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나체화는 뒷골목에 내걸어!” 꼬장한 천재 모욕한 자 최후는[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편]

2023. 4. 8. 00:1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신의 예술가
 
.
 
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인물편〉은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여졌습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 심판(일부 확대) [wikimedia]
영화 미켈란젤로(2021·엠마누엘레임부치 감독)에서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리고 있는 장면. [영화 미켈란젤로 예고편 캡처]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제기랄, 또!"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욕을 참지 못했다. 얼굴에 떨어진 회반죽을 거칠게 떼어냈다.

1511년, 로마.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는 건물 맨 위에 닿기 위해 사다리를 탔다. 거의 20~30m 높이를 올라왔다. 그러고는 드러눕듯 몸을 짓이겼다. 신경통과 관절염이 밀려왔다. 붓질은 그 상태에서 이뤄졌다. 미칠 노릇이었다. "나한테 이따위 일을…. 빌어먹을 교황 같으니." 미켈란젤로가 얼굴을 또 찡그렸다. 눈에는 회반죽, 코와 입에는 석회 가루가 훅 들어갔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파할 시간도 없었다. 천장에 어서 회반죽을 펴발라야 했다. 물기가 마르기 전에 빨리 색을 칠해야 했다. 프레스코(fresco)화의 철칙이었다. 떨어지면 꼼짝없이 죽을 높이, 땀에 찌든 얼굴과 뒤틀린 자세, 익숙하지 않은 제작 기법 등 최악의 삼중고였다.

마음 같아선 진작 그만뒀다.

진짜 그럴 뻔도 했다. "자네에게 맡긴 천장화 말이야. 얼마나 더 그려야 하는가?" 얼마 전 성질 급한 교황이 물었다. 아니, 따졌다. 이 인간아. 그 천장화 10분의 1 크기만큼 그려도 원래라면 지금부터 3년은 더 걸려. 나 정도나 되니 이렇게 빠른 거야…. 미켈란젤로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어이, 예술가 양반. 나는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리는 지를 묻고 있네." 교황이 다시 물었다. 그새 신경질이 잔뜩 섞였다. 미켈란젤로는 성질을 참지 못했다. "제가 작업을 끝내는 날에 끝날 겁니다." 그는 빈정댔다. 당연한 말을 했다. "자네가 끝낼 때? 하하, 참." 교황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이내 눈빛이 돌변했다. "말조심하게. 난 그따위 말을 들으려고 물은 게 아니야."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의 등짝이 벌게졌다. 그날 밤, 미켈란젤로는 짐을 쌌다. 고향 피렌체 쪽으로 가버렸다. "성하. 한 번만 그를 용서하시고 일을 맡기소서. 그 피렌체의 천재는 세상이 놀랄 작품을 남길 것이옵니다." 교황의 성격도 미켈란젤로 못지않게 불같았다. 그 피렌체의 천재라는 놈이 보인 돌발행동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정말 죽여버리고 싶었다. 참았다. 이 세상에 그만한 실력자가 없기에 인내했다. 이성 있는 지인들도 모두 만류했다. 교황은 화를 억누르고 미켈란젤로를 설득했다. 겨우 다시 데려왔다. 둘은 이후에도 거듭 맞붙었다. 아무리 교황이라 해도 그림을 미리 보여줄 수는 없다느니, 그러면 네 놈이 올라탄 사다리를 발로 걷어차겠다느니 하며 충돌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일부) [wikimedia]

미켈란젤로의 삶 중 가장 숭고한 세월이 이어졌다.

"일이 너무나 진척되지 않습니다. 일이 늦어지는 건 이 일이 어렵고, 내 본업(조각)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자꾸 헛되이 흘러갑니다. 신이여, 도와주소서." 미켈란젤로는 작업 중 이런 글을 썼다. 그는 고행자 같았다. 겨우 2시간씩 잤다. 푸석한 빵 덩어리와 포도주로 끼니를 때웠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을 달달 외웠다. 요즘 애들은 조수 일도 못한다고 꿍얼대며 모든 곳에 직접 손을 댔다. 그는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 작업용 장화도 내내 신고 있었다. 가끔 장화를 벗으려고 하면 살점이 함께 떨어졌다.

고통은 아름다움을 낳는다.

