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와 시스템 두 축으로 가야 안정적 반도체 왕국”
[주간경향] K반도체가 위기에 빠졌지만, 새로운 희망이 움트는 곳도 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돌파구로 삼아야 할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주목받는 스타트업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인공지능(AI) 반도체(NPU라고도 불림)를 설계하는 리벨리온이 선두권에 있다. AI반도체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효율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초고속·저전력 반도체를 말한다. 현재 주로 사용하는 그래픽처리장치(GPU)와 비교해 기능은 좀더 제한적이지만, 인공지능 알고리즘에 있어서만큼은 더 빠르고 전력 소모도 적어 많은 기업이 앞다퉈 개발 중이다.
창업 2년 반을 맞은 리벨리온은 투자자들이 “천천히 하라”고 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2021년 11월 고빈도 금융거래에 특화된 NPU인 ‘아이온(ION)’을, 지난 2월에는 KT와 협업해 데이터센터용 AI반도체인 ‘아톰(ATOM)’을 시장에 내놓았다. 아톰은 지난 4월 6일(현지시간) 공개된 AI반도체 벤치마크 대회인 ‘엠엘퍼프(MLPerfTM)’에서 퀄컴의 AI반도체와 엔비디아 GPU를 1.5~2배 이상 압도하는 성능을 보여주면서 화제를 모았다. 전날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리벨리온 본사에서 만난 박성현 대표는 “시스템반도체를 키워야 메모리반도체도 성장할 수 있다”라면서 “한국이 양쪽 모두 안정적인 성장을 이룬다면 그야말로 반도체 대왕국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에게서 한국 반도체 도약을 위한 전략을 들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반도체 수출이 줄어 위기감이 큽니다.
“메모리가 조금 더 심하긴 하지만 시스템반도체를 포함해 반도체 산업은 ‘사이클 인더스트리’입니다. 반도체는 조단위의 투자가 이뤄지고, 그 기간도 1~2년이 넘습니다. 수요·공급을 맞추기가 쉽지 않죠. 반도체 사이클이 안 좋은 구간에 진입했지만, 이는 우리 메모리반도체의 본질과는 상관없습니다. 금방 좋은 사이클로 돌아설 수 있다고 봅니다.”
-시스템반도체가 중요한 이유는.
“엔비디아가 삼성의 메모리를 많이 쓰는데 새로 내놓는 보드에서 메모리 크기를 더 이상 안 키워줍니다. 메모리 사이즈를 키워봐야 삼성전자만 즐겁거든요. GPU에서 엔비디아가 다른 기업과 경쟁하고 있다면 모를까 독주하는 상황에서 키워봤자 자기네 상품만 팀킬을 하는 상황이 되죠. 그래서 지금 인공지능 반도체라는 물이 들어왔어도 메모리 사이즈를 잘 안 키워주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삼성전자가 메모리를 더 팔려고 해도 치고 나갈 만한 시스템반도체 회사가 있어줘야 합니다. 메모리반도체 경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도 시스템반도체가 필요합니다. 메모리 경기가 다운턴일 때 그 충격을 완화하는 역할도 하죠. 메모리와 시스템의 두 축으로 가면 좀더 안정적인, 그야말로 반도체 대왕국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시스템반도체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시스템반도체에서 스타트업의 역할은.
“시스템반도체는 파운드리 혹은 메모리와는 결이 살짝 다르죠. 메모리가 거대 자본과 거대 조직으로 움직인다면 시스템반도체 분야는 다 스타트업에서 출발했습니다. 엔비디아도, 인텔도 그랬죠. 자본이 이끈다기보다 맨파워가 중요합니다. 결국 빠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스타트업이 주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카이스트·MIT를 나와 미국 인텔·스페이스X에서 반도체를 설계했다면서요. 굳이 한국에서 창업한 이유는 뭔가요.
“미국이 시스템반도체 시장의 70%를 차지합니다. 미국이 압도하고 있지만 사실 저 위에서 미국이 떨어지고 있다면 한국과 대만은 상승하는 형국입니다. 미국의 시스템반도체가 저물고 있기 때문에 한국이 그 틈새를 노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젊고 야심 찬 인재들은 더 이상 반도체를 하지 않죠. 구글·메타와 같은 소프트웨어 회사로 가거나, 소프트웨어 창업을 하지 하드웨어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반도체 산업의 다음 대박은 대만과 한국에서 나올 거라고 하죠. 제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월가의 컨센서스예요.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창업한 건 열 번 생각해도 열 번 잘한 것 같습니다.”
