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진아”… ‘더 글로리’ 동은이는 왜 거듭 가해자를 불렀을까

곽아람 기자 2023. 4. 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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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힘·학대 치유 전문가인 저자
“용기 내어 가해자 이름 부르면
그에게 책임 물리며 힘 되찾아”

괴롭힘은 어떻게 뇌를 망가뜨리는가

제니퍼 프레이저 지음|정지호 옮김|512쪽|2만6000원

“멋지다, 연진아!” “연진아, 나 지금 되게 신나”….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학교 폭력 피해자인 동은은 거듭 가해자 ‘연진’을 호명한다. “연진아”는 수많은 패러디를 낳으며 ‘올해의 유행어’가 됐다. 동은은 왜 계속해서 연진이를 부를까? 가해자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만 해도 고통스럽지 않은가?

캐나다 교사로 괴롭힘 및 학대 치유 전문가이자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이기도 한 제니퍼 프레이저의 이 책은 “연진아”가 동은의 망가진 뇌와 마음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설명한다. “자신을 학대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순간이 우리가 힘을 되찾는 순간이다. 가해자의 이름을 용기 있게 부르면 가해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물릴 수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진다.”

괴롭힘 피해자들은 보통 가해자와 그들의 행위에 대해 함구하려 한다. 사회 전반이 교사의 학대는 ‘훈육’이며 부모의 학대는 ‘열정’이라는 식의 ‘괴롭힘의 패러다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아이든 성인이든 괴롭힘 상황에서 목소리를 내면 집단을 와해했다는 이유로 퇴출될 위험이 높다. 저자 역시 학창 시절 겪은 폭력에 대해 글을 쓸 때 가해자가 기소돼 언론에 보도된 사건임에도 주변으로부터 “가해자의 이름을 밝히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러나 저자는 트라우마를 마주하며 “나는 피해자이기 때문에 가해자가 한 짓을 은폐해줄 필요가 없다”고 언명하는 행위가 일상을 회복하는 첫걸음이라 말한다.

책은 제목처럼 ‘괴롭힘으로 인한 뇌 손상’에 초점을 맞춘다.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라는 격언은 여러 연구에 따르면 사실이 아니다. 성인이 아이에게 가하는 괴롭힘이 위대한 목표 달성을 위한 필요악이라는 신화(神話)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지만, 신체적 폭력이든 언어적 폭력이든 괴롭힘은 뇌 손상을 야기한다. 캐나다 연구진에 따르면 도구뿐 아니라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때리는 것만으로도 아이의 지능지수가 하락하고 성장 발달에 지장이 온다. 엉덩이 때리는 행위가 뇌세포 사이의 연결 조직인 뇌의 회백질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아동 학대를 근절하면 우울증 발생 비율은 절반 이하로, 알코올 의존증은 3분의 2로 줄어들 거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드라마 ‘더 글로리’의 한 장면. 학폭 피해자인 동은(왼쪽)은 가해자 연진(오른쪽)의 이름을 거듭해 부른다. 저자는 “가해자를 호명함으로써 폭력으로 상처 입은 뇌를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넷플릭스

‘상처받은 뇌’는 피해자 내면에 ‘마음속 가해자(Mind-Bully)’를 구축한다. 이 ‘가해자’는 ‘나는 나약해’ ‘내가 너무 예민한 거야’라고 속삭이며 피해자를 끊임없이 공격한다. 불안이나 우울 장애, 중독 증상을 불러일으키며 심하면 자살까지 몰고 간다. ‘괴롭힘으로 인한 자살(bullycide)’은 궁극적으로 마음속 가해자를 죽이기 위한 행위다. 약물 남용, 공격적 행동 등을 초래하기도 한다. 저자는 “학대 가해자는 과거에 학대를 당한 경우가 많은데, 이는 학대를 통해 손상된 뇌가 행동 조절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뇌는 회복력이 빠르다. 저자는 ‘신경가소성’이라는 과학적 개념을 통해 “뇌의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의 선택, 결정, 행동이 과거에 경험한 일보다 뇌를 형성하는 데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우리는 뇌의 부정적인 신경망을 없애고 이를 긍정적인 신경망으로 복구할 역량이 있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마음 챙김 명상과 운동도 뇌의 치유에 도움이 되지만, 저자는 “’괴롭힘의 패러다임’을 ‘공감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자”고 제안한다. 괴롭힘과 학대에 감염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지만, 상대가 경험하고, 느끼고, 보고, 생각하고, 의도하는 것을 경청하는 연습을 통해 손상된 뇌를 재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신경과학자 마이클 메르치니치는 말한다. “공감은 천부적인 자질인 반면, 괴롭힘과 학대는 학습된 행위다.” 단 이런 전제하에서다. “공감은 뇌에서 ‘가소성 변화’를 통해 발달되며, 삶은 이 발달을 저지할 만큼 충분히 고될 수 있다.”

‘공감 연습’을 통해 ‘피, 땀, 눈물’을 통한 성취보다 그것을 흘리는 이의 고통을 감지할 때, 피해자와 가해자의 뇌는 모두 회복되며 괴롭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폭력과 학대로 얼룩진 청소년기, 드물게 자신의 고통에 공감해준 존재였던 빌라 주인 할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동은은 이렇게 썼다. “이제야 깨닫습니다. 저에게도 좋은 어른들이 있었다는 걸. (…) 나중에 더 따뜻할 때 봄에 죽자던 말은 봄에 피자는 말이었다는걸요. 저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원제 The Bullied B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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