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엔딩’ 끝이 아닌 시작 [ESC]

한겨레 2023. 4. 8.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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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식물학자S의 열두달 식물일기]식물학자S의 열두달 식물일기
벚꽃잎 흩날리며 떨어져
나무 자양분 되는 게 소임
꽃잎 지고 상처난 자리엔 새살
미국 메릴랜드주 스미소니언 환경연구센터에 있는 벚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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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디시(DC)에서 열리는 벚꽃축제에 갈 거예요?” 올해 3월 초부터 현지 미국인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다. 실험실 동료들이 관광객이 너무 많다며 만류했지만 들뜬 분위기에 나도 주말에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3월 말, 축제가 시작되고 주말이 다가오자 갑자기 금요일(3월24일) 저녁부터 세차게 비가 내렸다. 주말까지 이어진 비에 결국 나는 연구소 숙소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벚꽃축제에 찾아간 많은 관광객이 빗물에 떨어진 꽃잎을 보면 섭섭하겠구나 싶었다. 사람들은 대개 꽃이 사라지면 아쉬워한다. 게다가 떨어지는 꽃잎을 보면 조금 서글픈 감정을 느끼니 말이다.

주말 내내 숙소에 있다가 월요일에 출근하니 거짓말처럼 화창한 봄볕이 창문으로 새어 들어왔다. 날씨는 좋고, 끝내야 할 일이 있는데 하기 싫은 마음도 커서 나는 무작정 연구소 밖으로 나갔다. 내가 있는 연구소는 숲과 강, 작은 섬과 1800년대 유적지를 가진 광활한 곳이다. 옛 농장 부지였던 언덕엔 배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나무까지만 잠시 산책을 다녀오기로 했다. 나무 가까이 가보니 하얀 배꽃은 반 이상 진 상태였다. 벚꽃이 한창인 시기이니 벚꽃보다 이른 시기에 피는 배꽃이 진 건 당연했다. 섭섭한 마음으로 연구소로 돌아가려고 뒤돌아섰을 때 언덕 반대쪽 오래된 헛간 옆에 거대한 벚나무를 발견했다. 헛간보다 거대한, 나이 많은 벚나무는 찬란하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흔히 능수벚나무, 혹은 수양벚나무라고 불리는 가지가 늘어진 종류였다. 늘어진 가지는 큰 폭포 같은 자태로 수많은 꽃을 쏟아내고 있었다. 가끔 강한 바람에 휘날리며 꽃잎이 떨어질 때면 폭포에서 떨어지는 연분홍 물방울처럼 보였다.

상처 아물게 하는 큐티클

아래로 늘어진 가지 덕분에 나는 벚꽃을 하나하나 잘 관찰할 수 있었다. 흔히 꽃잎이 지면 꽃이 졌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꽃이 사라진 건 아니다. 꽃은 꽃잎 외에도 꽃받침, 암술, 수술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꽃잎이 떨어져 나간 벚꽃을 살펴보니 꽃잎 외에 모든 부분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수술과 꽃받침도 시들어 사라지겠지만 암술은 남는다. 암술 아래쪽 씨방엔 밑씨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씨방은 자라 버찌가 되어 새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밑씨는 자라 씨앗이 되어 벚나무의 자손이 된다.

바람, 빗방울, 작은 곤충의 날갯짓에도 벚꽃잎은 쉽게 떨어지지만, 꽃봉오리가 막 피어 꽃이 한창일 때는 비바람이 칠 때도 꽃잎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제 소임을 다하고 나면 누구도 꽃잎이 떨어지는 걸 막을 수 없다. 벚꽃처럼 한 장 한 장 휘날리든, 무궁화처럼 꽃잎을 단정히 말아 내려놓든, 동백꽃처럼 아직 싱싱한 꽃을 통째로 떨어뜨리든 꽃은 때가 되면 미련 없이 꽃잎을 버린다. 시든 꽃잎이 제때, 제대로 떨어지지 않으면 남아 있는 나머지 꽃 부분에 해를 줄 수도 있다. 꽃잎이 남아 시들고 썩으면 밑씨까지 병들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떨어지는 것도, 땅으로 흡수되어 나무의 새로운 양분이 되는 것도 꽃잎의 소임이다.

꽃잎이 떨어지면 붙어 있던 자리엔 상처가 남는다. 상처 난 자리로 곰팡이나 세균이 들어가 곪을 수 있어 식물은 상처를 회복하려 한다. 이전에는 과학계에서 식물이 리그닌이라는 물질로 꽃잎이 떨어져나간 표면을 덮어 상처를 아물게 하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리그닌은 식물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접착제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떨어지는 꽃잎을 연구한 한국 과학자들의 발견으로 꽃잎이 떨어진 자리가 아닌, 떨어지는 꽃잎에 리그닌이 생긴다는 걸 알게 되었다. 꽃잎의 잘린 면을 따라 리그닌이 생긴다. 리그닌은 분리될 면의 세포 사이사이를 메워 면을 매끈하게 한다. 그래서 꽃잎이 그 면을 따라 매끈하고 정확하게 잘리게 되는 것이다. 꽃잎이 떨어져 상처 난 자리엔 새살이 돋고 큐티클이 생긴다. 큐티클은 일반적으로 식물의 표면에 있는 물질로 큐티클이 덮여 상처 난 자리가 아물게 한다.

내려놓는 것도 아름다운 이유

나는 떨어지는 꽃잎을 보면 현미경으로 보아야 알 수 있는 걸 눈으로 보는 듯한 착각이 든다. 떨어진 꽃잎의 잘린 표면에 리그닌이 세포 사이사이에 있는 듯 상상하는 것이다. 한번은 전시를 위해 떨어진 벚꽃잎을 잔뜩 모은 적이 있다. 봉투 가득한 분홍 꽃잎들을 보며 나무에 달린 싱싱한 꽃잎들과 다르게 리그닌 함량이 높을 것이라며 혼자 즐거워했다. 그리고 벚꽃잎이 쏟아져 내린 나무를 쳐다보면 이런 생각도 한다. 화려한 꽃잎들이 떨어져 꽃이 모두 사라진 듯 보이지만 나무엔 어린 열매들이 남겨져 있다고. 또한 꽃잎이 떨어져 상처 난 자리마다 열심히 치료 중이며, 땅에 떨어진 꽃잎은 흙에 사는 다른 생물들의 먹이가 되고 결국 나무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사실 꽃잎이 떨어지는 과정을 하나하나 생각하면 식물이 정확히 계산한 움직임 중에 신기하지 않은 과정이 없다. 또한 모든 과정이 순서대로 잘 수행되어야 한다. 버리는 것, 사라지는 것도 말이다. 내려놓는 것도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처럼. 모든 것이 아래로 떨어지는 건 당연한 듯 보이지만 어느 과학자는 호기심을 가져 중력을 발견했다. 이렇듯 자연의 모든 일은 사실 대단히 신비하고 필연적이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떨어진 벚꽃잎이 흙색으로 변해 발에 밟히는 시간도, 벚꽃이 지고 푸른 잎이 무성해 사람들이 벚나무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대부분의 날들도 말이다. 나는 연구소 벚나무의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며 벚꽃축제에서 꽃잎이 떨어져 아쉬워하는 이들과 이런 수다를 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글·사진 신혜우 식물분류학자

미국 스미소니언에서 식물을 연구하고 있다. <식물학자의 노트>, <이웃집 식물상담소>를 쓰고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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