예술계에서 진리처럼 통하는 말이다. 이 말은 이번에도 통했다. 1512년, 11월 1일. 사람들은 이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를 마음껏 볼 수 있었다. 그가 작업에 나선 후 겨우 4년 만이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wikimedia]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바티칸시국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일부·아담의 창조) [wikimedia]

천장화는 크기부터 압도적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이 안에 천지창조, 아담과 이브의 창조·타락·추방, 노아 이야기 등 구약성서의 주요 내용을 3묶음 9장면으로 그렸다. 중앙 천장화에서 4번째 부분에 있는 그림이 훗날 가장 유명해지는 '아담의 창조'다. 작업 막바지쯤 그려진 장면이다. 하느님이 오른쪽에서 지천사(智天使)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벌거벗은 아담이 왼쪽에서 이를 아련하게 보고 있다. 하느님은 오른팔을 뻗어 생명의 불꽃을 건네려고 한다. 아담은 왼팔을 뻗어 그 기운을 받으려고 한다. 하지만 둘의 손가락은 아직 닿지 않는다. 이 장면은 이렇게나 아슬하기에 더 생생하다. 둘 중 하나가 막판에 망설이는 건 아닐지, 훗날 벌어질 재앙을 퍼뜩 떠올려버린 건 아닌지도 생각하게 한다. 천장화는 더 경건하게 다가온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일부) [wikimedia]

그날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본 모든 사람은 굳었다.

피 대신 철이 흐른다는 말이 따라붙던 냉정한 교황도 전율했다. 떨리는 손으로 흰 수염을 여러 번 매만졌다. 교황 뒤에 선 모든 사람은 울었다. 무릎을 꿇었다. 속죄했고, 두 손 모아 기도했다. 고작 37살 예술가가 낳은 인류의 유산이었다. 신조차도 놀랄 예술혼의 총체였다.

바티칸시국의 시스티나 성당을 찾은 방문객들이 미켈란젤로의 벽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관람하고 있다. [AP]
돌·끌 갖고 논 소년…메디치家 날개 달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Madonna with child

미켈란젤로는 1475년, 이탈리아 피렌체 근처의 카프레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을 행정관이었다. 어머니는 그를 낳고 6년 뒤 사망했다. 병약함 탓이었다. 아이러니하지만 미켈란젤로는 어머니가 일찍 죽어 예술을 빨리 접했다. 그는 석공(石工)의 아내였던 유모 손에서 컸다. 자연스럽게 돌과 끌, 정을 갖고 놀았다. 그렇게 조각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그는 훗날 "어렸을 때는 조각용 끌과 망치를 갖고 노는 게 그렇게 즐거웠다"고 회상한다.

기를란다요, Calling of the First Apostles

아버지는 재주 많은 아들이 공부에 힘 쏟길 원했다.

번듯한 직업으로 집안을 이끌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고집불통 아들을 불러 회유했다. 애원하고, 매질까지 했다. 그러다 포기했다. 끝내 뜻을 못 꺾었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출신 화가 기를란다요의 제자로 들어갔다. 13살 때였다. 미켈란젤로의 재능은 눈부셨다. 분명 실력자였지만, 특유의 한량 기질이 있는 기를란다요가 소화할 인재가 아니었다. 미켈란젤로가 기를란다요 그림에 손댄 적이 있는데, 노느라 정신 팔린 기를란다요가 이를 모르자 크게 실망했다는 말도 있다. 미켈란젤로는 그를 떠났다. 겨우 1년 만이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Study of an Ignudo

고대 로마 시대에선 위인의 등장 조건을 다음과 같이 풀어놓았다고 한다.

지성과 자제력, 의지와 지구력, 그리고 그만큼이나 중요한, 바로 운. 미켈란젤로는 이미 거의 모든 것을 쥐고 있었다. 조각 학교에 들어간 미켈란젤로는 곧 메디치가(家)를 만났다. 그 시절 가장 힘 있는 가문이었다. 넘치는 돈으로 예술가를 아낌없이 후원하는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퍼즐, 운이 채워진 순간이었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미켈란젤로의 실력에 감동했다. 그의 손끝에서 빚어지는 회화, 조각은 벌써 완성형이었다. 로렌초는 미켈란젤로를 힘껏 밀어줬다. 저택 한쪽에 대리석을 잔뜩 쌓아놓곤 마음대로 조각상을 빚게끔 했다. 로렌초는 미켈란젤로를 가족 식사에도 불렀다. 온 세상 지성인이 다 모이는 만찬장에도 초대했다. 파격 대우였다. 미켈란젤로는 이 덕에 시와 문학, 언어와 철학에도 조예가 깊어졌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Christ on the Cross

미켈란젤로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꼬장꼬장한 성격이다.

