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롭힘이 남긴 상처, ‘두개골’ 안에 있었다[책과 삶]

이영경 기자 2023. 4. 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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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한 폭언·폭력 시달린 아이들
‘문동은처럼’ 복수에 걸기보다
자살 등 자기파괴적인 행동 보여
괴롭힘·학대 치유 전문가인 저자
마음-몸-뇌 연결성 강조하며
“적절한 훈련으로 뇌 건강 복구”
<더 글로리>의 한 장면. 학교폭력 피해자의 철저한 복수극을 그렸다. 넷플릭스 제공

괴롭힘은 어떻게 뇌를 망가뜨리는가

제니퍼 프레이저 지음·정지호 옮김|최연호 감수|심심|512쪽|2만6000원

넷플릭스 <더 글로리>는 학교 폭력과 복수에 관한 영화다. 주인공 문동은은 끔찍한 괴롭힘과 가혹한 폭력에 시달린다. 가해자 박연진은 부모의 재력과 권력 덕에 제재받지 않는다. 익숙한 서사다. 문동은은 사적 복수를 택한다. “사과받자고 10대도, 20대도, 30대도 다 걸었을까?” 문동은은 자신의 인생을 ‘복수’에 걸었다. “우연은 단 한 줄도 없는” 치밀한 계획 속에 복수에 성공한다. 권선징악, 인과응보다. 이는 픽션이다. 현실에서 괴롭힘과 학대를 당한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신체적 상처뿐 아니라 뇌에 깊숙한 상처를 입는다. 가해자에게 복수를 하기보다는 자기혐오에 시달리며, 중독·자해·자살 등 자기파괴적 행동을 보인다. 가해자 박연진은 동정이나 공감의 여지 없는 ‘순수한 악인’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순수한 악인’으로 태어나는 이는 드물다. 학대나 폭력의 가해자는 어린 시절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

<더 글로리>의 통쾌한 사적 복수극은 열광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만큼 가해자가 처벌받고 피해자가 회복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방증으로 들린다. <괴롭힘은 어떻게 뇌를 망가뜨리는가>는 <더 글로리>의 사적 복수극에 열광하는 시대에 알맞게 찾아온 책이다. ‘사적 복수의 판타지’ 대신 괴롭힘이 어떻게 피해자의 뇌를 조용히 손상시키는지, 어떻게 개인의 성취를 막고 가장 나쁜 경우 자살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는지 신경과학적 관점에서 논한다. 고통받고 있는 아이들이 고통의 둑 안에서 서서히 질식하지 않도록, 둑을 허물고 새로운 길을 내는 법을 알려준다. “지금 한국사회에 절실한 책이다.”(정희진 이화여대 초빙교수)

저자 제니퍼 프레이저는 캐나다의 교사이자 작가, 괴롭힘 및 학대 치유 전문가다. 그의 첫째 아들 몽고메리는 2년간 학교 농구팀 코치로부터 폭언과 괴롭힘 등 학대를 당했다. 저자가 이를 알게 된 것은 몽고메리의 입안에 궤양과 같은 심각한 염증이 생겨 먹거나 마시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다. 의사는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솔 때문에 일어난 염증반응이라고 진단했다. 프레이저는 첫째 아들의 입안뿐 아니라 뇌에도 지난 2년간 곪은 상처로 손상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했다. 둘째 아들 앵거스는 희귀한 유전병을 갖고 있었다. 시각적 정보를 보유하는 뇌 용량이 1%에 불과했으며 다양한 유전질환으로 신체적 고통을 받았다. 교사는 앵거스에게 “한심하다” “노력을 안 한다”고 말했다. 프레이저의 제자였던 엘런은 총명하고 성적이 우수한 아이였지만, 교장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살하기에 이른다. 프레이저 자신도 학창 시절 교사로부터 그루밍 성범죄를 당했다.

<괴롭힘은 어떻게 뇌를 망가뜨리는가>의 저자 제니퍼 프레이저. 심심 제공

프레이저가 괴롭힘 및 학대 치유 전문가가 된 것은 필연적이다. 그는 코치의 학대가 남긴 몽고메리 입안의 염증보다 뇌 속에 남긴 상처에 집중했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처음엔 비관적이고, 나중엔 낙관적이다.

