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민주정은 자유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2023. 4. 8.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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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books] 조사이아 오버의 <자유주의 이전의 민주주의>

[최용락 기자(ama@pressian.com)]
역사에 기록된 민주주의의 최초 사례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다. 민주주의의 원어도 그리스어 '데모크라티아(Demokratia)'다. '인민'을 뜻하는 '데모스(demos)'와 '지배'를 뜻하는 '크라토스(kratos)'가 합쳐진 이 말의 뜻풀이에 '자유'가 들어갈 곳은 없어 보인다. 일의 순서로 봐도 자유주의 정치철학은 17세기 영국인 존 로크에게서 태동했다.

역사적 사정과 달리 어떤 이들은 자유민주주의만이 진짜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자유민주주의의 '자유'에 시장경제와 반공주의를 담아 이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배제하는 데 쓰는 정치적 용법은 차치한다고 해도 개인의 자율성과 권리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을 가장 바람직한 정치체제로 보는 논변은 그 자체로 강한 힘을 갖고 있다.

조사이아 오버 미 스탠퍼드대 정치학과 교수가 쓴 <자유주의 이전의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결합하지 않은 '원초적 민주정'이 이미 있었고 이론적으로 가능하며 고유한 장점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다만 이 책에 '원초적 민주정'이 자유주의적 민주정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은 없다. 분배 정의도 이 책의 본격적인 논의 주제는 아니다.

오버의 이야기는 고대 아테네에서 자유주의 없이도 '원초적 민주정'이 출현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한다. 오버는 아테네에서 민주정이 '시민에 의한 정당한 집단적 자기 통치'로 여섯 세대 동안 제대로 작동했고 당대 다른 국가의 전제정보다 나은 안전과 풍요를 시민들에게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아테네 민주정은 구성원 모두에게 구속력을 지닌 몇 가지 규칙을 통해 작동했다. 그 중 하나는 시민에게 민주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시민은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대표적인 활동은 추첨으로 뽑히는 민회 의원, 법정 배심원으로 일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다양한 시민의 의견이 통치에 반영됐고, 시민들은 자기 통치 능력을 기를 수 있었다.

다수의 폭정을 막기 위해 통치 활동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권력은 제약됐다. 민회에서 제정되는 법률은 더 까다로운 절차를 통해 만들어지는 헌정 질서의 제약을 받았다. 선출된 공직자의 임기는 1년이었고, 임기가 끝난 뒤에는 감사를 받았다. 널리 알려진 도편추방제는 1년에 한 번만 실시할 수 있었고, 최대 추방 기간은 10년이었다.

민주정적 토대가 갖춰지자 당대에는 이례적으로 25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가진 도시국가였던 아테네의 크기와 다양성은 공동체의 자산이 됐다. 구성원 간 이해를 조율해 일부가 아닌 공동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정치적 결정과 행동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아테네 민주정은 자유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통치에 참여할 수 있는 시민은 아테네 태생 남성이었다. 노예제가 있었고, 신에 대한 불경죄를 저지르면 사형까지 당할 수도 있었다. 특히 여성 참정권 부인, 노예제 등에 대해 오버는 민주정에 반영되는 다양성을 제약해 아테네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됐다고 주장한다.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이야기를 끝낸 뒤 오버는 '데모폴리스'라는 가상의 원초적 민주정을 건국하는 사고실험에 들어간다. 이를 통해 원초적 민주정에 필요한 규칙을 제시하고 그 효과를 살핀다. 동시에 원초적 민주정이 아테네와 같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만 가능한 체제가 아님을 보이려 시도한다.

오버는 절대적 지배자가 없는 '비폭정'이라는 핵심 목표에 동의하고 정교한 언어적 소통이 가능하지만, 경제적 수준이나 삶의 경험, 지식의 종류 등에서는 다양성을 지닌 사람들을 데모폴리스의 건국자로 설정한다. 이들의 또 다른 목표는 다른 모든 국가가 추구하는 안전과 물질적 풍요다. 이때 안전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은 물론 내부 갈등·전복으로부터의 위협도 포함한다.

건국자들이 만드는 첫 규칙은 비폭정 유지를 위한 일에는 모두가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숙의, 투표는 물론 배심원 등 임무 수행을 위해 인력을 제공하는 것, 부자의 경우 추가적인 세금을 내는 것 등도 포함된다.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 모든 구성원은 기본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어느 정도의 생활수준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규칙은 일부 구성원이 집단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구성원의 정치적 평등과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오버는 이를 위해 '시민적 존엄'이 확보돼야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 이때 시민적 존엄은 모욕이나 '어린애 취급(infantilization)'을 받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적 참여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거나 불가능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셋째 규칙은 안전, 풍요, 비폭정이라는 원초적 민주정의 목적을 위태롭게 하거나 앞선 두 규칙을 위반하는 규칙이 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버는 이 같은 규칙 하에 운영되는 원초적 민주정이 모든 구성원에게 사회성, 합리성, 언어적 의사소통이라는 인간 고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민주정 자체가 주는 좋음(goods)으로 규정한다. 직접 민주정 제도가 운영되는 주에서 행복감이 높다는 스위스의 경험적 연구결과를 제시하기도 한다.

오버는 비폭정뿐 아니라 안전과 풍요를 위해서도 합리성과 언어적 의사소통의 자유로운 발휘가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개인이 상대적 우위를 갖는 기술과 재능을 파악하기 쉽게 해 더 합리적으로 교육에 대한 투자와 효율적인 경제적 전문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결국 자유주의적 교의 없이도 민주정은 다수의 폭정으로 흐르지 않을 수 있으며, 자유주의자들의 관점과 달리 정치 참여는 최소화해야 하는 비용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간에게 가치있는 일이라고 오버는 주장한다. 책의 말미에 그는 '원초적 민주정'을 토대로 다른 사상체계와 결합한 민주정, 자유주의 이후의 민주정을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민주정에 단일한 정답은 없다는 관점인 셈이다.

▲ <자유주의 이전의 민주주의>(조사이아 오버 지음, 노경호 옮김) ⓒ후마니타스

[최용락 기자(ama@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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