미켈란젤로는 이쯤부터 이미 독설의 대가였다.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을 무렵 일화가 있다. 미켈란젤로는 동료 화가 피에트로 토리지아노와 브랑카치 예배당을 찾았다. 둘은 이곳에 있는 마사초의 작품을 모사했다. 미켈란젤로는 토리지아노의 데생을 보고는 픽 웃었다. 진짜 형편없다며 거듭 조롱했다. 열받은 토리지아노가 그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미켈란젤로는 코를 맞고 나가떨어졌다. 눌러앉은 코뼈는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그대로 굳어버렸다. 피에트로는 "어찌나 약을 올리는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코를 한 방 세게 쳤다. (…) 그 친구는 내 서명을 죽을 때까지 달고 다닐 것"이라며 흡족해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이 때문에 평생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물론 그렇게 얻어맞고도 그 버릇은 못 버렸다.

'피에타'로 거장 반열…겨우 24살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둘 '피에타' 상(像)을 만들어보겠나?"

미켈란젤로는 로마를 찾은 프랑스 추기경 장 드 빌레르에게 제작 의뢰를 받았다. 기회가 왔다…! 그는 심기일전했다. 앞서 미켈란젤로는 직전 작품 '술 취한 바쿠스'를 망쳤다. 불량 대리석이 문제였다. 다 해놓고 보니 조각상은 이미 변색하고 갈라져 있는 등 난리였다. 미켈란젤로는 이번만큼은 최고의 대리석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이탈리아 북부 도시 카라라(Carrara)에서 순백의 대리석을 직접 채석했다. 그는 1498년부터 1년간 피에타 상을 빚었다. 양껏 먹지도, 제대로 쉬지도 않았다. 미친 집중력으로 실수 만회에만 매달렸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피에타 [wikimedia]

1499년, 피에타 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탈리아어로 피에타는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이다.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은 모습의 모든 작품을 의미한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그중 최고의 피에타였다. 과거에 빚어진, 앞으로 빚어질 모든 피에타 중 단연 일등이었다.

로마가 들썩였다.

성모 마리아 옷 주름에 예수의 머리카락까지 다 진짜 같았다. 핏줄 한 가닥마저 생생했다. 무덤을 파내 시신을 꺼낸 듯하다는 섬뜩한 말이 돌 정도였다. "인간이 아니야. 팔이 셋 달린 괴물이 만들었어." 이런 말에 모두가 끄덕일 만큼 티끌만한 디테일조차 완벽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피에타(일부 확대) [wikimedia]

미켈란젤로는 신 또한 이 작품을 볼 것으로 믿었다.

그렇기에 위에서 내려다볼 때 구도까지 생각했다. 위에서 보면 이 조각상이 품은 신성함이 짙어진다. 성모 마리아가 평온을 맞은 예수를 하늘로 보내는 듯한 모습이 연출된다. 일부 비평가는 성모 마리아가 너무 젊게 나왔다고 지적했다. "성모 마리아는 원죄가 없소. 그 성스러움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소."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미켈란젤로가 성모 마리아 얼굴을 일찍 죽은 그의 어머니와 닮게 빚었다는 말도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 덕에 거장 반열에 섰다. 겨우 24살 때였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피에타(일부 확대) [wikimedia]

"가만히 뒀더니, 저따위 소문을 진짜로 믿는 거야…?"

미켈란젤로는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에는 그저 피에타 상 칭송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악마가 빚었다는 말에 이어 천사가 내려와 만들었다, 천재 조각가 도나텔로의 옛 작품이 솟아났다는 식의 소문이 소문을 낳았다. 심지어 로마 또는 롬바르디아(Lombardia) 출신 조각가가 빚었다는 자존심 상하는 말도 돌았다. 미켈란젤로는 결심했다. 한밤중 피에타 상에 몰래 접근했다. "나라고. 내가 만든 조각상이라고!" 그는 중얼대며 성모 마리아가 두른 끈에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제작(MICHEL. A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이라는 글을 새겨넣었다.