“괴롭힘은 조용히 뇌 손상을 야기한다. 신경학적 발달 과정을 방해하고, 뇌의 회로망을 꺼서 학습 속도와 개인의 성취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괴롭힘을 당하면 불안이나 우울 장애를 겪고 심지어는 자살에 이를 위험이 있다.” 암울하다. 하지만 낙관적인 부분이 이 책의 핵심이다. 그는 뇌의 가소성에 집중한다. 뇌는 망가진 채로 머물지 않고 훈련과 연습을 통해 회복할 수 있다. 앵거스는 신경과학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4년 후 검사에서 시각정보 처리능력이 정상 수준으로 돌아왔다. 앵거스는 물었다. “왜 그동안 아무것도 배울 수 없는 학교에 저를 보내셨어요?”

프레이저는 어른이 아이에게 가하는 학대와 괴롭힘에 집중한다.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이나 괴롭힘은 제지 대상이 되지만, 교사나 어른이 가하는 괴롭힘이나 학대는 교육·훈육이란 이름으로 정당화되곤 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만 연구해선 사회의 괴롭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는 학교와 직장 등 사회에 만연한 학대와 괴롭힘을 ‘괴롭힘의 패러다임’이라고 명명한다.

세계적인 신경과학자 마이클 메르체니치 박사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메르체니치는 뇌가소성연구소 창립자이자 2016년 신경과학 분야 최고 연구자에게 수상하는 카블리상을 받했다. 메르체니치는 너무 많은 아이가 “여섯 살에 이미 뇌에 상처를 입는다”며 “이런 아이들은 뇌를 별로 쓰지 않거나 스트레스나 공포에 뇌를 강탈당한다”고 말한다. 좋아하는 것에 몰두해 전문가가 되는 대신 “정서적으로 스스로를 지키는 전문가”가 되며, 학교생활과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는다고 말한다.

영화 <위플래시>의 한 장면. 극중 재즈밴드 교사 플레처는 드럼 연주자 앤드루에게 폭언과 학대를 일삼는다.
어린시절 괴롭힘 “뇌세포 자라지 못하고 사멸”
학대 피해자는 가해자가 돼 ‘폭력의 악순환 고리’
우울증·불안·자해···외부로는 범죄·공격적 행동

영화 <위플래시>는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자전적 영화다. 뉴욕의 명문 음악학교 재즈 밴드에 들어간 주인공은 교사로부터 폭언을 당하며 손에 피가 날 정도로 연습을 한다. 교사는 “네 한계를 보여봐”라며 가혹하게 밀어붙인다. 다시 말해, 학대를 한다. <위플래시>는 음악을 하는 기쁨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공포와 고통에 관한 영화다. 셔젤 역시 재즈 드러머를 꿈꿨지만, 교사의 학대 속에 음악의 꿈을 접고 영화로 진로를 변경한다.

셔젤은 “틀리게 연주한 사람을 색출하고, 밴드 대원이 보는 앞에서 그를 지목해 수시간 동안 연주를 반복하게 했다”고 회상한다.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청소년 시기에 교사에게 색출당해 다른 학생들 앞에서 모욕을 받으면 뇌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셔젤은 괴롭힘 패러다임에 잠식되지 않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탈출해 회복했다. 영화 <위플래시>에 이어 <라라랜드>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며 성공한다. 하지만 셔젤 역시 불안과 우울에 시달렸다.

연구 결과 학대 행위가 불러온 만성 스트레스가 뇌 구조에 가하는 손상은 막대하다. “경미한 스트레스가 만성이 되면 코르티솔이 걷잡을 수 없이 분비되면서, 시냅스 연결이 끊기고 가지돌기가 위축되면서 세포가 사멸하는 유전 활동이 촉발된다. 해마가 물리적으로 건포도처럼 쭈그러든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이렇다. “뇌 속의 기억 중추가 쭈그러들고 뇌세포가 자라지 못하고 사멸하고 만다.” 연구결과 도구로 때리는 것은 물론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때리는 것만으로도 아이의 아이큐가 내려가고 성장 발달에 지장을 준다고 한다.

