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의 말과 글] [298] 다정도 병인 양하여
주말에 카페 옆자리에서 세 시간 넘게 수학 문제와 씨름하는 초등학생을 보았다. 아이가 풀고 있는 문제집은 놀랍게도 중학교 교재였다. 틀린 문제를 엄마가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었지만 아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있었다. 아이 엄마는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중학교 가서 뒤처지지 말라고 미리 고생하는 거니까 조금만 참자!”라고 말하며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선행 학습의 현장에서 원고를 쓰던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린 그 아이보다 먼저 일어났다.
‘의약치한수’ 의대, 약대, 치대, 한의대, 수의대를 말하는 단어다. 요즘은 의대에 진학하는 N수생이 늘었다고 한다. 대기업 직장인이었다가 의대 진학을 위해 서른이 넘어 수능 공부를 다시 하는 경우도 많다. 역사상 가장 높은 스펙을 보유한 세대이지만 취업은 가장 어려운 MZ 세대들이 취업 후에도 방황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지인의 자녀도 예외는 아니라, 남들이 모두 부러워할 곳에 취업했지만 적응이 쉽지 않아 퇴사를 고민 중이었다. 지인은 자신의 불안을 아이에게 너무 많이 투사해 지나치게 아이의 자율성을 무시하고 진로를 몰아붙인 것 같다고 후회했다.
언젠가 농부가 파를 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내 짐작과 다르게 땅속 깊이 심지 않고 적당히 흙을 덮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어떤 파들은 저러다 뽑히지 않을까 싶게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하지만 농부가 말하길 이렇게 심어야 튼튼히 뿌리를 내리고, 비바람을 맞으며 굵은 대파로 쑥쑥 큰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떤가. 비가 오면 우산이, 햇빛이 쏟아지면 양산이 되고 싶은 애틋함은 때로는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 편에서 필요하다고 믿는 것’으로 뿌리내리기 쉽다. 하지만 온실의 적당한 온도와 습도 속에서 자라난 화초는 약하다. 폭우 후 땡볕 같은 방황이 꼭 나쁜 건 아니다. 뜨거운 여름을 이겨낸 포도는 기가 막히게 달기 때문이다. 때로는 잘못 들어선 길이 새로운 지도를 만든다. 사랑이 과하면 다정도 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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