미켈란젤로는 그러고서 유유히 퇴장했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저벅저벅 움직였다. 달빛이 그를 비췄다. 하늘을 보니 별이 쏟아지는 듯했다. 고요한 새벽은 취할 듯 황홀했다. 오. 미켈란젤로는 걸음을 멈췄다. 신께서는 이 아름다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어디 하나 이름을 새기지 않았구나. 나는 고작 하찮은 조각을 만들고 거만하게 이름을 새겼구나…. 미켈란젤로는 피에타 상 이후 다시는 작품에 서명을 남기지 않았다. 너무 유명해졌기에 굳이 서명을 쓸 필요가 없었다는 설도 있다.

'엉망' 대리석서 다비드 구출하다

미켈란젤로는 곧 이어 또 다른 대표작을 빚었다.

1501년, 피렌체로 돌아온 미켈란젤로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위원회로부터 다비드(다윗) 상 제작을 의뢰받았다. 그가 일을 졸랐다는 말도 있다. 물오른 미켈란젤로는 바로 작업에 나섰다. 그는 일명 '두초의 돌덩어리' 앞에 섰다. 조각가 아고스티노 안토니오 디 두초가 앞서 일을 하던 중 관두고 내버려 둔 대리석이었다. 심지어 두초가 한가운데 큰 흠집을 남겼다. 그렇기에 작업은 더 어려웠다. 미켈란젤로는 며칠간 이 돌덩이를 봤다. 이 안에 어떤 모습의 다비드가 묻혀있는지를 짚어봤다. "내가 그대를 꺼내주리다…." 미켈란젤로는 혼잣말을 했다. 준비는 다 끝났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다비드 [wikimedia]

적군의 거인 장수 골리앗에게 돌팔매질하는 소년 영웅, 다비드.

다비드가 골리앗 앞에 섰다. 옆을 똑바로 보는 자세로 서서 돌을 쥔 채 막 던지려는 모습이다. 1504년, 미켈란젤로는 3년 만에 5.17m 크기로 이 아름다운 영웅을 빚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리석에 파묻혀있던 다비드를 세상에 꺼내줬다. 이번에는 피렌체가 들썩였다. 예술가 열전의 저자 조르조 바사리는 다비드 상을 놓고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본 사람이면 그 어떤 다른 조각가의 작품도 볼 필요가 없다", "고대와 근대, 그리스와 로마의 어떤 조각상보다 뛰어나다"며 극찬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다비드(일부 확대) [wikimedia]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다비드(일부 확대) [wikimedia]

미켈란젤로는 천재성을 한껏 뽐냈다.

다비드 상 머리를 일부러 크게 만들었다. 대성당의 중앙 돔 천장 아래 끝 선에 올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서면 다비드 상 얼굴 높이는 약 50m 지점에 있다. 미켈란젤로는 맨바닥에서 올려다보면 얼굴이 잘 안 보일 것을 염려해 큰 머리로 빚은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다비드 상의 눈을 보면 눈동자가 하트 모양과 비슷하다. 이는 빛을 받으면 눈동자가 이글거리는 듯 연출되도록 표현한 것이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다비드(일부 확대) [wikimedia]

다비드 상을 본 대성당 위원회는 급하게 피렌체 시민 30인 위원회를 소집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산드로 보티첼리까지 참석했다. "이런 걸작을 대성당 부벽에 두자니 너무 아깝소." 논의 주제는 이게 전부였다. 다비드 상은 피렌체 시청 베키오 궁전 앞에 두기로 했다. 피렌체 최고의 자랑거리만이 설 수 있는 장소였다. 이후 다비드 상은 약 400년 뒤 훼손 등 염려에 따라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진다.

조각가에게 천장화를…술수에 당했다?
라파엘로 산치오, 율리우스 2세 교황

이제 미켈란젤로에게는 아폴로 신의 혼이 들어온 듯했다.

최고의 권력과 압도적 카리스마, 열 받으면 물불 안 가리고 응징하는 성질, 미켈란젤로만큼이나 꼬장꼬장한 성격…. 율리우스 2세 교황이 미켈란젤로에게 다가왔다. "예술가 양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려보게." 제안이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조각 말고 그림? 게다가 천장화?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말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조각가로 칭했다. 누군가가 그에게 화가라고 하면 역정을 냈다. 그렇기에 여태 천장화에 별 관심이 없었다. 제작 기법을 잘 모를 만큼 경험조차 없었다. "교황님. 감사한 제안이지만, 천장화라면 저보다는 라파엘로 산치오가 낫습니다." "자네한테 걸어보겠네. 천재니까 그림도 잘 그리겠지. 더는 토 달지 말게." 미켈란젤로는 기가 막혔다. 라파엘로 그 자식 이름을 팔면 되겠다고 생각했건만 씨알도 안 먹혔다. 미켈란젤로는 위기에 처했다. 괜히 라파엘로 이야기를 했다. 이제는 라파엘로, 그 건방진 놈보다 천장화를 못 그리면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교황의 별명이 전쟁광, 전사 교황, 공포의 교황이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도나토 브라만테 초상화.

