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납치살인 사건을 읽는 또 다른 키워드 ‘다단계’
강남 납치·살인사건 수사가 진척을 보이면서 범행이 기획단계에서부터 실행에 이르기까지 ‘다단계 피라미드식’으로 이뤄진 정황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배후로 의심받는 재력가 유모씨 부부는 이른바 ‘코인판’에서 다단계로 인력을 동원해 코인 시세를 띄우곤 했는데, 이번 범행에도 비슷한 구조를 차용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짙어지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은 7일 오후 유씨에 대한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를 진행했다. 경찰은 유씨 부부가 피해자 A씨를 살해하기로 마음을 먹고 A씨와 원한이 있는 이경우(36)를 섭외했다고 보고 있다. 이씨는 A씨가 홍보하던 코인에 투자했다가 8000만원을 잃었는데, 이후 A씨에게 금전을 요구하다 사이가 나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대학 동창이던 황대한(36)을 섭외했고, 황씨는 3600만원을 주는 대가로 다시 연지호(30)를 범행에 끌어들였다.
경찰은 유씨에서 이경우-황대한-연지호로 이어지는 ‘사슬’에서 유씨 부부가 위험 부담을 가장 적게 지도록 설계됐다고 본다. 직접 납치와 살인을 벌인 연지호는 경찰 조사에서 이경우가 사건의 주범이라고 진술했다. 연지호는 유씨 부부를 만난 적이 없고 이경우에게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실제로 이경우가 사건의 주범이라고 인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간 관리자를 일종의 연막탄으로 둔 셈이다. 경찰에 검거된 순서도 연지호, 황대한, 이경우, 유씨 순으로 이뤄졌다.
범행동기 측면에서 보자면 유씨 부부는 이번 범행으로 A씨에 대한 원한을 해결했을 수 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관계자들에 따르면 유씨 부부와 A씨는 2020년 가상자산 ‘퓨리에버’ 코인에 함께 투자했다. 같은 해 퓨리코인은 거래소에 상장됐는데, 유씨 부부가 상의 없이 시세조종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A씨가 격분해 지갑을 동결했고, 이로 인해 손해가 발생하자 갈등이 생겼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실제로 이들은 수년간 소송전을 벌여온 것으로 파악됐다.
다단계 방식의 범행 기획을 의심받는 유씨는 그동안 코인판에서도 시세를 부풀리는 데 비슷한 수법을 써왔다. 유씨는 전국에 다단계 인력망을 쥐고 코인 가격을 띄우는 ‘펌핑’ 역할을 해온 것으로 파악됐다. 한 관계자는 전날 기자와의 통화에서 “업계에서 A씨는 중수이고, 유씨 부부가 고수로 통했다”며 “유씨 부부가 세력을 동원해 30억원 자금을 모았고, 이 돈으로 코인 가격을 ‘가두리 펌핑’했다”고 했다. 실제로 2020년 11월13일 코인원에 1코인당 약 2000원에 상장된 퓨리에버 코인은 가격이 치솟기 시작해 12월21일 최고가 1만345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유씨 부부가 일종의 작전 세력 역할을 한 것이다.
한 코인 전문가는 “사람이 몰리면 가격이 뛰는 코인 업계 생리상 다단계 세력이 많다”면서 “다단계처럼 문어발로 사람들을 모아 가격을 올리고, 일반 투자자들이 돈을 넣기 시작하면 팔고 빠지는 사기가 많다”고 말했다.
이홍근 기자 redroo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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