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로 돌아온 박해수…“연극, 지루하고 재미없지만 고민하게 해”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5년 만에 연극 복귀한 박해수
어쩌면 악마는 몹시 매력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파우스트 박사와 영혼을 거래한 메피스토도 카리스마 넘치는 마에스트로 같은 모습으로 파우스트의 욕망을 떡 주무르듯 지휘한 것 아닐까. 지금 양정웅 연출의 연극 ‘파우스트’가 그리고 있는 메피스토가 딱 그렇다. LG아트센터 서울이 황정민 주연의 ‘리처드3세’ ‘오이디푸스’ 등 대작을 만들어 온 샘컴퍼니와 공동제작한 신작으로, 지난달 31일 막을 올렸다. 무려 1335석 대극장에서 한달간 공연되는데도 객석점유율 95%, 연극분야 예매율 1위를 기록 중이다.
“죽을 만큼 떨렸어요. 관객을 보면 더 떨릴 테니 상대 배우만 쳐다보려고 했는데, 막상 관객을 만나니 좀 풀어지더군요. 첫 공연 끝나고 박수쳐 주는 관객들 보면서 너무 감사했죠. 연극계가 코로나로 힘든 시기도 겪고 객석 띄어앉기를 할 때도 있었는데, 이렇게 많이 찾아와 주신 게 기적같이 느껴졌습니다.”
사실 그가 연극판 출신이란 걸 모르는 팬도 많다. 2019년 결혼한 아내도 그의 공연을 한 번도 본 적 없단다. 그로선 굳이 돌아오지 않아도 넷플릭스의 열매가 더 달콤할 수 있다. 하지만 메피스토 도전은 거부할 수 없는 로망이었다. 지난해 LG아트센터와 양정웅 연출의 제안에 준비기간부터 스케줄을 통째로 비워놓을 정도로 ‘메피스토에 진심’이었다.
“무대가 더 어려운 점이 분명히 있어요. 온전히 몸 하나로 서 있어야 하는 두려움이죠. 그래서 도전의식이 생기는 것 같아요. 배우로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을 하고 싶기도 했죠.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해진 세상이잖아요. 악한 인간이 정말 많고, 악이 악으로 비쳐지지 않는 세상인데, ‘파우스트’ 대본이 참 묘해요. 고전이고 문어체지만, 메피스토 대사만큼은 잘 와 닿거든요. 사람들 속으로 가라, 그 안에서 싹트는 탐욕이든 쾌락이든 다 즐겨보라고 유혹하죠. 악의 시초는 거기 있는데, 우리가 망각하고 살고 있다는 이야기예요.”
노년의 파우스트 역을 맡은 유인촌은 과거 메피스토를 연기한 적 있지만,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박해수를 후배로서가 아니라 철저히 동료로 대했기 때문이다. “메피스토 대사가 파우스트와 많이 연결되어 있고, 당신이 하실 땐 파우스트 내면의 양면성으로 생각했다는 말씀만 해 주셨어요. 처음엔 유인촌 선생님이 너무 충격이었죠. 아버지뻘인데도 끊임없는 에너지로 폭포수 대사를 입도 안 마르시고 쏟아내시니까요. 저도 그런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250년 된 대본으로 만들었지만, 대형 LED 스크린에 언리얼엔진으로 구현한 영상까지 활용한 무대는 몹시 현대적이다. “앞으로 200년 후 미래를 보여줄 수 있도록 만든 작품”이라는 유인촌의 말처럼, ‘인간의 욕망은 끝을 모른다’는 괴테의 명제는 결코 낡지 않는 것 같다. 인간이 다 내려놓고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를 외치는 순간이 과연 오기나 할까.
“우리 공연은 1부에서 끝나지만 원래 2부에서 더 방대한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제 생각에 괴테 선생이 60년 동안 쓰면서 ‘멈추어라’를 언제 해야 할지 몰랐던 것 같아요.(웃음) 젊을 때는 멋모르고 썼다가, 세월이 갈수록 인간의 욕망은 이 정도로 안 되는구나 하면서 60년 동안 쓰시지 않았을까요. 파우스트의 욕망이 끝없이 멈추지 않고 가는 걸 보여주고자 방대한 2부가 나온 것 같아요.”
과묵한 킬러 류의 험악한 액션 연기를 많이 보여줬지만, 박해수는 결이 곱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대화 중에 결코 포장 없이 속내를 그대로 털어놓는 진실함도 물씬 풍겼다. 고교시절 연극반에 들어간 것도 ‘배우의 꿈’을 품어서가 아니란다. “방황하던 시절 현실을 탈피하는 목적이었죠. 연극반이 좀 자유로울 것 같아서요. 그러다 대학에 가서 고전을 만나면서 재미를 느꼈어요. 자극적인 재미보다 연극이 주는 느낌이 있잖아요. 선배들 공연 보면서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는데, 저게 뭔데 저렇게까지 고민하게 만들지 싶고. 그런 식으로 접근하게 됐어요.”
소극장에서 관객 딱 한 명 놓고 연기한 적도 있다고 고백하는데, 사실 참 아이러니하다. 공연계 위기였던 코로나 시국에 연극계 간판이었던 그가 ‘넷플릭스 공무원’으로 뜨다니. 물론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기적은 아니다.
“예전에 매체 적응이 힘들어서 진선규 선배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거든요. ‘범죄도시’ 나오기 전이라 선배도 무명일 땐데, 선배가 그러더군요. 공연할 때도 5년 이상 힘들지 않았냐, 그만큼은 좀 버텨봐야 하는 것 아니냐. 나도 한번 해 볼테니 같이 가 보자고요. 그런데 가장 힘든 코로나 시기에 넷플릭스라는 배를 타고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 게 너무 신기하고 그 이유는 아직 모르겠어요. 다만 좋은 인지도를 갖고 있으면, 공연 쪽에도 어느 순간 선한 영향력을 끼칠 때가 오지 않을까요.”
인간은 지향하는 한 방황한다. ‘파우스트’를 관통하는 주제다. 방황한다는 건 갈 곳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대로 다시 돌아온 지금, 그는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요즘엔 관계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요. 예전엔 혼자 과열돼 있었다면, 지금은 주변 배우와 관계성을 맺는 게 진짜 연기 아닌가 싶어요. 연기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배우들과 대화 속에서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 같아요. 이번에 동료를 많이 얻었습니다. 한 장면 만들어 주기 위해 발톱 깨져가면서 뛰어다니는 앙상블 형, 누님들이 저보다 훨씬 잘하는 분들이거든요. 그들에게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어요.”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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