대체 어떤 자식이 교황을 저렇게 구워삶았을까.

딱 한 명 짚이는 자가 있었다. 건축계 거장 도나토 브라만테였다. 둘은 상극이었다. 좋게 보면 라이벌이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정적(政敵)이었다. '조각가인 미켈란젤로가 천장화를 그리면 대망신을 당하겠지…?' 이런 계산에서 브라만테가 교황을 부추겼다는 말이 있다. 더 구체적인 설도 있다. 당시 브라만테는 시스티나 성당 개축 일을 도맡았다. 어느 날, 난데없이 성당 천장이 쩍 갈라졌다. 사색이 된 브라만테는 얼른 은하수 그림으로 가려놨다. 그러나 슬프게도 교황이 눈치채고 만다. 당연히 브라만테를 쥐잡듯 잡을 기세였다. "교, 교황님! 미켈란젤로라면 저기에도 기가 막힌 천장화를 그릴 수 있을 것이옵니다." 내몰린 브라만테가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미켈란젤로를 말했다는 이야기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wikimedia]

일을 맡긴 교황은 미켈란젤로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미켈란젤로 또한 그런 교황에게 지지 않고 반항했다. 교황은 성깔 있는 미켈란젤로에게 막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미켈란젤로 또한 다혈질의 교황에게 대들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둘의 관계는 미묘했다. 사이가 좋을 때는 친형제 같았다. 사이가 나쁠 때는 철천지원수였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일부) [wikimedia]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일부·즈카르야의 모습) [wikimedia]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일부) [wikimedia]

1512년 천장화가 모습을 보인 그날, 미켈란젤로는 12과업을 끝낸 헤라클레스 같았다.

모두가 미켈란젤로를 인정했다. 그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미켈란젤로는 환호 속에서 남몰래 웃었다. 그는 천장화의 한쪽을 흘깃 쳐다봤다.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면 당시 교황 얼굴을 본떠 그린 예언자 즈카르야가 있다. 그는 긴 흰 수염을 늘어뜨린 채 책을 읽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즈카르야 뒤에 천사를 둘 그렸다. 그중 한 천사는 검지 손가락을 말고 있다. 이는 그 시절 손가락 욕이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어린 시절 미켈란젤로 모습이 이 천사와 닮은 듯도 하다. 미켈란젤로의 '이스터에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교황은 입이 귀에 걸릴 듯했다. 누구든 만나면 저 그림 내가 시켜서 그렸다고 자랑했다. 그 예술가 녀석에게 다른 굵직한 의뢰도 맡기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정작 교황은 이 불세출의 작품을 두고두고 즐기지 못했다. 교황은 천장화가 공개된 뒤 4개월 후 영영 눈을 감았다.

"뒷골목 그림" 모욕 기억하고서…보복했다
피옴보, 클레멘스 7세

신은 미켈란젤로를 놓아주지 않았다.

웬만한 천재 예술가가 평생에 걸쳐 만들 작품을 수차례 찍어냈는데도 풀어줄 뜻이 없었다. 1533년,미켈란젤로는 클레멘스 7세 교황에게 시스티나 성당 내 벽화 작업을 의뢰받았다. 당시 교황은 로마 황제 카를 5세에게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카를 5세가 고용한 란츠크네히트 용병단이 로마를 약탈한 일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독일 지역에 기반을 둔 신성로마제국 황제였지만, 명색이 로마 황제가 거느린 군대가 로마를 불바다로 만든 일이었다. 이는 훗날 사코 디 로마(sacco di Roma·로마 대약탈)로 기록된다. 교황은 '끝내 진짜 의인은 거둬들여지고, 가짜 의인은 내쫓길 것'이라는 주제의 벽화를 그려주길 바랐다. 미켈란젤로는 비교적 순순히 수락했다. 그 또한 로마 대약탈을 못마땅히 본 듯하다.

영화 미켈란젤로(2021·엠마누엘레임부치 감독) 예고편 캡처

작업은 6년이 넘게 걸렸다.

