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수지 또 적자
수출 모범생이던 한국 경제의 슬럼프가 장기화하고 있다. 텃밭으로 여겼던 반도체와 대(對)중국 수출 부진이 길어지면서 무역수지가 13개월 연속 적자를 기록한 데 이어, 한 나라의 경제 체력을 나타내는 ‘종합 성적표’ 격인 경상수지도 11년 만에 2개월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한국은행은 2월 우리나라 경상수지가 5억2000만달러 적자를 기록했다고 7일 밝혔다. 지난 1월에 사상 최대 적자(42억1000만달러)를 낸 이후 2월에도 흑자로 올라서는 데 실패했다.
11년 전인 2012년 초 남유럽 재정 위기로 수출길이 막히면서 경상수지가 대폭 적자가 났듯, 이번에도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수출 부진이 발목을 잡았다. 반도체, 휴대폰, 가전제품 등 주력 품목 수출은 작년보다 30~40%씩 줄었다. 적어도 상반기에는 이런 국면이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해, 경상수지 적자가 구조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경상수지는 상품 수출입(상품수지)은 물론이고 서비스 수출입(서비스수지), 그리고 자본과 노동을 거래해서 벌어들인 돈(본원소득수지) 등을 모두 합산한다. 이 수치는 환율에 영향을 미치고, 국가 신용 등급 등을 결정하는 핵심 자료가 된다.
◇ 경상수지 2월 -5억2000만달러 기록…11년 만에 2개월 연속 적자
우리나라가 연간 1051억달러라는 사상 최대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던 지난 2015년, 상품수지에서만 1203억달러 흑자가 났었다. 서비스수지 등에서 적자가 났어도 수출 하나로 경제를 이끌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최근 이 구조가 고장이 났다. 작년 3월 시작된 무역수지 적자(수출보다 수입이 많은 것)가 올 3월까지 13개월째 이어지며 외환 위기 이후 26년 만에 최악의 상황이 됐다. 국경 통관 기준인 무역수지에다 우리나라 기업의 해외 법인이 수출입한 실적까지 반영한 것이 상품수지인데, 이 수치도 5개월 연속 적자다. 수출은 계속 1년 전보다 줄어드는데 원자재 값 등이 오르면서 수입액은 늘어 벌어진 현상이다. 수출이 호조일 땐 경상수지의 전부를 차지할 정도로 절대적인 비율을 차지하는 상품수지가 고꾸라지다 보니 경상수지도 2개월 연속 적자에 빠진 것이다.
◇ 해외여행 15배 폭증… 경상수지 적자 키워
한국 경제 버팀목이던 상품수지가 연속 적자에 빠져 있는 가운데, 고질적인 서비스수지 적자는 악화되는 추세다.
지난 2월 서비스수지는 20억3000만달러 적자를 냈다. 이 중 절반이 여행수지 적자(10억1000만달러)였다. 작년 2월 적자(4억3000만달러) 대비 적자 폭이 2.3배로 늘었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작년 2월 해외로 나간 여행객은 11만2700여 명, 올 2월엔 이 숫자가 172만5000여 명으로 폭증했다.
올여름 휴가철에도 해외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이 많다. 신지영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주요국의 코로나 봉쇄 조치가 종료됐고 ‘보복 여행’도 증가하면서 여행수지가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렇게 되면 결국 서비스수지 적자가 심화돼 전체 경상수지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이런 상황이 하반기에는 나아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중국 경기, 특히 반도체 경기가 차차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가 바탕에 깔려있다.
방기선 기획재정부 1차관은 7일 비상경제차관회의에서 “3월 이후 외국인 입국자가 증가하고 있고 무역수지도 시차를 두고 완만히 개선되고 있다”며 “올해 경상수지는 상저하고(上低下高) 흐름을 보이며 연간 200억불대 흑자가 예상된다”고 했다. 한국은행도 상반기 경상수지가 44억달러 적자를 내겠지만, 하반기에는 304억달러 흑자로 돌아서 연간으로는 260억달러 흑자를 낼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는 수출 불씨 되살리기에 나섰다. 6일 최상대 기재부 2차관은 현대차 울산 공장에 찾아가 “수출 확대를 위해 범정부적인 정책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내년 예산안에 수출 드라이브를 핵심적인 투자 분야로 선정했고, (수출 물류 바우처 지원, 무역 금융 공급 규모 확대 등) 업계 제안 사항을 충실히 반영하겠다”고 말했다. 해외로 가는 발길을 국내로 붙잡기 위해 4~5월 고속철도 최대 50% 할인, 5월 휴게소 할인, 6월 100만명에게 숙박 할인쿠폰 3만원 지급 등 각종 국내 관광 이벤트도 벌인다.
우리나라 경상수지는 2015년 1051억달러 흑자를 정점으로 점차 흑자 규모가 줄어들고 있다. 지난해 경상수지 흑자는 298억달러로 2015년의 3분의 1 수준에도 못 미친다.
박석길 JP모건 이코노미스트는 “하반기에 에너지 가격이 안정되고 반도체 업황이 회복되는 등 교역 조건이 정상화되면 경상수지가 흑자로 돌아서겠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 경제가 과거와 같은 대규모 경상 흑자를 내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경제구조상 상품수지가 크게 좋아져야 서비스수지 적자를 메울 수 있는데, 코로나를 거치면서 세계 공급망이 재편됐기 때문에 이전처럼 원료나 부품 같은 중간재·자본재 수출이 크게 늘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장재철 KB국민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중국이 중간재와 자본재를 국산화하는 등 경제 구조가 변하면서 우리나라 수출이 예전처럼 크게 좋아질 수 없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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