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하실 줄 알았는데…” 하춘화·서수남·설운도, 故현미 빈소 눈물 조문[종합]
“백수(白壽·나이 99세를 일컫는 말) 하실 줄 알았는데...”
7일 서울 동작구 중앙대학교 장례식장 특실 1호에 지난 4일 유명을 달리한 현미의 빈소가 마련됐다. 현미는 이촌동 자택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향년 85세.
비보가 알려진 지 사흘 만인 이날 오전 마련된 빈소에는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해 가수 남진, 이미자 등 가요계에서 보낸 근조 화환이 빼곡했다. 조문객도 줄을 이었다. 오전에는 가수 현숙, 정훈희, 하춘화가 어두운 표정으로 빈소를 찾아 대선배의 마지막 길을 애도했고 오후에도 쟈니 리, 설운도, 장미화, 김흥국과 배우 한지일 등 후배, 동료들이 줄줄이 빈소를 찾았다.
조문을 마친 뒤 취재진을 만난 하춘화는 “여섯 살에 데뷔했을 때 (현미와) 한 무대에 섰다. 이미자, 현미, 패티김 선배님은 내가 ‘아줌마’ ‘엄마’라고 부르던 분들”이라며 “(현미는) 나에게 ‘춘화야’라고 부르는 유일한 분이었다”고 고인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지금도 실감이 안 난다. 100세 이상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쉽다. 20년은 더 사셨어야 하는데···”라며 안타까워 했다.
그러면서 “든든하게 우리 가요계를 지켜주던 한 분이 떠나시니 마음이 너무 허전하다. 이 자리를 누가 메꿔야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며 “좋은 곳에 가셔서 건강하게 노래하던 그 모습대로 하늘나라에서도 편히 계시기를 빈다”고 애도했다.
서수남은 “현미 누나와 미8군단 시절엔 활동이 겹치지 않았지만 이후 많은 무대에서 활동하며 몇 년을 저녁마다 매일 만났다. 개인적으로 ‘수남아’ ‘누나’ 하던 사이다. 친남매처럼 지냈는데 최근엔 코로나도 있고 해서 못 만났다. 쉬면서 지내고 있었는데 누나가 작고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놀랐다. 친가족이 돌아가신 것 같은 느낌이랄까. 경황이 없었다”고 비통해했다.
서수남은 “성량이 크고 음악성이 굉장히 좋다. 원래 무용으로 시작해 체격이 커도 무대에서 자연스럽고. 어딜 가나 각광 받는 훌륭한 가수였고 선배였다”고 말했다. 그는 “큰 별이 졌다. 가슴 아프다. 누구나 가는 길이지만, 너무 말 없이 떠났다는 게, 홀연히 가버려서 그게 좀 아쉽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장례식의 공동장례위원장으로 나서 고인의 마지막 길을 함께 한다.
설운도는 “누님은 건강하게 사셨고, 후배들의 귀감이 되셨다. 힘이 없다가도 선배님을 보면 힘이 불끈불끈 났다. 또 가수로서도 모범적인 분이시다. 그 연세에도 그렇게 고음이 올라가고, 신곡도 발표하시고. 귀감이 되고 롤모델 같은 분이다. 우리도 선배님처럼 나이들고 싶다 할 정도로 언제 어디서 만나도 항상 웃으시고 후배들을 챙기는 멋진 분이셨다”고 말했다.
김흥국은 “처음엔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내가 쭉 지켜본 현미 선생님은 (그렇게) 별세할 분이 아니다. 100세 이상 노래할 분이었다. 비보를 듣고도 믿지 않고 신경도 안 썼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김흥국은 “정말 배울 점이 많은 선배였다. 8군에서 노래한 분들은 뭔가 다르다. 음악이 다르고, 가요를 불러도 재즈 스타일로 리듬을 타는데, (현미는) 보통 가수가 아니었다. 너무너무 존경했던 분”이라고 고인을 떠올렸다. “가요계의 정말 큰 별이 졌다”며 애통해 한 김흥국은 “후배들이 돌아가신 선배님을 어떻게 모셔야 할 지, 추모제든 가요제든 팬들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게 만들 무언가를 준비해야 한다. 그게 당연한 우리의 숙제”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선생님,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평소에 친동생처럼 예뻐해주셨고, 저도 가요계 대선배라기보다는 큰누나같고 어머니 같았는데 마음 편하게 가시고, ‘떠날때는 말없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그렇게 마음 편하게 우리 곁을 떠나셨는데, 아무 걱정 하지 마시라”며 고인을 애도했다.
이어 “현미씨가 미8군단에서 활동하다가 당시 많은 분들과 가요쪽으로 돌아왔는데 가요가 그 때 한단계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고 고인을 높이 평가한 남일해는 현미의 ‘내 사랑아’를 한 소절 부르며 눈물을 삼켰다.
이자연 대한가수협회 회장은 “현미 선배님은 권위를 다 내려놓은 선배다. 언니같고, 엄마 같이 편한 선배다. 그토록 호탕한 웃음은 그 분 한 분 밖에 안 계실 것이다”고 후배들에게 따뜻했던 고인을 떠올리며 “영화도 만들기로 하고, 100살까지 함께 하기로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을 어쩌시려고 벌써 떠나셨는지”라고 슬퍼했다.
그는 이어 “밤하늘의 멀리 빛나는 별이 되셔서, 못 다 이룬 꿈, 그 열정으로 이루시길 바란다”면서 “우리 모든 후배들이 사랑한다. 잊지 않겠다. 선배님은 떠나시지만 우리는 영원히 가슴 속에 기억하겠다”고 추모했다.
조문 첫날인 이날 빈소는 미국에서 급거 귀국한 큰 아들 이영곤씨와 조카인 배우 한상진이 지키고 있다. 두 사람은 빈소가 차려진 직후 애통함을 금하지 못하고 부둥켜 안고 오열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씨는 “다른 어느 것보다도, 혼자서 가신 게 너무 마음이 아프다. 자식이 둘이 나 있고 식구들이 많은데, 혼자서 말없이 가신 것에 대해서는 평생 씻어도 못 씻을 불효라 생각한다”며 울먹였다.
유족은 국내에서 장례 절차를 마친 뒤에는 미국으로 유해를 모셔갈 계획이다. 이씨는 “나도 동생도 미국에 거주한 지 오래 됐고, 아무래도 이곳에 모시면 자주 찾아뵐 수 없기 때문에 이제라도 모시고 가서 자주 뵙기 위해 미국으로 모시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현미는 지난 1938년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평양에서 보냈다. 이후 6.25 전쟁 당시 1.4 후퇴로 남쪽으로 내려왔다.
1962년 노래 ‘밤안개’로 데뷔한 고인은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없이’ 등 다수의 히트곡을 발매하며 한국에서 보기 드문 재즈 창법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65년에는 김기덕 감독 연출,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영화 ‘떠날때는 말없이’의 주제곡을 불러 당대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 했다.
작곡가 고 이봉조와 사이에 영곤, 영준 두 아들을 뒀다. 장남 이영곤은 고니라는 예명으로 가수 활동을 하기도 했다. 둘째 며느리는 ‘사랑은 유리같은 것’으로 알려진 가수 원준희다. 가수 노사연과 배우 한상진이 조카다.
[박세연 스타투데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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