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밍밍한 설렁탕에 골탕먹은 백암 박은식
이승만에 이어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백암 박은식(1859~1925)은 황해도 황주 출신이다. 1898년 황성신문이 창간되자 위암 장지연과 함께 필봉을 휘두르며 논설을 썼다. 황성신문 창간을 주도한 석농 유근(石儂 柳瑾, 1861~1921)은 ‘키가 후리후리하고 얼굴이 얼금얼금’한데다 ‘말소리가 덜덜하며 행동이 설설’했다. 말투가 좀 거칠고 행동이 과감한 호인 스타일이었던 모양이다. 백암과는 일찍부터 가까운 사이였다.
황성신문 시절, 장난기 많은 석농이 주변 사람들과 작당을 했다. 당시 늘 점심으로 2전5리짜리 설렁탕을 먹었다. 황해도 출신인 백암은 서울 음식인 설렁탕에 익숙치 않았다. 백암을 곯려주기 위해 소금과 양념 넣는 걸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싱거운 설렁탕을 며칠 계속 먹은 백암은 일행들이 또 설렁탕을 시키려고 하자 “에이, 나는 설렁탕 싫어”라고 했다. 석농이 “왜 그래”하고 물으니 “어이-싱거워, 나는 싫어”하였다. 좌중은 박장대소했다. 자초지종을 알게된 백암은 석농을 툭 치며 “이놈아, 사람을 그렇게 속여, 모두가 네짓이지? 어른을 모르고.”하고 항의했다.
조선어연구회 창립 회원이자 ‘한글맞춤법통일안’ 원안을 만든 국어학자 겸 역사학자 애류 권덕규(1890~1950)가 기고한 회고 ‘석농선생과 역사언어’2(조선일보 1932년3월27일)에 나오는 내용이다.
◇ ‘경성의 특산물’ 설렁탕
요즘은 설렁탕집이 없는 동네가 없지만, 설렁탕은 서울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이다. 신문에 이런 글이 실렸다. ‘설렁탕은 고대부터 경성의 명물인 동시에 외국은 고사하고 우리 조선에서도 어떤 지방에던지 볼 수 없는 경성의 특산물’이며 ‘다른 식에 비하면 가액의 저렴한 것으로든지 자양물(滋養物)의 풍부한 것으로든지 우리 돈 없는 사람에게는 유일무이한 진품(珍品)으로 이름이 높다’(‘설렁탕 개량의 要’, 조선일보 1926년 4월21일)고 했다.
역사학자 호암 문일평(1888~1939)도 설렁탕 예찬론자였다. ‘평민음식으로 이처럼 미미(美味)가잇고 자양분(滋養分)이 많은 좋은 음식이 또 어디 있겠는가.엄동설한에 보이한 설렁탕 육즙(肉汁)을 오전(五錢)이면 너끈히 사먹을 수 있으니 이것이 양식(洋食) ‘수푸’에 비(比)하야 자양(滋養)은 훨씬 앞서고 그 가격(價格)이 아주 저렴(低廉)한것이 아닌가.’(‘소하만필 19-조선인과 음식물’, 조선일보 1936년8월27일)
월간지 ‘별건곤’(1929년12월호)도 ‘설넝탕을 일반 하층계급에서 많이 먹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제 아무리 점잔을 빼는 친구라도 조선 사람으로서는 서울에 사는 이상 설넝탕의 설녕설녕한 맛을 괄세하지 못한다’고 했다. 1920년대 설렁탕은 10전~15전으로 한끼를 해결할 수 있는 인기메뉴였다. ‘돈 없는 사람’ ‘서민’의 훌륭한 만찬이기도 했다.
◇ ‘파양념과 고추가루를 듭신 많이 쳐서 훌훌 먹는 맛이란…’
설렁탕을 파는 식당이 언제부터 거리에 등장했는지는 정확치않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1900년 이전부터 종로 뒷골목에 설렁탕집이 여럿 있었을 것’일라고 추정한다. 앞의 황성신문 기자들이 점심으로 설렁탕을 자주 시켜먹었던 걸 보면, 1900년 무렵이면 설렁탕집이 상당히 유행했던 것같다.
