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귀걸이 소녀’ 패러디 최고 인기작은 한국 ‘옥수수’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2023. 4. 8.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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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페르메이르의 재발굴·재창조
페르메이르(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왼쪽)과 한국 작가 나난의 '진주 귀걸이를 한 옥수수'(오른쪽) [구글 아트 프로젝트, 작가 제공]

지금 전세계에서 가장 핫한 미술관 전시를 뽑으라면 단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라익스뮤지엄(국립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베르메르)의 회고전이다. 전시 폐막일인 6월 4일까지 모든 시간대의 티켓이 깡그리 매진된 상태. 원래 다작인 화가가 아니었던 데다가 사후 200년 동안 잊혀지다시피 해서 확인된 현존 작품은 34-36점에 불과하며 세계 주요 미술관에 흩어져 있다. 그 중 28점이 한 자리에 모인다니, 라익스뮤지엄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시”라고 선전하는 게 큰 과장은 아닌 것이다.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이하 ‘소녀’)는 워낙 귀한 몸이라 폐막일 훨씬 전인 지난 1일에 원 소장처인 네덜란드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으로 돌아왔다. 미술관은 ‘소녀의 외출과 귀가’를 기념해서 패러디와 오마주 작품을 일반 대중을 상대로 공모했었고, 3500여 점에 달하는 응모작 중에 5점을 골라 전시실에 걸었다. 그중 한 작품은 인공지능(AI) 이미지 생성기 미드저니로 만들어진 것이라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인에게 더 흥미롭고 반가울 작품은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이 공모를 하면서 본보기로 웹사이트에 올린 사진작품 ‘진주 귀걸이를 한 옥수수’(이하 ‘옥수수’)일 것이다. 한국 작가가 ‘친구가 간식거리로 보내준 괴산 찰옥수수’를 가지고 만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가 나난(본명 강민정)은 꽃을 그려 오려낸 컷아웃을 관람객이 골라 꽃병에 꽂거나 꽃다발을 만들 수 있도록 한 작품 ‘롱롱타임플라워’ 연작으로 패션을 비롯한 디자인 업계에서 유명한 작가다.

‘관종’과는 거리 멀었던 페르메이르

나난 작가가 2019년에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옥수수’ 사진을 올리자 전세계에서 수천 개의 ‘좋아요’가 쏟아지며 영국 사치갤러리 등 주요 미술 계정들이 이 사진을 공유했다.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도 공식 계정에 이 사진을 공유하고 작가에게 미술관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에 쓰겠다면서 사진 포스터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한국 작가 나난의 '진주 귀걸이를 한 옥수수'(2019). [작가 제공]

작가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작업은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와 관련 있는 경우가 많다. ‘롱롱타임 플라워’도 친구를 위한 선물에서 시작되었고, 사람들이 그 연작을 많이 좋아해주는 이유도 각자 나름의 꽃다발을 만들어서 선물하기에 좋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선물 주기는 일종의 예술 행위다. ‘옥수수’도 친구가 선물로 준 옥수수가 고마워서 그 옥수수로 뭔가를 창작한 이미지를 선물하고 싶어서 시작된 것이다. 뭘 만들까 하다가 옥수수 수염을 보며 원래 좋아하는 페르메이르의 ‘소녀’가 두른 터번을 떠올렸다.”

세계적으로 ‘소녀’의 패러디가 무수히 많은데 (코카콜라 광고 최신 버전에도 나왔다), 나난의 작품이 원작을 소장한 미술관을 비롯해 수많은 세계인에게 특히 인기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일상에서 보는 채소를 억지로 변형시키지 않고 최소한의 손길만 더해서 절묘하게 명화의 분위기를 낸 그 재치와 유머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이 친구와의 선물 교환에서 탄생했다는, 즉 일상을 따스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행위에서 탄생했다는 배경이 작품에 매력을 더한다. 그 매력은 심지어 페르메이르의 작품세계와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베르메르)의 '우유 따르는 여인' (1660년경) [구글 아트 프로젝트]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베르메르)의 '열린 창 앞에서 편지를 읽는 여인' (1657-9) [드레스덴 미술관]

페르메이르는 주로 정적인 실내에서 사람들이 일상의 소소한 행위, 이를테면 우유를 따르고, 편지를 읽고, 악기를 연주하는 등의 일을 하는 장면을 섬세하게 포착한 그림들로 이름 높다. 그는 네덜란드가 유럽 교역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리던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Dutch Golden Age)’에 델프트 시(市)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 네덜란드는 경제사에서뿐만 아니라 미술사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교역으로 부를 쌓은 상인들이 신흥 컬렉터로 부상하면서 대중 미술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 화가들은 주로 가톨릭 교회와 귀족들로부터 주문을 받아 성화, 신화화, 초상화를 그렸다. 반면, 17세기 네덜란드에 등장한 신흥 부자들은 그런 장려한 그림들보다 집을 장식할 풍경화, 정물화, 풍속화를 더 원했고 이런 그림들을 미리 그려놓고 파는 화가들이 등장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베르메르)의 '음악 수업'(1662-5) [구글 아트 프로젝트]

