가 만드는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어 사유 외부의 실재를 논할 수 있다.

하먼은 그랜트와 브라지에의 입장에 대해서도 예리하게 분석한다, 다만 그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다. 그랜트의 철학은 관념론에 머무르고 있고 브라지에는 허무주의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류세의 상황을 사변적 실재론이 설명할 수 있을까,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되 인간이 책임을 지고 사유하며 활동하는 것과 관련된 철학적 근거를 찾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이와 관련해선 메이야수의 선조성의 개념과 하먼의 객체의 독자적인 사유 가능성(생명체의 사유 방식과는 다른)이 흥미로웠다. 신유물론의 입장과는 다른 것으로 보였다. 좀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 하먼이 객체지향 존재론의 지적 동료라고 부른 이언 보고스트, 레비 R. 브라이언트, 티머시 모턴과 같은 이들에 대한 소개가 없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사변적 실재론 입문>(그레이엄 하먼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박범순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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