‘말만 들어도 위선 구수-한 냄새가 코로 물신물신 들어오고 터분한 속이 확 풀리는 것같다...파·양념과 고추가루를 듭신 많이 쳐서 소곰으로 간을 맞추어가지고 훌훌 국물을 마셔가며 먹는 맛이란 도모지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가 없으며 무엇에다 비할 수가 없다.’
월간지 ‘별건곤’(1929년 12월호)에 ‘괄세못할 경성 설넝탕’을 쓴 우이생(牛耳生)은 ‘이만하면 서울의 명물이 될 수가 있으며 따라서 조선의 명물이 될 수가 있다’고 썼다.
◇하루 두끼, 설렁탕으로 때우는 신식가정도
설렁탕은 당시 대표적인 배달음식이기도 했다. 점잖은 양반체면에 허름한 탁자에 마주 앉아 후루룩 국물을 들이키는 장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스타일 중시하는 모던 보이, 모던 걸들도 볼품없는 식당보다는 집으로 배달시켜 먹는 집이 많았다.
‘신가정을 이루는 사람은 하루에 설넝탕 두 그릇을 먹는다고 합니다.왜 그러냐 하면 청춘부부가 새로 만나서 달콤한 꿈을 꾸고 돈푼이나 넉넉할 적에는 양식집이나 폴락거리고 드나들지만 어떤 돈이 무제한하고 그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만 제공될 리가 있겠습니까. 돈은 넉넉지 못한 데다가 아침에 늦잠을 자고 나니 속은 쓰리지만은 찬물에 손 넣기가 싫으니까 손쉽게 설넝탕을 주문한답니다.먹고나서 얼굴에 분(粉)쭉이나 부치고 나면 자연이 새로 세시가 되니까 그적에는 손을 마주잡고 구경터나 공원 같은 데로 산보를 다니다가 저녁 늦게나 집에를 들어가게되니까 어느 틈에 밥을 지어먹을 수 없고 또 손쉽게 설넝탕을 사다 먹는답니다. 그래서 하루에 설넝탕 두 그릇이라는 것인데…'(‘무지의 고통과 설넝湯 신세, 신구가정생활의 장점과 단점’, 별건곤 제24호)
◇빈발하는 자전거 배달 사고
경성 거리가 설렁탕 같은 음식을 배달하는 자전거로 분주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1920~30년대 신문에는 설렁탕 같은 음식을 배달하는 자전거와 전차, 자동차가 충돌하는 사고가 종종 일어났다.’ 26일 오전7시경 종로통(鍾路通)1정목 청진동(淸進洞) 들어가는 어구에서 서린동(瑞麟洞)139번지 장영배(張英培)(28)가 운전하는이약 95호자동차와 인사동(仁寺洞)168번 설렁탕집 배달부 이중영(李重永·21)의 자전거가 충돌하여 이중영은 일시 인사불성에 이르러 즉시 수송동(壽松洞) 전치의원(全治醫院)에 입원케 하야 응급치료를 베푼 결과 생명에는 벌다른 관계가 없다더라’( ‘자동차 사고 별일은 없었다’, 조선일보 1926년7월27일)
◇수재민에게 설렁탕 대접한 식당 미담
1925년 을축대홍수로 한강이 넘치면서 뚝섬 인근에 수재민이 대거 발생했다. 집도 세간살이도 물에 떠내려보낸 수재민들이 매일 끼니를 해결할 방법도 마땅찮았다. 이때 어떤 설렁탕집 주인이 수재민 2000명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선뜻 나섰다. 메뉴는 따뜻한 고깃국물 가득한 설렁탕이었을 것이다. 인정 넘치는 설렁탕 한 그릇을 훌훌 마시며 추위와 배고픔에 떨던 수재민들의 마음은 잠시나마 따뜻해졌다.(‘독도이재동포 이천인에게 샌전설넝탕집 설렁탕을 제공’,조선일보 1925년 7월18일)
◇주방 직원이 火夫처럼 불결해보여
설렁탕집의 불결한 위생은 문제였다. 1920년 요즘의 ‘독자투고’같은 ‘투서란’에 이런 글이 실렸다. ‘요사이 호열자병은 여기저기서 일어난다는데 장교 부근의 어떤 설넝탕집은 어떻게 부정시러운지 사람이 견딜 수있더라고. 그런 집은 대청결을 좀 하여야겠던 걸(一過客).’
