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탕물 같은 머릿속, 잠시라도 정화하고 싶을 때 ‘복용하듯’ 읽기[김소연의 논픽션 권하기]

기자 2023. 4. 7.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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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마 모랄리아
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김유동 옮김
길|347쪽|2만5000원

벚꽃이 예쁘게 피고 있는데 비가 내렸다. 밤새도록 내렸다. 여린 꽃잎들이 바닥에 수북하게 떨어져버렸다. 때이르게 꽃잎이 져버려서 아쉬웠다. 그래도 연일 산불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개한 벚꽃이 일찍 지는 것을 보는 섭섭함과 큰 불행·손실을 막을 수 있게 된 고마움의 사잇길에서, 우산을 들고 산책하다 단지 날씨로 인해 발생되는 소소한 행복감에 대해 생각했다.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읽었던, 행복한 마음에 대한 아도르노의 문장이 떠올랐다. “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것인데, 그것은 그가 행복을 불러냄으로써 행복에게 죄를 짓기 때문이다. ‘나는 행복했었다’고 말하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것이다. 의식이 행복과 갖는 유일한 관계는 ‘감사’다. 이러한 감사 속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의 품위가 들어 있다.”

아도르노는 행복한 중에는 행복함을 알 리 없다고 했다. 감사함은 오히려 가능하다는 것이다. 감사하다는 마음이 차오를 때를 행복하다고 인지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걸 구분해내자, 우산에 타닥타닥 와닿는 빗방울에 대한 생각이 더 명료해졌다. 이것은 감사함이지 행복감은 아니다. 나는 행복을 모르므로 감사가 언제나 행복으로 위장하며 나를 둘러싼 것이다.

행복한 마음이 들 때에도 세상을 둘러보다 불현듯 염치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때가 있다. 몰염치하다는 생각 때문에 행복감을 삼가게 된다. 이 세상의 너무 많은 고통들이 하루하루 배달되는 와중에, 행복감이라는 것은 일정 정도의 이기심과 일정 정도의 무지함에서 비롯된 것 같은 께름직함을 무시할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이 그럭저럭 잘 살고 있어서 행복한 편이라고 만족하는 사람도 언젠가부터는 만나본 적 없는 것 같다. 실제로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으면서도 염치 때문에 감히 행복이라는 말을 발설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 정도의 절제와 예의가 인간에게 남아 있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미니마 모랄리아>는 유대계 독일인이었던 아도르노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에 망명했던 1940년대에 집필한 책이다. 2000년에 <한 줌의 도덕>이라는 우리말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가 2005년에 <미니마 모랄리아>로 다시 출간되었다. 내가 손 닿기 쉬운 데에 놓아두는 책 몇 권 중 하나이다. 한 계절에 두어 번쯤은 꺼내어 읽어온 듯하다. 그때그때 그어놓은 밑줄도 수두룩하다. 볼펜으로 그어진 밑줄은 기름이 번진 자국마저 생겨 내 곁에 오래오래 함께한 세월의 태가 난다.

이 책에는 153편의 에세이가 수록돼 있다. 어떤 글은 짧고 어떤 글은 제법 길다. 모든 글이 냉혹하리만큼 날카롭다. 이번에는 정독을 하겠다며 책을 펼치지만 번번이 구미가 당기는 부분만을 읽고 건너뛴다. 내게는 건너뛰는 부분이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 한 페이지만을 읽더라도 충분히 만족감을 느낀다는 게 중요하다. 흙탕물 같았던 머릿속이 정수기를 거친 생수가 되듯 맑아지기 때문이다. 흙탕물인 것은 여전하겠지만 흙탕물조차 언어가 되고 나면, 흙과 물이 어느 정도는 분리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잠깐만이라도 분리를 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지경일 때에 늘 복용하듯 읽게 되는 책이다.

원한과 상처와 의심만이 연료였던 시기에 아도르노는 거의 모든 것을 뒤집어보며 생각했고 부정함으로써 출발했다. 그러나 그가 덧없다고 여기지 않은 유일한 것은 생각을 하는 것과 그것을 문장으로 적는 것이었다. 아도르노는 우리가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삶조차 기만 속에 가둬져 있다는 것이다. 삶에서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탓이라고 말한다. 삶에 대한 아도르노의 냉혹한 비관에서 아도르노가 욕망했을 삶의 내용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떤 열망은 부정하고 또 부정하는 것으로써 삶을 고귀하게 지탱하게 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미니마 모랄리아>를 읽고 있자면 생생하게 되살려낼 수 있다.

아도르노는 재능을 행복하게 승화된 분노라고 말한다. 모든 예술작품을 아직 저질러지지 않은 비행(非行)이라고 말한다. 무해한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문화란 있지도 않은 인간다운 사회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낙관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거부하고 나서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한 줌의 도덕이 될 것이라고 아도르노는 믿었다.

오늘 펼쳐보았을 때에는 마지막 단락에 적힌, 메시아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낯섦이 느껴졌다.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낯섦이다. ‘메시아’라는 단어를 접하는데 ‘종말’이라는 뜻으로 읽고 있는 것 같았다. 메시아를 상상하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일까. 이미 이 세계는 멸망으로 진입해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온 탓일까. 아도르노는 이 세계에 대한 빈틈없는 안티테제들을 문장으로 남겼으나 오늘은 유독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세계가 아도르노가 열망한 세계에 대한 고약한 안티테제인 것은 아닐까 하는.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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