미켈란젤로의 작업은 1534년, 교황이 세상을 떠나 잠깐 멈췄다. 이듬해 바오로 3세 교황이 재지시를 했고, 이 덕에 1541년에야 끝마칠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이번에도 혼이 나간 사람처럼 매달렸다. 그런 그가 6년에 걸쳐 그린 벽화였다. 대작이 아닐 수 없었다. 미켈란젤로는 그사이 폭삭 늙었다. 그는 어느새 60대를 훌쩍 넘겼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 심판 [wikimedia]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 심판(일부) [wikimedia]

미켈란젤로는 이 벽화에 391명의 누드 인물상을 그렸다.

예수가 심판자로서 한가운데 등장한다. 예수 곁에는 성모 마리아가 앉아있다. 두 사람 주위에는 성자들이 모여있다. 그 주변에 있는 '진짜 의인'들은 천상으로 올라가고, '가짜 의인'들은 지옥으로 떨어진다. 특히, 최후의 심판 끝에 지옥으로 가는 이들은 저마다 모습으로 두려움을 내보인다. 뒤틀린 채 내지르는 신음과 비명이 들리는 듯 생생하다. 천사도, 악마도 이들을 혐오하는 듯하다. 로마 황제 이름을 내걸고 로마를 약탈한 놈들은 지옥에나 가라. 미켈란젤로가 벽화 '최후의 심판'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었다. 교황은 미켈란젤로를 '교황청 최고의 건축가, 화가, 조각가'로 칭하며 예우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 심판(일부) [wikimedia]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 심판(일부) [wikimedia]

그 사이 우여곡절은 있었다.

작업 중인 미켈란젤로는 온갖 조롱을 받았다. 수많은 성직자가 "저자가 그리는 나체화는 성당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항의했다. 급기야 교황의 의전담당관 비아지오 다 체세나 추기경은 "뒷골목에서나 어울릴 법한 그림"이라고 대놓고 비난했다. 꼬장꼬장한 미켈란젤로는 그 말을 잊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체세나 추기경을 그림에 손수 담았다. 오른쪽 밑에 있는 지옥의 수문장 미누스로 표현했다. 당나귀 귀는 무지함을 뜻한다. 성기를 물고 있는 뱀은 성적 방종을 의미한다. 미켈란젤로는 이 악물고 체세나 추기경에게 모욕을 줬다. 이는 영원히 남을 복수였다. "그래도 그렇지, 저건 너무 심한 행동 아닙니까!" 체세나 추기경이 교황에게 탄원했다. "추기경님이 연옥에만 계셨어도 제가 어떻게 했을 텐데, 지옥에 계셔서 저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교황은 묵살했다. 그 인간 성질을 몰랐느냐, 괜히 나섰다가 저 또한 악마처럼 그려질 수 있다는 둥 핑계를 댔다는 말도 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 심판(일부·화면 가장 오른쪽에 비아지오 다 체세나 추기경을 모델로 한 지옥의 수문장 미누스가 있다.) [wikimedia]

교황은 미켈란젤로의 그림에서 성스러움마저 느꼈다.

"하느님, 심판의 날에 저의 죄를 묻지 말아 주소서." 교황은 벽화를 본 첫날, 바닥에 앉아 두 손을 모았다고 한다. 이 그림은 그 시절 파격적 누드화였으나 신성한 그림으로 인정받는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훗날, 1564년에 로마 전례(Ritus Romanus)가 '나체화는 허용하지 않는다'고 재정립돼 검열을 받게 된다. 그때 미켈란젤로의 제자 다니엘레 다 볼테라가 그림 속 인물에 대고 옷을 그리게 된다.

조각·그림 이어 건축까지…그는 천재였다

1546년, 미켈란젤로는 난생처음 할 일이 없었다.

큰일을 벌일 뜻도 없었다. 이제야말로 은퇴한 노인의 삶을 보낼 생각이었다. 나이는 71살이었다.

하지만 신은 그를 잊지 않고 또 찾았다.

이번에는 조각도, 회화도 아닌 건축이었다.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을 도맡길 바랐다. 세상을 뜬 안토니오 다 상갈로에 이어 현장을 지휘하길 원했다. 미켈란젤로는 마지못해 끄덕였다. 그가 봐도 자기 말고는 이 일을 할 사람이 없었다. 브라만테, 라파엘로, 발다사레 페루치 등 감각 좀 있다는 장인들은 이미 다 죽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구상한 성 베드로 대성당의 내부를 보여주는 종단면(1569년 출판)

미켈란젤로는 이제 천재성에 노련함까지 갖췄다.

