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남수의 視線] 힘으로만 평화가 오나

천남수 2023. 4. 8.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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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만난 북한 김여정 부부장의 천진난만한 표정이 5년이 지난 지금과 대비된다. 사진은 남북 정상회담 후 청와대가 공개한 것이다. (연합뉴스)

2018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는 온통 평화의 열풍에 휩싸였다. 북한은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에 상징적 국가원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을 축하사절로 보냈다. 선수단과 함께 북한 공연단도 방문해 합동공연을 펼치면서 한반도는 평화를 향한 대장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4월 27일 마침내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났다. 특히 남북 정상들은 분단의 상징인 남북 분계선에서 만나 악수하고, 함께 남북을 오고 간 극적인 장면은 한민족은 물론 전 세계인의 가슴을 울린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한반도 평화 기운은 그해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졌고, 9월 평양에서 남북 정상은 다시 재회했다. 남북 정상들은 함께 백두산 천지에 올랐고, 문재인 대통령은 평양 5·1경기장을 가득 메운 15만 명의 북한주민에게 연설한 것이 그 절정이었다. 그러나 다음 해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두 번째로 열린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한반도의 미래에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숨죽여 평화를 염원했던 우리 국민들은 양 정상이 어떠한 합의도 없이 돌아서는 모습을 안타깝게 아니, 아프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쉬움 속에서도 곧 풀릴 것이라는 기대도 감추지 않았다. 양국 정상이 두 차례나 만났는데,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부질없는 일이었다.

한·미 간 대북 정책에 대한 의견조율이 전혀 되지 않았고, 한국이 추진하려는 민간 교류 등 기본적인 교류조차도 미국은 제동을 걸었다. 속절없이 시간만 흘렀다. 그러는 사이 미국은 공화당 트럼프 정부에서 민주당 바이든 정부로 바뀌었다. 미국 민주당 정부의 대북 정책 변화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바이든 정부는 이렇다할 대북 메시지를 내놓지 않았다.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 정책이 이어졌다. 봉쇄하고 있으면, 북한이 저절로 비핵화에 나설 것이라는 정책 기조를 이은 것이다.

▲ 지난 2020년 6월, 2018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당시 평화의 불을 밝혔던 성화대 주변 상공으로 먹구름이 밀려들고 있다. 평창은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개회식에 참석하는 등 한반도 평화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연합뉴스)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지구촌을 덮쳤다. 한반도 평화에 먹구름이 낀 상황에서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문을 걸어 잠갔다. 북한과의 대화는 끊겼고, 북한의 비난 강도가 점점 높아지는 상황에서 코로나의 습격은 그야말로 업친데 덮친 격이었다. 세계는 각자도생의 길을 갔고, 교류도 완전히 차단됐다. 북한도 세계와의 모든 교류를 단절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교류는 불가능했다. 대화도, 교류도 단절된 상황에서 서로를 향한 비난의 강도는 높아만 갔다. 그 와중에 문재인 정부에서 윤석열 정부로 바뀌었다. 남북관계의 근본적 변화가 예고됐다.

보수정권이 출범하고 2023년을 맞았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 안보라인은 대부분 미국 중심, 일본 중심의 한미일 동맹외교를 중시하는 이들로 짜여졌다. 한미일 동맹이 강화됐다. 한반도 긴장이 우려되어 소극적으로 진행되던 한미 군사훈련이 본격화 됐다. 북한도 연일 미사일을 쏘아대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한미 당국은 북한의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했다. 자연히 북한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보다는 한미일 관계가 우선됐다. 대북 정책은 대화보다는 대북 압박으로 나타났다.

미국과 중국과의 패권경쟁이 본격화됐다. 초강대국인 미국과 신흥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과의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반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에는 긴장감이 더욱 고조됐다. 북한은 러시아, 중국과 더욱 밀착됐고, 한국은 미국, 일본과 연대를 강화했다. 미국으로서는 중국을 겨냥한 동아시아 포위전략에 한국을 참여시키는 데 성공한 셈이다. 한국으로서는 중국과의 관계가 숙제로 남았다. 중국은 우리의 가장 큰 교역 상대국이라는 점에서 중국과의 관계 악화는 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한미일 동맹 강화는 상대적으로 북중러 관계를 더욱 결속시키고, 이는 한반도가 지정학적으로 매우 불확실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북이 함께 강대국의 패권 전쟁에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한쪽에 확실하게 서지 않고는 냉혹한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한반도가 강대국 전쟁터가 되어서야 하겠는가. 우리 땅에서 다시는 대리전쟁의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힘에 의한 평화’는 공허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월 10일 해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제77기 졸업 및 임관식에 참석해 ‘힘에 의한 평화 ’를 강조했다. (대통령실 통신사진기자단·연합뉴스)

사실 힘에 의한 평화는 본질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상대를 힘으로 제압한다는 것은 상대로 하여금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가 아니다. 서로 인정하고, 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전제돼야 평화의 길이 열린다. 평화를 힘으로 얻겠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평화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물론 위협하고 도발하는 상대를 그저 받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힘으로만 제압해 평화를 이루겠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위기를 맞은 것은 북한도 마찬가지다. 어쩌자고 고립을 자초했는가. 그래서 남은 게 무엇인가. 그동안 북·미 관계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려고 했던 문재인 정부에게 등을 돌리고 무엇을 얻었는가. 돌이켜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는 윤석열 정부와의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한다. 미국과 일본 등 3각 동맹이 구축되면서 북한의 처지도 어렵게 됐다. 북한이 강경하게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북한도 대남, 대미 노선에 대한 전면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민간 교류를 포함해 한국 정부에게 적극적인 대화를 제의해야 한다. 미국과의 대화 채널도 가동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북한도 살고, 한반도 평화도 지킬 수 있다. 남북한 모두에게 공동번영의 길도 열릴 것이다. 윤석열 정부 역시 보다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따르기보다는 대한민국 미래를 위한 주체적인 결단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 미국 등 주변국과의 연대와 협력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한반도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또한 비핵화가 북미수교의 전제조건이지만, 미국도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선제적으로 북미 수교를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5년 전 4월은 남북의 정상들이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만났던 역사가 있다. 2023년 4월은 한반도 평화에 새로운 전기가 돼야 한다. 마침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도 예정되어 있다. 올해는 정전협정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더 이상 수많은 젊은이를 죽음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기성세대의 이념적 잣대로 인해 70년 전의 비극이 재연된다면, 이는 죄악이다. 남북 관계를 이념적 잣대로 들이대는 무모한 짓은 이제 그만둬야 하는 이유다. 평화는 대화와 양보 그리고 인간에 대한 믿음이 전제돼야 한다. 힘으로만 평화는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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