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집·교육’ 욕망이 부른 비극
코인·투자 뒤엉킨 ‘납치·살인’
학원가 교육열 노린 ‘마약 음료’
노동 경시 드러난 ‘경비원 자살’
가상통화를 둘러싼 납치·살인 사건, 미성년 학생과 부모를 노린 학원가 마약 음료 사건, 아파트 경비원 갑질 사망 사건.
최근 한 달 사이 터져나와 한국 사회를 들썩거리게 한 사건들이다. 언뜻 보면 개별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찾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발생 장소를 중심에 놓고 보면 이들 사건은 서로 매우 가까운 지역에서 벌어진 사실을 알 수 있다. 사건 발생 지점을 지도 위에 표시하고, 그 점을 포함하는 큰 원을 그리면 서울 강남구 선릉로·도곡로의 교차점(한티역)을 중심으로 대치동과 역삼동을 아우르는 ‘반경 1㎞’의 원이 완성된다. | 관련기사 2면
돈과 사람이 몰려드는 곳, 비싼 집값과 높은 교육열을 자랑하는 곳, 그만큼 계층 구분이 뚜렷하며 신분 상승의 욕망이 충돌하는 일도 잦은 서울 강남, 그중에서도 이 ‘반경 1㎞’의 원 안에서 상징적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한 것이다.
강남 납치·살인 사건의 피해자 A씨가 지난달 29일 연지호(30)·황대한(36) 일당에게 납치된 곳은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아파트 앞이었다. 40대 여성인 A씨는 강남을 무대로 코인을 홍보하며 투자자를 모으는 일을 해왔다. A씨는 이번 사건 주범으로 지목된 이경우(36)를 코인 홍보 행사에서 만났고, ‘윗선’으로 의심받는 유모씨·황모씨 부부를 알게 된 것도 코인을 통해서였다. 일확천금을 목표로 한배를 탔지만, 이들의 동행은 오래가지 않았다. 2021년부터 시작된 갈등이 폭발한 곳도 강남이었다.
A씨는 이경우와 함께 다른 투자자들이 유씨 부부를 호텔에 감금하는 데 참여했다. 유씨 부부는 ‘코인 펌핑(가격 띄우기)’ 작업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당시에도 비슷한 이유로 강남 호텔에 숙박 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A씨가 남편과 함께 운영하던 코인 관련 회사도 강남구 테헤란로에 있었다. A씨는 여러 업체를 한 사무실에 등록해놓고 사업을 벌였다.
“물질·성공·가족지상주의 강남
다양한 계층 충돌…범죄 취약”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강남에서 사업을 벌일 정도로 자본과 인프라가 있다는 이미지를 줄 수 있고, 인력 충원에도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며 “투자자를 모으는 데 유리한 곳”이라고 말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강남은 계층 상승을 원하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라며 “다양한 계층의 욕망이 뒤섞여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에서 사기 등 범죄에 취약한 여건이 마련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성년자인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마약을 섞은 음료수를 나눠주고 이를 빌미로 부모를 협박했던 일당이 범죄를 실행한 곳도 강남 대치동 학원가였다.
40대 여성 B씨, 20대 남성 C씨 등 일당은 지난 3일 오후 6시쯤 강남구 학원가 일대에서 ‘기억력 상승과 집중력 강화에 좋은 음료수’라며 중·고등학생을 상대로 필로폰 등 마약 성분이 들어간 음료를 마시게 했다. 경찰은 지난 6일 대구에서 20대 여성을 긴급 체포하는 등 ‘마약 음료 시음회’를 벌인 일당을 모두 검거했다.
이들이 ‘강남 8학군’의 상징인 대치동을 범행 무대로 삼은 것을 우연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런 대범한 범행을 꿈꿀 수 있었던 이면에는 학부모들의 교육열과 학생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 자리 잡고 있다. ‘공부 잘하는 약’ ‘집중 잘되는 약’ 등 학습능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으로 약물 또는 식품을 섭취하는 데 거부감이 덜한 대치동 문화를 범죄에 악용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강남 반경 1㎞’ 사건들에 담긴 사회 그늘
구 교수는 “ ‘학업에 도움이 된다’는 거짓말이 아이들을 무심코 음료를 마시게 할 정도로 범죄에 취약하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14일 발생한 아파트 경비원 사망 사건도 대치동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했다. 경비원 D씨는 아파트 관리소장으로부터 갑질을 당했다며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동료 경비원들은 관리소장을 해임하라고 요구했고, 관리업체는 목소리를 낸 경비대장 이모씨를 해고했다. 3개월짜리 초단기 ‘쪼개기 계약’을 이용한 조치였다.
사건 이면에는 입주자대표회의(입대의)와 경비노동자들 간의 ‘갑을관계’가 있었다. 입대의는 아파트 관리 책임자인 관리사무소를 선정하고 관리소장을 임명할 수 있는 절대적 권한을 쥐고 있었다. 아파트 주민 E씨는 “1년 전 입대의 회장이 바뀐 후 주민과 갈등이 이어졌고, 관리소장도 돌연 교체됐다”며 “입대의 회장과 현 관리소장은 사실상 한 몸처럼 움직였다”고 말했다. 경비원 D씨의 죽음 뒤에 불안정 노동과 직장 내 괴롭힘이 자리하고 있었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강남에 산다는 것 자체가 특수한 신분 가치가 된 게 현실”이라며 “물질주의나 가족지상주의, 과시주의가 다른 지역보다 더한 곳에서는 약자를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문화가 지배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홍근·김세훈·김송이 기자 redroo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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