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말, 트루먼이 중국의 국·공 내전 참여를 결정했다. 미 의회가 발칵 뒤집혔다. 반대 의견이 줄을 이었다. “정부(국민당)군과 공산당(중공)군의 무장충돌은 예견했던 일이다. 작전 지역에 미군 수송기가 국민당 군을 이동시키는 것은 무리한 내정간섭이다. 정부 기관과 의회에 다량의 서신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내용이 비슷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났다. 아직도 중국에 미군이 남아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상원의원 맨스필드가 성명을 냈다. “미·중 관계의 결정적인 순간에 봉착했다. 양국 국민이 다져온 전통적인 우의가 대대손손 유지될 수 있다면 후세의 미국인들은 현 정권에 감사를 표할 것이다. 상반된 정책을 취할 경우 우리를 저주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정전 감시 군조부, 중국 현대사의 신기루
트루먼의 특사 마셜의 생각도 별 차이가 없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에게 정전과 새로운 정치체제 출범을 압박했다. 직접 작성한 ‘중화민국 임시정부헌법 초안’을 장에게 전달했다. 장은 영어를 몰랐다.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이 한 자 한 자 중국어로 옮겨줬다. 한 대목에 눈이 가자 가슴이 철렁했다. “국무위원의 동의가 없으면 정부는 각 현(縣)이나 행정구역의 업무에 영향을 줄 공문을 발포(發布)할 수 없다.” 듣기를 마친 장이 벌떡 일어났다. 끝까지 들어보라는 쑹의 손길 뿌리치며 목청을 높였다. “마셜인지 뭔지 꼭 저럴 줄 알았다. 객경(고관으로 고용된 외국인) 주제에 공산 비적들도 감히 못 하는 제안을 내게 내밀었다. 한때 중국에서 몇 년 굴러먹었다고 중국 사정 다 안다며 나대는 코쟁이들과 다를 바 없다. ‘군조부(軍調部)’도 필요 없다. 당장 없애버리겠다.” 쑹은 장과 결혼 후 별꼴을 다 겪었다. 웬만한 일에는 끄떡도 안했다. 그날만은 예외였다. ‘군조부’ 없애겠다는 말에 기겁했다. 겨우 달랬다. 장도 수긍했다. 한숨 내쉬며 하늘만 바라봤다. 그날 밤 일기가 유난히 짧았다. “오늘따라 고향의 가을 하늘이 그립다.”
군사조처집행부(軍事調處集行部), 간칭 군조부는 묘한 기구였다. 1946년 1월 10일 정전협정과 동시에 마셜의 제의로 국·공 양당의 무력충돌 정지와 일본군이 파괴한 철도회복, 정전 감시를 위해 설립한 중국 현대사의 신기루였다. 군조부의 최종 결정 기구는 미 대통령 특사 마셜과 국민당 대표 장췬(張群·장군), 중공 대표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이끈 ‘3인조’였다. 초기 관원은 미국 측 125명, 국민당과 중공 방면 각 170명으로 단촐했다. 크고 작은 충돌이 전국으로 번지자 인원이 부족했다. 순식간에 9000명을 웃돌았다. 미국 측 공작 인원이 6000명으로 가장 많았다. 국민당 측은 2600명 정도였다. 중공 측은 600명, 숫자만 적었을 뿐 다들 일당백(一當百)이었다. 훗날 전인대 상무위원장을 역임한 원수 예젠잉(葉劍英·엽검영)을 필두로 중공 정보총책 리커농(李克農·이극농), 공안부장 뤄루이칭(羅瑞卿·나서경), 초대 티벳 제1서기 장징우(張經武·장경무), 1950년 겨울 장진호(長津湖)에서 미 최강의 해병 1사단을 골탕 먹인 쑹스룬(宋時輪·송시륜), 부총리와 국방부장을 겸한 겅뺘오(耿飇·경표), 외교부장 황화(黃華·황화)가 참여했다. 국민당 측도 중국 최대 규모의 정보기관 ‘중앙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 국장 정제민(鄭介民·정개민) 휘하의 특무요원들을 대거 투입했다. 미국 측 실무 책임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민간인이었다.
마셜, 특사 사직 동시에 국무장관 임명돼
군조부는 조직이 복잡하고 인원이 많았다. 지금의 베이징 반점과 주변 숙박업소는 물론, 록펠러재단이 설립한 협화의원(協和醫院)을 사용해도 부족할 정도였다. 미국 측은 누가 국민당이고 중공 측인지 구분이 힘들었다. 각 당이 같은 복장 착용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비서장 리커농은 어디 있는지 나타나지를 않았다. 8년 후 제네바회담에 중국 대표 단 일원으로 참석한 리커농을 보고 깜짝 놀랐다. 군조부 구내식당에서 중공대표단 식기세척 전담하던 사람과 생김새가 똑같았다.
장제스는 마셜을 만나기 싫어했다. 이름만 들어도 깎아내렸다. “평화 타령이 입에 뱄다. 마오쩌둥은 여우다. 중국의 평화를 핑계로 자신의 주가 올리기에 분주한 사람에게 평화의 사절이라며 아양을 떨었다.” 1946년 7월 면담 요청받자 뤼산((廬山)으로 몸을 피했다. 마셜은 부인과 함께 뤼산을 찾았다. 장은 마셜이 깊은 얘기 꺼내면 화제를 돌렸다. 여덟 번 뤼산에 가도 장은 변하지 않았다.
마셜은 중국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주중대사에게 푸념을 했다. “중국은 너무 산만하다. 감당할 자신이 없다. 화약 냄새가 진동한다. 고향의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다.” 트루먼에게 사직을 청했다. 마셜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특사 사직과 동시에 국무장관 임명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