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빈민가 소년, 대구의 심장으로

김민기 기자 2023. 4. 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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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대구FC 주장 세징야
프로축구 대구FC 주장 세징야(브라질)가 지난해 5월 리그 경기에서 골을 넣은 후 환호하는 모습. 2016년 고국을 떠나 지구 반대편 한국 땅을 밟은 그는 8년째 대구 소속으로 뛰며 213경기 82골 54도움을 기록했다. “은퇴 후에도 대구를 떠나고 싶지 않다”고 할 정도로 대구와 한국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 /연합뉴스

브라질 빈민가에서 대구의 심장으로. K리그 축구팀 대구FC 주장 세징야(34) 얘기다. 그는 2016년부터 8년째 대구 핵심 선수로 굳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자마자 2부 리그에 있던 대구를 1부 리그로 끌어올렸고, 구단 역사상 첫 우승(2018년 FA컵)과 첫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진출, 역대 구단 최고 성적(K리그 3위)을 올리는 과정에서 세징야는 선봉장이었다. 특히 2018년 FA컵에선 5골로 득점왕에 올랐고 MVP도 차지했다. 지금까지 대구 소속으로 213경기 출전 82골 54도움. 역대 대구 선수 중 최다 골, 최다 도움 기록이며 최다 출장 경기(박종진 242경기·은퇴)도 시간 문제다. 순도 100% ‘대구FC 레전드(전설)’로 남기에 손색이 없다. 대구에서 그는 ‘대팍(대구 홈구장 DGB대구은행파크)의 왕’ ‘대구에로(대구+아구에로)’라 통하며, 팬들은 그에게 ‘서진야’라는 한국식 이름도 안겨줬다. 아구에로는 전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골잡이다.

세징야 본명은 세자르 페르난두 시우바 멜루. 1989년 브라질 상파울루주 상조제두히우프레투에서 태어났다. 인구 7000명의 가난한 마을. 5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와 할아버지는 농사일을 하며 4남매를 키웠다. 세징야는 둘째였다. 생계를 위해 어머니는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다. 어머니가 한 달 치 식재료를 사다놓고 일감을 찾아 멀리 떠나면 4남매가 그걸로 끼니를 이었다. 10대로 접어든 뒤론, 가계를 돕기 위해 학교 수업이 끝나면 사환 일을 했다. 그러나 그에겐 꿈이 있었다. 여느 브라질 소년들처럼 축구로 세상을 호령해보겠다는 것. 퇴근 후엔 운동장에 가 혼자 공을 찼고, 주말엔 팀을 꾸려 연습 경기를 가졌다. 주변에선 “주말에라도 쉬어야지, 무리하면 일은 어떻게 하냐”고 핀잔을 줬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일과 학교, 축구, 이 세 가지 길을 병행한 끝에 2007년 브라질 명문 프로팀 SC코린치안스 유스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브라질 축구스타 호나우두도 뛰었던 팀이다. 그리고 3년 뒤 코린치안스에서 프로 데뷔까지 했다.

그러나 곧 닿을 것만 같던 축구 스타라는 꿈은 좀처럼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브라질 프로 클럽을 여기저기 떠돌며 6년을 노력했지만 빛을 보지 못했다. 2015년엔 브라질 1부 리그 17경기에서 한 골도 넣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한국, 그것도 대구라는 도시 축구팀이 손길을 내밀었다. 대구는 당시 K리그 챌린지(2부)에 속한 비주류 축구단. “브라질에 가면 싸고 실력 좋은 선수가 많다”는 이른바 ‘브라질 용병 붐’에 편승한 영입이었다. 당시 2부리그엔 브라질 선수만 20여 명이 뛰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도전이란 각오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세징야의 성공 스토리가 새 장을 열었다. 이종현(36) 대구 코치는 “팀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선수로서 성공해보겠다는 열망이 유독 강했고, 그래서인지 한국 선수들보다 1시간 일찍 나와 훈련에 임하고 몸관리를 철저히 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제 고향에선 영웅 대접을 받는다. 지난해 기준 대구에서 받은 연봉은 16억원. 엄청난 부(富)를 모은 건 아니지만 8년간 한국에서 모은 돈으로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집 한 채씩을 마련해줬다. 고향 꼬마들에겐 세징야가 ‘롤 모델(role model)’이다. 비(非)시즌에 고향을 찾으면 아이들에게 특강도 하고 같이 공도 찬다. 아이들은 “나도 세징야 형처럼 되겠다”고 말한다고 한다. 그는 “무엇보다 어머니가 너무 자랑스러워하신다”면서도 “아들이 이역만리에서 고생한다고 생각하시는지 전화만 하면 자꾸 우셔서 난감하다”고 말했다.

세징야는 “내게 대구는 가장 잘 맞는 옷이다. 은퇴하면 꼭 대구에서 지도자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대구에서 세징야의 인기는 ‘이승엽급’이다. 경기 없는 날 백화점을 찾으면 팬들이 몰려들고, ‘세징야 동상’을 세우자는 말까지 자주 나온다. 그는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면서도 “대구에서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아 감사하다”고 했다.

지난 시즌에는 팀 주장도 맡았다. 구단 역사상 첫 외국인 선수 주장이다. 올해도 주장 완장을 찼다. 세징야는 “동료들에게 ‘자신감’을 강조한다”면서 “이젠 고참 선수가 된 이상 마지막까지 후배들에게 모범을 보일 수 있게 더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6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브라질의 A매치(국가대항전) 경기에서 그는 모국(브라질)이 아닌 한국 대표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나타났다. 등에는 자기 이름과 등번호 11번을 새겼다. 그에게 한국은 더 이상 제2의 고향이 아니다. “당연히 한국을 응원한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도 수많은 팬이 세징야에게 사인을 요청하고 사진을 찍자고 해 그 역시 놀랐다고 한다. “대구도 아닌 서울에서도 그런 경험을 할 거라곤 전혀 생각 못 했다”면서 웃었다.

한국 생활 8년 차지만 여전히 한국어는 어렵다. 일주일에 2번씩 강사에게 꾸준히 배우지만 서툴긴 마찬가지. “팀 동료들과 더 편하게 소통하려면 더 배워야 해요”라며 말하는 그의 발음은 여전히 딱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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