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호구라고?...‘가난하고 뚱뚱’ 자격지심에 돈 쓰고 있다면 [Books]

김슬기 기자(sblake@mk.co.kr) 2023. 4. 7.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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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시 오닐의 ‘셰임 머신’
[사진 출처 = 픽사베이]
혐오의 시대에는 ‘수치심’이 돈이 된다. 가난, 비만, 약물중독 같은 약점은 수치심의 근원이다. 수치심이라는 버튼이 러닝머신을 사게 하고, 코 성형수술을 권하며, 광고를 클릭하게 하고, 가짜 학위를 고민하게 한다.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게 하는 일에도 수치심이란 자극이 특효약이다.

수치심은 인류가 사바나를 무리 지어 다닐 때부터 질서 유지를 위한 도구로 사용됐다. 식량 비축이나, 근친상간 등이 주는 수치심은 사회의 생존을 위해 존재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도구가 현대인의 생존을 위협하고, 깊은 상흔을 남기는 무기가 됐을까.

바나드칼리지 수학과 교수 출신으로 헤지펀드 D.E.쇼의 퀀트(Quant·분석가)로 전직을 한 뒤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의 악마적인 본성을 고발한 책 ‘대량살상 수학무기’로 세계적인 충격을 준 캐시 오닐이 신작으로 돌아왔다. 다이어트를 강요받은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쓴 이 책은 약자 비하로 이득을 얻는 시스템을 고발한다.

셰임 머신
이 책은 돈이나 노동, 성, 투표, SNS 공유까지 우리에게서 뭔가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수치심이 동원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돈을 벌기 위해 기업부터 정부까지 많은 이들이 ‘수치심 기계’를 운영하며, 사회를 계급화하고 수치심을 판매한다.

수치심 산업은 우리 모두를 ‘패배자’로 낙인찍는다. 부유하지도 날씬하지도 똑똑하지도 성공하지도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실제로 다이어트 산업 폭주로 이들의 공략 대상은 8~17세까지로 어려졌다. 많은 소녀가 섭식 장애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

미국의 공공정책 중 다수는 빈곤층에게 게으름이라는 낙인을 찍는 방향성을 고집하고 있다. 빈곤층은 교육, 주거, 교통 환경이 열악한 곳에서 사회의 모욕을 견디며 사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이 푸드스탬프를 들고 음식을 사야 하는 구조도 가난의 수치심을 배가시킨다.

‘코르셋 권하는 사회’가 외모로 인해 모두에게 공평하게 안겨주는 수치심 문제도 심각하다. 미용과 성형산업이 팽창하면서 아름다움은 신이 내린 선물이 아닌, 노력의 대상이 됐다. 외모를 가꾸지 않는 것이 자신의 결함으로 인식되는 사회의 더 큰 문제는 젊음을 향한 열망과 노화 혐오가 가속화된다는 점이다.

게다가 저자는 빅테크 기업들로 인해 수치심 산업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고 고발한다. 페이스북과 구글은 기계학습 알고리즘을 통해 대중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최적의 값을 꾸준히 찾고 있다. 서로를 악마화하고 혐오할수록 보상해주는 모델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다.

2012년 미주리주 월마트에서 척추전방전위증을 앓는 여성 조애나 맥케이브가 전동 스쿠터에 앉아 음료를 꺼내다 넘어진 사건이 있었다. 이를 찍은 사진은 소셜미디어에서 ‘음료를 꺼내다 넘어진 뚱보 사진’으로 엄청난 공유와 조롱을 당했다.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알아서 이런 사건에 주목한다. 조롱은 수익을 높이는 도구다. 게다가 상대를 비난할 때 자기만족과 우월감도 따라온다.

단편적 이미지나 발언만으로 누군가를 낙인찍고 조리돌림하는 문화는 전지구적 규모로 확대되고 있다. 이 싸움에서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의 뇌는 분열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기업은 정치적 입장이 갈리는 사안에서 이용자를 더 정교하게 ‘분류’할 수 있어 더 효과적인 ‘맞춤형 광고’가 가능해진다. 사람들은 타인을 조롱하며 심리적 우월감을 느끼고, 기업은 더 부유해지는 마법의 사업 모델이 탄생한 셈이다.

줄리언 반스는 ‘빨간 코트를 입은 남자’에서 19세기 풍속사를 이렇게 묘사했다. “신문사 발행 부수가 줄면, 편집장 하나가 출근해 업계 사람 아무나 한 명을 헐뜯는 매서운 기사를 써낸다. 상대방이 이에 반박한다. 대중의 관심이 쏠린다. 대중은 마치 레슬링 경기장에 들어온 구경꾼처럼 이 공방을 지켜본다.” 이 익숙한 풍습은 빅테크 기업이 물려받아 더 거대하게 활용되는 중이다.

수치심의 목적은 순응을 강제하는 것이다. 너대니얼 호손의 ‘주홍 글씨’가 알려준 교훈이다. 순응을 원하는 이들은 누굴까.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덕목은 “내 타임라인은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자각이다.

수치심에서 해방되는 것은 개인의 안위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 저자는 스스로도 “수십 년간 고통받은 끝에 수치심을 떨쳐내고, 평온함과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자기혐오로 고통받는 대중들이 아니라, 권력자가 느껴야 하는 것이 수치심이다. ‘미투 운동’을 통해 성 착취자 영화계 거물 하비 와인스타인을 끌어내린 것처럼 수치심이라는 무기를 정당하게 사용해야 한다. 비난의 펀치를 아래가 아닌 위를 향해 날릴 때 공동체가 건강해질 수 있다. 분열된 사회를 치유하는 무기는 어쩌면 진실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말한다. “수치심에 맞서려면 진실이 필요하다. 수치심 머신을 정면으로 응시해야만 이를 해체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대대적인 청산 작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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