그는 브라만테부터 상갈로 등 그간 거쳐 간 모든 건축가의 문서를 살펴봤다. 브라만테가 지독히도 미웠지만, 그의 초안이 가장 뛰어남을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삼았다. 짧은 동선, 깔끔한 기둥 구조, 돔이 잘 보이는 배치 등 각 건축가가 가장 잘한 구상만 쏙쏙 빼냈다. 그렇게 새로운 설계안을 만들었다. "당신들이 할 일? 공사비나 도둑맞지 마쇼." 미켈란젤로는 공사에 참견하고 싶어하는 건축 위원회 인사들에게 일갈했다. 모욕감을 느낀 이들은 "미켈란젤로가 기어코 노망났다"며 호소했지만, 교황은 되레 "전권은 미켈란젤로가 갖는다"고 못 박았다. 미켈란젤로는 대성당의 상징인 돔을 직접 설계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돔이 있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꼭대기에 올라가는 등 노익장을 과시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자코모 델라 포르타, Dome of the Clementine Chapel in Saint Peter 's Basilica [wikimedia]

여러 건축가를 맞아 변질한 설계안은 미켈란젤로 손에서 다시 간결해졌다.

이후에도 약간씩 바뀌기는 했지만, 이제 뼈대는 미켈란젤로의 최종 정리안이었다. 그의 마지막 '봉사'였다. 1564년, 신은 이제야 미켈란젤로를 놓아주었다. "나는 곧 죽을 때가 됐어. 이제야말로 예술 속에서 태초의 울림을 연주할 수 있거든." 이쯤 미켈란젤로는 그 낌새를 눈치챈 듯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 이제 좀 쉬라는 말에는 "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어(Ancora Imparo·이탈리아어)"라며 응수했다고 한다. 그해 2월, 미켈란젤로는 사망했다. 대성당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독신으로 89살 생일을 앞둔 때였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Tityus

그쯤 장대비가 내렸다.

누군가는 미켈란젤로가 그 빗속으로 흐릿하게 걸어가는 걸 봤다며 슬퍼했다. 신이 더 잔인했다면 미켈란젤로를 한 세기 넘게 거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신조차도 이치를 어길 수 없어 마지못해 하늘로 보냈다는 말도 함께 돌았다. "영혼은 신에게, 육신은 대지로 보내고…. 나는 그리운 피렌체로 죽어서나마 돌아가고 싶다." 미켈란젤로가 힘겹게 남긴 유언이었다.

다니엘 리차아렐리,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초상

로마에 묻힌 미켈란젤로의 시신은 곧 피렌체로 옮겨졌다.

피렌체 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이날 범상치 않은 일이 또 벌어졌다. 후배 예술가들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관을 열었다. 사후 20여일이 지난 후였다. 그런데, 마치 신이 보듬고 있었던 듯 그의 시신은 전혀 상하지 않았다고 한다. 몇 시간 전에 죽은 듯 깨끗한 그 모습에 다들 무너져 울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졌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는 것만이, 진실로 내가 원하는 것이라오. 그러니 제발 깨우지 말아다오. 목소리를 낮춰다오." 이제는 부디 내 잠을 방해하지 말라…. 죽은 이후에도 자신을 찾는 이가 수백년간 나올 것을 예측하고서 한 부탁이었을까.

〈참고 자료〉

I Michelangelo(아이 미켈란젤로), 제오르자 일레츠코, 예경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조반니 파피니, 글항아리

르네상스 미술가평전, 조르조 바사리, 한길사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읽는 순서〉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 신고전주의 선구자 (2022.10.15.)

8)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9)“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10)“관상가 양반 아니었어?” 조선의 ‘얼굴’, 몰랐던 사실[후암동 미술관-윤두서 편] - 사실주의 특별 편 (2022. 11. 19.)

11)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2)“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3)‘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4)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5)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6)‘생각하는 사람’ 진짜 정체, 남모를 사정도 있었다[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로댕 편] - 근대 조각 선구자 (2022. 10. 22.)

17)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8)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9)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20)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1)“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2)스파게티 면발? 1315억에 팔린 그림, 충격적 이유[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액션페인팅 선구자 (2022. 10. 29.)

23)몸 좋은 보디빌더, 거대 막대사탕 들고 ‘의문의 포즈’[후암동 미술관-리처드 해밀턴 편] - 팝아트 선구자 (2022.11.12.)