그들 중에서 페르메이르는 별로 유명한 화가는 못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시시한 화가로 천대 받는 신세였던 것도 아니다. 델프트의 명예로운 화가 길드에 소속되어 있었고 그림도 꽤 비싼 값에 팔렸다. 다만, 그의 동시대 화가들이 다작을 하며 자신의 시장을 네덜란드 전역은 물론 해외로까지 넓히는 데 열심이었던 반면에, 페르메이르는 델프트 시에서 소수의 작품만을 창작해 소수의 후원자들에게만 파는 것에 만족했다. 그가 조용한 성품에 ‘관종’과는 거리가 먼 타입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저, 가업인 미술품 거래와 여관 사업을 물려받아서 하다가 화가로 전업했고, 아내와의 사이에 무려 11명의 자녀를 두었고 처가가 부유한 덕분에 작품을 대량생산하지 않아도 되었으나 말년에는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 고생하다가 43살의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베르메르)의 '델프트 풍경'(1660-1) [위키피디어]

단순해서 강렬한 ‘진주 귀걸이 소녀’

그가 잊혀진 채 200년 세월이 흐른 19세기 중반, 한 프랑스인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테오필 토레-브루거. 프랑스 2월 혁명과 사실주의 미술을 열렬히 옹호하는 정치적 급진주의자로서 정부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 해외를 떠도는 언론인이었다. 그는 네덜란드의 한 미술관에서 우연히 페르메이르의 그림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어떻게 이런 무명 화가의 작은 화폭에 이렇게 사실적인 공간감과 치밀한 디테일이 담겨 있을까!’ 그리고는 페르메이르의 그림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지갑이 허락하는 한도까지 사들였다.

마침내 1866년, 토레-브루거는 파리에서 페르메이르의 작품 11점을 선보일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작품을 당대 주요 예술평론지에 소개하면서 페르메이르야말로 “네덜란드 화파에서 가장 미묘하고 심오한 화가”라고 선언했다. 그 이후로 점차 페르메이르에 대한 미술계의 관심이 높아져 가면서 작품 탐색과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베르메르) 작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1665년경) [구글 아트 프로젝트]

페르메이르 작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단순하고도 강렬한 구도와 빛의 묘사가 탁월하다. 특히 부드럽게 빛나는 진주 귀걸이와 어두운 배경이 이어지는 부분이 그렇다. 게다가 이 그림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미스터리함을 지니고 있다. 소녀의 정체도 수수께끼이고, 소녀의 표정 또한 미소가 감도는 신비로운 표정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림의 의미에 대한 많은 추측과 해석이 이어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소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이 책을 바탕으로 한 동명의 2003년 영화다.

영화에서는 ‘소녀’의 모델이 페르메이르(콜린 퍼스)의 집에 하녀로 들어온 그리트(스칼렛 조핸슨)이며, 두 사람은 서로 통하는 뛰어난 예술 감각을 바탕으로 서로에 대한 미묘한 감정을 키우지만 결국 ‘소녀’ 그림을 탄생시킨 후 헤어진다는 설정이다. 피터 웨버가 감독한 이 영화는 마치 페르메이르 그림들을 살아 움직이게 한 것 같은 절묘한 명암의 영상으로 칭송을 받았다.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2003)의 한 장면. 스칼렛 조핸슨과 콜린 퍼스. [사진 파테]

미술사학자들은 ‘소녀’ 그림이 특정한 누군가의 초상화가 아닌 ‘트로니(Tronie)’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트로니는 어떤 카테고리에 속하는 인물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린 것으로서, 이를테면 ‘노인,’ ‘군인,’ ‘동방인’ 등의 트로니가 있다. 마치 옛 한국의 ‘미인도’가 특정한 누군가의 초상화가 아니라 전형적인 미인을 그린 것처럼 말이다. ‘소녀’는 당시 동양풍의 유행에 따라 이국적인 터번을 두른 아름다운 여성의 트로니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럼에도 그 단순한 구도와 절묘한 명암과 신비로운 표정 때문에 이 그림은 여전히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상적인 존재이지만 상상력을 자극하는 약간의 신비를 품고 있는 것.’ 이것은 페르메이르의 다른 작품들, 특히 실내 풍경들까지 관통하는 매력이다. 그의 그림은 거창한 신화나 역사가 아니라 개인의 소소한 일상을 다룬다. 하지만 설명적인 표현을 절제하고 미묘한 빛의 효과를 살려 그 평범한 일상이 시적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지니게 한다. 이것이 우리 현대인까지 매혹하는 포인트가 아닐까.

문소영 문화전문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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