문제는 피해자가 성장해 가해자가 되어 ‘폭력의 악순환 고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상처받은 뇌는 마음속 가해자를 만드는데, 이를 통해 악순환이 시작된다. 마음속 가해자는 우울증·불안·섭식장애·자해·약물남용·자살충동, 최악의 경우 자살의 형태로 자기 자신의 내면을 괴롭힌다. 외적으로는 범죄행위·타인 학대·공격적 행동·싸움 등으로 타인을 공격한다. 자신의 내면을 괴롭히는 피해자에게 ‘나약하다’ ‘예민하다’는 꼬리표가 붙는다면, 남을 괴롭히는 사람을 향해선 ‘괴물’이라고 비난한다. 저자는 캘리포니아 교도소의 경우 수감자 70%가 위탁 가정에서 자랐으며, 한때 학대 피해자였다며 “교도소는 상처받은 뇌로 가득하다”고 말한다.

영화 <더 웨일>은 272kg의 거구로 집안에만 틀어박혀 살아가는 대학 강사 찰리(브렌든 프레이저)의 일주일을 그린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괴롭힘은 수명을 단축한다···섭식장애·마약·중독
중년기 암·심장질환·당뇨 가능성 높아져
유산소 운동과 마음챙김이 회복에 도움

괴롭힘은 신체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 문자 그대로 “수명을 단축한다”. 미국 내과 전문의 펠리티와 앤더가 아동기 학대와 암 같은 중년기 만성 질환의 연관성에 대해 실시한 연구 결과는 충격적이다. 아동기에 괴롭힘과 학대를 당하면 중년기에 암과 심장 질환, 당뇨, 관절염, 자가면역 이상이 생길 가능성도 높아졌다. 특히 비만 환자의 경우, 성적 학대를 당한 경우가 많았다. “어릴 때 자주 무시와 모욕을 당하거나 협박을 받거나 체벌 또는 구타를 당한 경우, 성폭력을 당한 경우, 이들이 중년이 되었을 때 눈에 보이는 상해나 상처는 없었다. 상처는 두개골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섭식 장애를 보이고, 자해에 의존하며, 우울증과 불안을 겪고 알코올과 마약으로 자체 처방을 하며,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추구하고 폭력 세계에 뛰어들며,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끔찍하다.

하지만 이를 뒤집으면 희망이 보인다. 학대를 근절하면 다양한 정신적·신체적 질병을 줄일 수 있다. 앤더는 “미국에서 아동 학대를 근절하면 우울증 발생 비율이 절반 이하로, 알코올의존증은 3분의 2로, 자살과 마약, 가정 폭력은 4분의 3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추정했다.

인간의 뇌는 계속해서 변화한다. 앵거스는 손상된 시각정보 처리능력을 훈련을 통해 회복했다. “망가진 뇌는 회복 가능하다.” 메르체니치는 뇌에 생긴 다양한 트라우마에 대해 연구한 결과 적절한 훈련을 통해 손상된 뇌를 건강하게 복구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메르체니치가 카블리상을 수상한 것은 망가져 가는 뇌에 관한 연구 때문이 아니라 뇌의 건강을 되찾는 방법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마음-몸-뇌가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뇌는 자율 신경계와 호르몬 조절에서 핵심 역할을 하며 면역반응의 강도와 조절에 영향을 미친다. “뇌가 몸의 건강을 지배”한다. 메르체니치는 ‘더 강한 뇌’라는 아동용 훈련 프로그램을 마련해 트라우마 상처를 갖고 잇는 아이들의 건강 회복을 지원하고 있다.

손상된 뇌 기능을 회복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마음 챙김 훈련과 유산소 운동이다. 마음 챙김 훈련은 스트레스 반응과 정반대 반응인 부교감신경계를 깨워 도파민과 세로토닌을 분비한다. 평정심을 되찾게 하며 회복탄력성을 개발하도록 도와줘 창의력과 집중력을 향상한다고 말한다. 신체 활동으로 심박수가 높아지면, 특별한 자극이 가해져 뇌가 학습·사고·기억·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더 글로리>의 문동은은 복수를 위해 인생 전체를 희생한다. 개인적 행복이나 성취는 복수의 내용을 구성하지 않는다. 어쩌면 <더 글로리>는 괴롭힘과 학대가 남긴 트라우마가 일생에 걸쳐 지속된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지도 모른다. 프레이저의 책은 개인적 상처의 회복을 도울 뿐 아니라 사회의 ‘괴롭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교육 현장에서 영어·수학보다 더 절실한 지식이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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