-삼성전자 파운드리가 TSMC에 크게 밀리는 상황입니다.
“시스템반도체는 파운드리를 중심으로 팹리스와 디자인하우스, OSAT(패키징과 테스트를 전문으로 하는 반도체 후공정) 업체들의 생태계가 갖춰져야 합니다. 어떻든 그 절반인 파운드리 분야를 잘하고 있습니다. 유니콘에 오른 파두를 중심으로 팹리스 시스템도 발전 중입니다. TSMC를 따라잡아야 하는 숙명이 있지만 2등도 박수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만에는 TSMC 같은 파운드리는 물론, 팹리스 분야에서도 미디어텍 같은 굉장히 좋은 팀이 많죠. 그래도 미국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게 어디예요.”
-미국이 자국 내로 반도체 공급망을 가져오려고 하는 움직임은 어떻게 봅니까.
“효과가 없지 않을까요. 반도체는 그래봐야 제조업입니다. 제조업 부흥이 미국에서 일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쇠락을 늦출 순 있겠지만 굉장한 비용이 들겠죠.”
-시스템반도체를 키워야 한다는 말은 오래됐지만 잘 안 된 이유는.
“휴대전화가 한창 보급될 때 한국 팹리스가 1차로 떴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후 암흑기가 왔는데, 지금 다시 올라오고 있거든요. 여기서 죽으면 세 번째 기회는 안 올 것 같습니다. 과거 팹리스 업체들의 패착은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하청업체로 만족했죠. 그것만으로도 시총 1000억~2000억원은 가고, 자신은 수백억대 부자로 살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안주하다 퀄컴의 스냅드래곤 같은 큰 거 한방에 다 나가떨어진 거죠. 회사는 커야 합니다. 크지 않은 순간 나이가 들고 결국에는 망합니다. 우리 내수 시장이 애매하게 좋아서 글로벌로 나가지 않아도 살 수 있었지만 이젠 나가야 합니다. 이스라엘도 내수 시장이 없어 글로벌로 나가면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지금 나오는 우리 같은 팀들은 글로벌을 타깃으로 하는 팀이죠. 그러니 망해도 크게 망할 것이고, 성공해도 크게 성공할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면 앞의 선배들이랑은 좀 다른 그림이 펼쳐지지 않을까요. 리벨리온만 유일하게 삼성, SK 출신이 아니라 모건스탠리, IBM, 인텔, 애플 출신이 모여 창업했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제대로 된 T자형 회사가 우리나라에도 하나쯤은 있어야지요.”
-AI반도체 시장 전망은.
“챗GPT를 계기로 AI서비스가 대중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AI서비스는 곧 비용이라는 점입니다. 뒤에서 어마무시하게 전기를 쓰니까요. 따라서 고성능·저전력의 AI반도체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규모가 앞으로 커질 것 같습니다. 뼈아프지만 당장은 그걸 받아낼 곳이 엔비디아밖에 없죠. 하지만 결국 엔비디아도 시장을 서서히 잃어갈 거라고 봐요. 그 기회를 누가 받아낼 수 있을 거냐. 대만이냐, 한국이냐. 한국이면 리벨리온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톰이 비전모델과 함께 언어모델을 지원하는 의미는.
“챗GPT와 구글의 바드는 모두 트랜스포머 알고리즘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아톰은 이를 가속할 수 있는 칩이죠. 속도도 빠르면서 전기요금도 낮출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엔비디아가 GPU와 그곳에서 작동하는 소프트웨어를 함께 팔듯이 우리 역시 아직은 비견하기 어렵지만, AI칩을 보드 형태로 제공하면서 기존의 GPU 사용자들이 큰 불편 없이 옮겨올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도 함께 개발 중입니다. 데이터센터에서 돌아가는 AI트레이닝만큼은 우리가 GPU보다 더 잘할 수 있습니다. CPU의 부분집합이었던 GPU가 CPU보다 큰 시장이 됐듯이, GPU의 부분집합인 AI반도체 시장 역시 GPU보다 훨씬 커지리라고 예상합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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