24)“동양서 ‘테러리스트’가 왔다” 피아노 다 때려부쉈다[후암동 미술관-백남준 편] - 비디오 아트 선구자 (2022.11.26.)

〈후암동 미술관 인물 편 읽는 순서〉

1)“이런 나체화는 뒷골목에 내걸어!” 꼬장한 천재 모욕한 자 최후는[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편] - 신의 예술가 (2023. 4. 7.)

2)“성폭행 피해자는 나야!” 고문도 견딘 그녀…복수는 우아했다[후암동 미술관-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편] - 영원한 복수자 (2023. 1. 28.)

3)“예쁜 내 금발 공주님”…‘딸바보’ 국왕 눈에선 꿀이 뚝뚝[후암동 미술관-디에고 벨라스케스 편] - 고결한 관찰자 (2023. 2. 24.)

4)“아내·자식·명예 다 잃었다”…그런데 왜 ‘빵’ 터지셨어요[후암동 미술관-렘브란트 편] - 빛의 마술사 (2023. 1. 7.)

5)‘이 그림’ 때문에 화형당할뻔…어느 야심가의 기구한 삶[후암동 미술관-프란시스코 고야 편] - 흑화한 사상가 (2023. 2. 4.)

6)“날 잊지마오” 가시덤불 ‘감옥’ 8년 갇혔다…그림에 펑펑 울었다[후암동 미술관-추사 김정희 편] - 조선의 품격 (2023. 3. 11.)

7)“6년 약혼女두고 바람…죽자 묘지까지 파헤쳤다” 이 남자, 변명 들어보니[후암동 미술관-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편] - 위험한 사랑꾼 (2023. 3. 18.)

8)“죄송해요, 엄마가 너무 싫어요” 효자 아니었어?…이 화가의 ‘반전’[후암동 미술관-제임스 휘슬러 편] - 모던한 이방인 (2023. 3. 4.)

9)“14살 소녀 이따위로 만들었어?” 평생 먹을 욕 다 먹었다[후암동 미술관-에드가 드가 편] - 무희의 화가 (2023. 3. 25.)

10)‘미녀 그리기’에 진심이었던 이 화가, 진짜 이유[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르누아르 편] - 행복을 그린 화가 (2022. 12. 24.)

11)“고갱 그놈, 도대체 왜 그래?” 악마인지 ‘악마의 재능’인지[후암동 미술관-폴 고갱 편] - 고귀한 야만인 (2022. 12. 3.)

12)“나랑 6년 계약해” 유명 女배우의 파격제안…인생 달라졌다[후암동 미술관-알폰스 무하 편] -체코의 긍지 (2023. 2. 18.)

13)“백번은 넘게 봤겠다” 모두 아는 ‘이 절규’의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에드바르 뭉크 편] - 노르웨이의 현자 (2022. 12. 31.)

14)“이놈의 짧은 다리 때문에” 카바레 스타의 영광과 몰락[후암동 미술관-툴루즈 로트레크 편] - 작은 거인 (2022. 12. 17.)

15)“로댕 아이를 뱄다” 폭탄선언 여성, 30년 수용소에 갇혔다[후암동 미술관-카미유 클로델 편] - 천재와 맞선 천재 (2022. 11. 5.)

16)눈동자 없는 기괴한 여자 그림, 알고 보니[후암동 미술관-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편] - 파리의 귀공자 (2022. 12. 10.)

17)숨참고 키스 다이브!…아내가 그렇게 좋으셨어요[후암동 미술관-마르크 샤갈 편] - 순수한 방랑자 (2023. 2. 11.)

18)“당신은 저질 누드화가야!” 격분한 판사, 면전서 그림 불태웠다[후암동 미술관-에곤 실레 편] - 영원한 아이 (2023. 4. 1.)

19)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진짜’ 괴짜 (2022. 9. 3.)

20)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피·마 대전 (2022. 9. 10.)

21)3번 유산·35번 수술의 악몽…그럼에도, 인생이여 만세[후암동 미술관-프리다 칼로 편] - 고통의 여왕 (2023. 1. 14.)

22)“내 천사여” 편지 사방팔방에 ‘뽀뽀’…한 무연고자의 죽음[후암동 미술관-이중섭 편] - 아고리, 나의 아고리 (2023. 1. 21.)

23)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우아한 전사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읽는 순서〉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

yul@heraldcorp.com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