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집·교육’ 욕망이 부른 비극

이홍근·김세훈·김송이 기자 2023. 4. 7. 21:0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강남 ‘반경 1㎞’ 내 잇단 충격 사건
코인·투자 뒤엉킨 ‘납치·살인’
학원가 교육열 노린 ‘마약 음료’
노동 경시 드러난 ‘경비원 자살’

가상통화를 둘러싼 납치·살인 사건, 미성년 학생과 부모를 노린 학원가 마약 음료 사건, 아파트 경비원 갑질 사망 사건.

최근 한 달 사이 터져나와 한국 사회를 들썩거리게 한 사건들이다. 언뜻 보면 개별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찾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발생 장소를 중심에 놓고 보면 이들 사건은 서로 매우 가까운 지역에서 벌어진 사실을 알 수 있다. 사건 발생 지점을 지도 위에 표시하고, 그 점을 포함하는 큰 원을 그리면 서울 강남구 선릉로·도곡로의 교차점(한티역)을 중심으로 대치동과 역삼동을 아우르는 ‘반경 1㎞’의 원이 완성된다. | 관련기사 2면

돈과 사람이 몰려드는 곳, 비싼 집값과 높은 교육열을 자랑하는 곳, 그만큼 계층 구분이 뚜렷하며 신분 상승의 욕망이 충돌하는 일도 잦은 서울 강남, 그중에서도 이 ‘반경 1㎞’의 원 안에서 상징적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한 것이다.

강남 납치·살인 사건의 피해자 A씨가 지난달 29일 연지호(30)·황대한(36) 일당에게 납치된 곳은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아파트 앞이었다. 40대 여성인 A씨는 강남을 무대로 코인을 홍보하며 투자자를 모으는 일을 해왔다. A씨는 이번 사건 주범으로 지목된 이경우(36)를 코인 홍보 행사에서 만났고, ‘윗선’으로 의심받는 유모씨·황모씨 부부를 알게 된 것도 코인을 통해서였다. 일확천금을 목표로 한배를 탔지만, 이들의 동행은 오래가지 않았다. 2021년부터 시작된 갈등이 폭발한 곳도 강남이었다.

A씨는 이경우와 함께 다른 투자자들이 유씨 부부를 호텔에 감금하는 데 참여했다. 유씨 부부는 ‘코인 펌핑(가격 띄우기)’ 작업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당시에도 비슷한 이유로 강남 호텔에 숙박 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A씨가 남편과 함께 운영하던 코인 관련 회사도 강남구 테헤란로에 있었다. A씨는 여러 업체를 한 사무실에 등록해놓고 사업을 벌였다.

“물질·성공·가족지상주의 강남
다양한 계층 충돌…범죄 취약”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강남에서 사업을 벌일 정도로 자본과 인프라가 있다는 이미지를 줄 수 있고, 인력 충원에도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며 “투자자를 모으는 데 유리한 곳”이라고 말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강남은 계층 상승을 원하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라며 “다양한 계층의 욕망이 뒤섞여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에서 사기 등 범죄에 취약한 여건이 마련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성년자인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마약을 섞은 음료수를 나눠주고 이를 빌미로 부모를 협박했던 일당이 범죄를 실행한 곳도 강남 대치동 학원가였다.

40대 여성 B씨, 20대 남성 C씨 등 일당은 지난 3일 오후 6시쯤 강남구 학원가 일대에서 ‘기억력 상승과 집중력 강화에 좋은 음료수’라며 중·고등학생을 상대로 필로폰 등 마약 성분이 들어간 음료를 마시게 했다. 경찰은 지난 6일 대구에서 20대 여성을 긴급 체포하는 등 ‘마약 음료 시음회’를 벌인 일당을 모두 검거했다.

이들이 ‘강남 8학군’의 상징인 대치동을 범행 무대로 삼은 것을 우연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런 대범한 범행을 꿈꿀 수 있었던 이면에는 학부모들의 교육열과 학생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 자리 잡고 있다. ‘공부 잘하는 약’ ‘집중 잘되는 약’ 등 학습능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으로 약물 또는 식품을 섭취하는 데 거부감이 덜한 대치동 문화를 범죄에 악용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강남 반경 1㎞’ 사건들에 담긴 사회 그늘

구 교수는 “ ‘학업에 도움이 된다’는 거짓말이 아이들을 무심코 음료를 마시게 할 정도로 범죄에 취약하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14일 발생한 아파트 경비원 사망 사건도 대치동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했다. 경비원 D씨는 아파트 관리소장으로부터 갑질을 당했다며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동료 경비원들은 관리소장을 해임하라고 요구했고, 관리업체는 목소리를 낸 경비대장 이모씨를 해고했다. 3개월짜리 초단기 ‘쪼개기 계약’을 이용한 조치였다.

사건 이면에는 입주자대표회의(입대의)와 경비노동자들 간의 ‘갑을관계’가 있었다. 입대의는 아파트 관리 책임자인 관리사무소를 선정하고 관리소장을 임명할 수 있는 절대적 권한을 쥐고 있었다. 아파트 주민 E씨는 “1년 전 입대의 회장이 바뀐 후 주민과 갈등이 이어졌고, 관리소장도 돌연 교체됐다”며 “입대의 회장과 현 관리소장은 사실상 한 몸처럼 움직였다”고 말했다. 경비원 D씨의 죽음 뒤에 불안정 노동과 직장 내 괴롭힘이 자리하고 있었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강남에 산다는 것 자체가 특수한 신분 가치가 된 게 현실”이라며 “물질주의나 가족지상주의, 과시주의가 다른 지역보다 더한 곳에서는 약자를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문화가 지배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홍근·김세훈·김송이 기자 redroot@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