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주카포 쏘듯" 엔화 풀었던 구로다, 뭘 남기고 떠나나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8일 일본 역대 최장 기록인 10년 임기를 마치고 일본은행을 떠난다. 구로다 총리는 2013년 극심한 불황에 빠진 일본 경제의 구원투수로 등판해 임기 내내 과감한 돈 풀기로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본질적인 문제 해결엔 이르지 못했다는 게 지배적인 평가다.
구로다 총재의 퇴임으로 대담한 부양책의 시대가 끝나간다는 전망이 커지는 가운데 그의 후임인 우에다 가즈오 신임 총재는 경제와 금융시장에 큰 충격을 주지 않고 출구를 찾아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게 됐다.
구로다 총재는 취임 후 첫 회의에서 '구로다 바주카포'라고 불린 대규모 국채 매입 정책을 시작으로 마이너스 금리, 상장지수펀드(ETF) 매입, 수익률곡선통제(YCC) 도입 같은 특단의 대책을 잇달아 내놨다. 세계에서 가장 대담한 그의 통화 실험에 '충격과 공포' 처방이라는 수식이 따라붙었다. 그가 10년 동안 채권, ETF, 사채 매입 등을 통해 푼 돈은 1000조5500억엔에 달한다고 블룸버그는 집계했다.
시장도 반응했다. 니혼게이자이에 따르면 구로다 총재 취임 전 달러당 76엔 수준이던 엔·달러 환율은 1년 만인 2013년 말 105엔대로 급등했다. 현재는 달러당 130엔대 초반을 가리키고 있다. 엔화가 달러를 상대로 그만큼 가치가 떨어졌다는 의미다.
일본 기업 주가도 올랐다. 구로다 총재 취임 당시 1만2000대였던 닛케이225지수는 앞서 한때 3만선을 돌파했다. 최근엔 2만7000대를 가리키고 있다. 시중에 풀린 돈은 부동산 시장으로도 흘러들어 집값을 끌어올렸다.
경제적 효과도 제한적이었다. 이익을 늘린 기업들이 고용을 늘리고 임금을 인상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길 기대했지만 물가 변동을 고려한 실질임금은 마이너스를 걷고 있다.(최근 11개월 연속) 일본의 잠재 성장률은 구로다 총재 취임 전 0.9%에서 0.27%까지 떨어졌다.
옥스포드이코노미스의 시게토 나가이 이코노미스트는 "구로다 총재의 업적은 통화정책만으로는 2% 인플레이션을 달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라면서 "이 과정에서 통화기능이 핵심 기능을 미치는 금융시장의 기능이 손상되는 부작용이 초래됐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부작용을 당장 고치기 어렵다는 점이다. 너무 오랜 시간 대규모로 자산을 매입, 시장을 왜곡하다 보니 통화 정상화를 위해 조금만 변화를 줘도 시장에 큰 충격파를 던질 수 있어서다. 일본은행이 대량 보유해 증시를 받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ETF도 시에 큰 파장 없이 매각하려면 최대 100년이 걸릴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블룸버그는 구로다 총재의 성공을 결정짓는 과제는 후임자인 우에다 신임 총재에 달려있다고 짚었다. 인플레이션을 2% 수준으로 지속시키고 질서 있게 출구를 찾는다면 구로다 총재의 임기 역시 성공으로 평가되겠지만, 일본이 다시 디플레이션 수렁에 빠지거나 출구 전략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금융시장이 혼란에 휩싸인다면 구로다 총재의 명성도 함께 침몰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일각선 일본이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수정할 경우 최근 미국서 벌어진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과 유사한 금융 불안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우에다 신임 총재는 큰 부담을 안고 임기를 시작하게 됐다. 그는 최근 2% 물가 목표 달성을 위해 통화정책 변화가 시급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혀왔지만 결국엔 통화정책 정상화로 방향을 틀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블룸버그의 최근 조사에서 대부분의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은행의 YCC 정책이 6월 안에 수정될 것으로 내다봤다.
윤세미 기자 spring3@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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