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만우절의 신부
지난 4월1일 만우절에 나는 빨간 드레스를 입고 결혼했다. 이 말은 장난일까 아닐까. 장난이 아니라면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첫 문장의 의미대로 나는 만우절에 빨간 드레스를 입고 사랑하는 이와 ‘결혼식’을 했다. 나와 애인은 4년 넘게 연애를 했고 그중 1년은 동거를 했다. 동거를 시작한 후 양가 부모님은 물론 주변에서도 결혼은 언제 할 것인지 물었다. 청소년 때부터 비혼을 선포했던 나는 애인에게 말했다. 생활동반자법이 제정되면 서로를 생활동반자로 신고할 것이지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애인은 나의 뜻을 존중했고 우리는 둘의 일상을 충분히 꾸려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번 국회 임기 안에 생활동반자법이 제정되면 생활동반자 신고를 하자고 애인에게 ‘프러포즈’까지 했지만 앞서 말한 대로 결국 결혼했다. 한밤중에 내가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을 가야 했을 때 애인은 기껏해야 동거인 자격이었기에 나의 부모님께 연락해 두 분이 택시를 타고 병원에 와야 했던 적이 있다. 함께 사는 집의 전세 계약 연장을 앞두고 보증금 대출을 받으며 우리는 ‘플랜Z’쯤으로 여기던 결혼을 택했다.
이렇게 결혼하게 된 마당에 결혼식 같지 않은 결혼식을 하자며 우리가 직접 기획하고 출연하는 행사를 열기로 했다. 큐시트부터 식중영상과 음악까지 직접 준비했다. 결혼식 3대 요소라는 ‘스드메’도 우리 손으로 해냈다. 그 결과 결혼식 당일 가족과 하객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빨간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탄생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결혼식에서 하얀 드레스를 입은 것을 시작으로 지금에는 신부의 순결과 순수함을 상징한다는 흰 웨딩드레스는 절대 입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식 시작 10분 전까지 흰 원피스를 입고 있다가 숨어서 빨간 드레스로 갈아입고 식장에 나타났다.
최대한 ‘결혼’ ‘신랑’ ‘신부’라는 단어를 쓰지 않으려 노력했고, 남성과 여성의 순서를 바꾸고 성을 떼고 이름만 말하기도 했다. 결혼 서약서 대신 직접 쓴 동반자 서약서를 함께 읽었고, 성혼 선언 없이 서약의 증표로서 동반자를 뜻하는 ‘Companion’을 새긴 반지를 서로의 손가락에 끼워주웠다. 이때도 빨간 드레스 입은 신부가 무릎을 꿇고 신랑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청첩장 대신 초대장이라고 이름 붙인 것에 우리는 ‘4월1일 거짓말처럼 서로의 영원한 동반자가 될 두 사람이 맺을 서약의 증인이 되어주십시오’라고 적었다. 만우절 장난이라고 말해도 우리가 갖은 노력으로 준비한 행사는 ‘결혼식’이었다. 파격적인 결혼식이라거나 재미있는 결혼식이라거나. 한 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이 평생의 동반자가 되겠다고 약속하는 예식은 어찌해도 결혼식이었던 것이다.
반대로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진심을 담아 여는 결혼식이라고 해도 성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결혼 자체를 부정당하는 이들도 있다. 낮은 혼인율을 걱정하는 한국은 사랑하는 동성 연인과 결혼하겠다고 하면 축하는커녕 잔치에 퇴짜를 놓기 마련이다. 나와 애인은 차선책의 차선책으로 결혼을 하여 합법적인 관계가 될 수 있지만 어떤 이들은 간절히 바라도 불법적인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한국의 모든 결혼식이 만우절 장난처럼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되는 날이 오길 바란다. 만우절에 결혼한 나와 애인은 생활동반자법이 제정되어 부부에서 생활동반자가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김예선 부산민주공원 홍보 담당 청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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