위생문제는 일제시대 내내 제기됐다. ‘이 선술집과 설넝탕 등의 음식점을 겸영하는 곳도 많이 있는데 이것들은 불결의 쌍주곡이라고 할 만큼 악취가 나며 변소도 완전한 집이 드물어 파리가 들어꾀이고 더욱이 요리인들의 불결하기란 짝이 없다. 그들은 대개 조선 바지저고리나 양복 바지 위에 샤쓰 하나와 앞치마를 걸쳤으나 음식 국물, 땀, 코에 찌들어 그꼴이 화부로는 보일망정 오리인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나이가 많을수록 그 정도가 심하야…’(‘불결! 비위생의 표본, 선술집과 설렁탕집’, 조선일보 1939년6월17일)
◇설렁탕 값 인상 둘러싼 공방전
대중이 자주 먹는 음식이다보니 설렁탕 값을 둘러싼 공방전도 치열했다. 식당들이 설렁탕 값을 올리려고 하면 반대여론이 거세게 일고, 허가권자인 경찰이나 당국이 끼어드는 일이 되풀이됐다.
‘냉면 탕반 설렁탕 등을 파는 사람으로 조직된 부내 각 음식점조합에서는 한 그릇에 20전하던 것을 25전으로, 25전 하던 것은 30전으로 값을 올리려고 준비중이라 함은 기보(旣報)한 바인데 9일 본정서(本町署)에는 관내 조선인음식점조합인 남부음식점 조합에 이상과 같이 5전가량씩 음식값을 올리겠다고 신청하여왔다. 본정서 보안계에서는 종래 일반대중 음식점의 음식값은 인가제가 아니었으므로 경제계로 돌리어 업자들은 그냥 돌아갔다. 이에 관하여 본정서 경제계에서는 음식의 분량이 줄고 질이 나빠져 사실상 값을 올린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이 이상 가격을 올린다는 것은 인정할 수없다. 음식값이 ‘9.18′가격의 제한을 안받는다는 것은 ‘써-비쓰’를 주로 한 카페나 빠의 경우이지 대중식당에서 값을 올린다는 것은 인정할 수없다고 말하며 경기도 경찰부 경제경찰과에서도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으므로 음식값 가격 인상은 우선 ‘스톱’을 당하게 되었다.’(‘냉면, 탕반가인상, 경찰은 불허방침’, 조선일보 1940년4월11일)
당시 설렁탕, 냉면 같은 음식값 인상은 경찰서 통제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요즘 설렁탕 한 그릇에 1만3000원까지 받는 식당도 있다. 냉면 한 그릇에 1만6000원인 세상이니 고깃국물 듬뿍 든 설렁탕이 그정도 받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기값, 가스값에 인건비까지 물가가 오르다보니 음식점 주인인들 견딜 도리가 없을 것이다. 작년 올해 음식 값이 두어 번 오른 곳이 많아 식당 갈 때마다 가격표를 확인하는 게 일상이 됐다. 설렁탕은 더 이상 만만한 서민 음식은 아닌 것같다.
◇참고자료
주영하, 식탁위의 한국사, 휴머니스트,2013
박현수, 식민지의 식탁, 이숲,2022
牛耳生, ‘괄세못할 경성 설넝탕,진품 명품 천하명식 팔도명식물 예찬’, 별건곤 제24호, 1929년 12월
朴熙, ‘무지의 고통과 설넝湯 신세, 신구가정생활의 장점과 단점’, 별건곤 제24호, 1929년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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