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미륵은 오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천년 이상 메시아를 기다려왔다. 대표적 메시아 신앙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100여년 남짓이지만 메시아 신앙은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존재했었다. 바로 미륵이다. 한국에 미륵의 흔적은 차고도 넘친다. 미륵의 이름을 딴 절에서부터 이름난 절의 미륵전에는 미륵불이 모셔져 있고, 이름 모를 산기슭과 길가에 늘어선 돌부처 또한 미륵이다.
바닷가에 흔한 마을 이름인 매향리(埋香里)는 향을 묻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갯벌에 향나무를 묻는 매향은 미륵신앙의 중요한 의식으로 미륵이 오실 먼 훗날 묻었던 향나무를 파내어 향을 사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요즘 몇몇 방송에서 매향리를 매화향 가득한 동네로 소개하던데 적어도 바닷가 매향리들은 오랜 옛날 향을 묻었던 곳이다.
미륵신앙은 삼국시대에 유행한 불교의 전통으로 미륵부처가 이 세상으로 와서 사람들을 구원하고 좋은 세상을 만들어 줄 거라는 믿음이다. 삼국의 대립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민초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사람들은 암울한 현실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미륵을 기다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 미륵은 메시아, 즉 구세주다.
미륵(彌勒)은 인도어 마이트레야(Maitreya)에서 유래했다. 마이트레야는 미트라(Mitra)에서 파생된 말인데, 미트라는 인도의 힌두교,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빛의 신(태양신)’으로 섬기던 신의 이름이다. 태양은 매일 지고 매일 떠오른다. 밤이 되면 어둠에 힘을 잃지만 아침이 되면 되살아나는 것이다. 태양의 이러한 속성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부활’과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구원할 ‘구세주’라는 상징으로 연결된다.
한국에서 기독교가 빨리 전파된 이유도, 최근 방영된 <나는 신이다>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구세주를 자처했던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인들은 1500년 동안이나 구세주를 기다려 온 사람들이니까. 그러나 미륵신앙은 신앙의 영역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미륵의 구원은 종교의 영역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고난의 세상을 바꿔줄 이를 원했다.
미륵신앙이 뿌리를 내린 후로 한국에서는 예전부터 나라가 어지럽고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면 자신이 미륵이라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나타났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와 조선 숙종 때의 여환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정치와 종교의 영역이 명확하지 않았던 시대에 미륵은 곧 세상의 주인, 왕을 의미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래된 욕망의 흔적은 현대에 와서도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많은 한국인들은 대통령이 바뀌면 나라의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줄 거라 믿는 듯하다. 한 사람의 정치인에게 자신들의 욕망을 모두 투사하고 그가 당선된 뒤에도 현실이 그다지 나아지지 않으면 “그놈이 그놈”이라며 이내 그 일을 해 줄 다른 이를 찾는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왕조시대의 왕도 그런 권력은 없었다. ‘싹 다 갈아엎기’를 반복했던 현대사 때문일까.
아니, 현대사의 한복판에서도 한국인들은 미륵을 찾고 있다. ‘싹 다 갈아엎기’의 원조이자 그 결과로 한국의 성장을 이루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직도 어딘가에서 ‘반인반신(半人半神)’으로 추앙받고 있는 사실은 지금이 갯벌에 향나무를 묻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지금은 1500년 전이 아니다. 민초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구세주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던 시대와 지금을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현대 사회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이끌고 나가는 주체는 자신이며 사회와 국가는 그러한 개인들의 의지와 합의로 구성되고 운영되며 또 그래야 한다.
미륵은 오지 않는다. 아니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시점은 누구도 알 수 없으며 그것이 누구인지도 아무도 모른다. 알면 또 어떡할 것인가. 종말이 다가온다며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자신의 전 재산을 천국에 예금 의탁하듯이 갖다 바칠 것인가. 자신이 구세주라고 믿는 이에게 몸도 마음도 의사결정도 의탁한 채로 이용당하다가 버려질 것인가. 아니면 구세주의 일등공신으로서 당신이 바꿀 세상의 이권을 내게 달라 청탁이라도 할 것인가.
미륵신앙은 옛날부터 현실의 간난고초를 잊게 해 주었던 우리의 믿음이다.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할 일이 구세주를 기다리는 일이어서는 안 된다.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 어렵고 혼란스럽지 않은 때가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이 혼란에는 내가 기다리는 미륵이 내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 줄 거라는 오래된 욕망이 자리 잡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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