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복순 모녀의 비밀 [터치! 코리아]
동서고금 초월한 부모의 진리 “너희만 행복하면 굴욕도 참아”
“엄마 없인 못 살지만 엄마랑은 못 산다”는, 인터넷에 떠도는 글을 보고 명언이라고 무릎을 치며 웃은 적 있다. 엄마랑은 못 산다고 손사래 치는 자식 입장을 충분히 안다. 물론 자식 쪽에서만 힘든 게 아니다. 성년이 되기 전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들 또한 이런 말에 ‘난들 너랑 사는 게 쉬울까’라고 할 것이다.
영화 ‘길복순’에는 마주칠 때마다 충돌하느라 힘든 사춘기 딸과 엄마가 등장한다. 이 엄마와 딸에게는 서로 털어놓을 수 없는 심각한 비밀까지 있어서 공존의 괴로움은 더욱 깊어진다.
엄마 길복순(전도연분)의 비밀은 비싼 사립학교에 딸을 보내는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 “돈 자랑, 자식 자랑 하는 극성스러운 엄마”들의 우아한 자모회 회원인 그녀가 사실은 살인 청부업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업종이 청부 살인이라는 디테일만 빼면 길복순이 사는 세상은 여느 직장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곳에는 일찍이 그녀를 발탁하여 모든 것을 전수해 준 보스(설경구분)가 있고 조직 안의 서열과 최고 권력자의 신임을 두고 암투를 벌이는 경쟁자(이솜분)가 있다. 조기 은퇴를 하고 편히 쉬고 싶다는 조바심이 있고 자신을 키워준 조직을 쉽게 떠날 수 없다는 의리가 있다. “힘 있는 사람들을 더 힘 있게 만드는 세상 규칙”을 들이대며 지키라고 강요하는 대기업도 있다.
눈 하나 깜짝 않고 사람을 죽이는 프로페셔널 킬러라는 정체를 딸이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길복순처럼, 대부분의 부모에게는 집 밖 일상을 자녀가 굳이 모르는 편이 좋다. 직장에서 날마다 생기는 더럽고 치사한 일들을 괴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처럼 참고 참고 또 참는 세세한 사정은 자식이 모르는 편이 낫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푸념이 가끔 튀어나올지언정 자신의 몫인 밥벌이의 지겨운 사정을 자식이 속속들이 알기 원하지 않는다.
엄마 길복순의 비밀이 먹고사니즘의 숙명적 고통에 관한 것이라면 딸 길재영의 비밀은 태생적이고 존재론적인 비밀이다. 결이 다른 두 비밀을 엄마와 딸이 각자 움켜쥔 채,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겨 감추려는 의지와 꼬리가 길면 잡힐 수밖에 없는 행적이 맞물려 영화의 서사적 긴장이 팽팽해진다. 엄마는 딸에게 “상대의 약점을 발견하면 살려달라는 소리 나올 때까지 물어뜯어야 한다”는, 몸으로 터득한 생존법을 전수하고 싶어 한다. 딸은 “세상은 원래 불공정한 거”라는 꼰대식 합리화를 들이미는 엄마를 “그러지 말고 자식에게 정당한 경쟁을 하라고 가르치라”며 오히려 훈계한다.
영화 결말에서 딸은 자신을 속박하던 비밀에서 자유로워지지만 엄마에겐 그런 해피 엔딩이 허락되지 않는다. 길복순이 할 수 있는 건, 엄마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모른 척해 주는 딸에게 “너는 아무 잘못 한 것 없으니 부끄러워 말라”고 응원하는 것뿐이다. 자신은 갈 수 없는 밝은 세상으로 딸을 등 떠밀어 보내는 것뿐이다.
남들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면 극혐”할 거라는 두려움을 떨치고 거짓말의 세상을 부수고 나와 환한 미소를 짓는 딸과는 대조적으로 끝내 어둡고 음침한 비밀 속에 자신을 감추는 길복순을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너의 타고난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며 살라는, 자식에게 빌어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을 줄 수 있다면, 스스로는 이 모든 치욕과 가책을 감당할 수 있는 게 바로 부모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좋은 세상에서 젊은 패기를 한껏 펼치며 살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한세상 고달펐던 서러움도 눈물도 다 괜찮다는 그 마음. 동서고금을 초월해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강력하게 이 세상이 더 나아지도록 등 떠밀어 온 힘의 비밀을 마주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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