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은-쉰들러 '20년 악연' 속 국민연금과 금융당국
'전략적 파트너'가 '20년 악연'으로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 적극적으로 해야"
'유증 승인' 금융당국도 ISDS 앞둬
[이데일리 김근우 기자]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다국적 승강기 업체 쉰들러의 긴 악연이 일단락됐다. 현 회장이 현대엘리베이터(017800)에 1700억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면서 주주가 회사를 대신해 경영진의 책임을 묻는 ‘주주대표소송’ 사상 이례적인 대규모 배상금을 물게 됐다.
기업 지배구조 전문가들은 대법원이 주주가치를 침해하는 거래에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다만 세계 어느 나라의 법원도 여론이나 사회적 공감대를 넘어선 진보적 판결을 내리는 일이 쉽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향후 국내 자본시장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주주와 임직원, 금융당국 등 각 시장 주체들의 적극적인 역할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현 회장과 쉰들러의 인연은 ‘훈훈하게’ 시작됐다. 2003년 정상영 KCC(002380) 명예회장이 현대엘리베이터에 대한 적대적 M&A(인수·합병)에 나서자 현 회장은 전략적 파트너로 보이는 쉰들러 그룹과 ‘현대엘리베이터의 승강기사업권을 취득한다’는 내용의 인수의향서를 체결했다. 현대엘리베이터로서는 다행히도 KCC가 지분 5% 이상 취득 시 공시해야 하는 의무를 위반하면서 M&A 시도가 무위에 그쳤고, 쉰들러와 맺은 LOI(인수의향서) 계약도 무산됐다.
하지만 쉰들러는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인수를 포기하지 않고 2006년 KCC로부터 25.5%의 지분을 사들이며 현대엘리베이터의 2대 주주가 됐다. 현대엘리베이터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쉰들러가) 우호적 세력으로 가장하고 노골적으로 적대적 M&A를 시도했다”고 밝혔다. 양측의 균열은 현 회장이 현대엘리베이터 자회사인 현대상선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금융회사 등과 현대엘리베이터 주가를 기초자산으로 한 파생상품 계약을 쉰들러 측이 문제 삼으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해당 계약은 금융회사 등이 현대상선 주식을 사주는 대신 현 회장에게 우호적인 의결권을 행사해주고, 손익은 대부분 현대엘리베이터에 귀속시키되 금융회사 등에 일정 비율의 수익을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계약이 현대엘리베이터에 수천억 원대의 손실로 돌아오자 2대 주주 쉰들러는 현 회장 등 경영진에 회사를 대신해 책임을 묻는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한다.
1심은 현 회장의 손을 들어줬지만, 2심은 현 회장의 손해배상 책임을 일부 인정했다. 대법원은 원심의 판단을 받아들여 현 회장과 한상호 전 현대엘리베이터 대표가 현대엘리베이터에 1700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지연이자를 고려하면 배상액은 더 불어나는데, 현대엘리베이터 측은 “2000억원대 중반”이라고 밝혔다. 쉰들러 그룹 측은 자발적으로 빚을 갚도록 협의하는 절차를 생략하고, 즉시 강제집행 절차에 돌입하며 ‘앙금’이 남았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현 회장은 일단 보유한 현대무벡스 주식 2475만463주(약 863억원)를 대물 변제해 갚기로 했다. 현대엘리베이터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주주대표소송 대법원 판결과 관련해 지난 6일 이사회를 개최하고, 배상금 1700억원 및 지연 이자 등에 대해 현대무벡스 주식 2475만주(약 863억원)로 대물 변제를 통해 회수하기로 결정했다. 앞서 현 회장은 2심 선고 후 현대엘리베이터에 1000억원을 선수금으로 지급하고 법원에 200억원을 공탁한 바 있다. 남은 변제액은 500억~1000억원 수준으로 추정된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지난달 31일 채권 회수를 위한 집행문 부여 신청을 하고 신속히 채권 회수를 진행하고 있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이번 결정은 채권 전액을 최단기간 내에 회수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행동주의 펀드, 기관투자자 등이 모인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이번 대법원 판결을 ‘기업 거버넌스 역사의 일대 도약’이라 평가했다. 지배주주가 지배력을 남용해 기업가치와 주주가치를 침해하는 관행을 차단했고, 법원이 기업 지배구조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부담이 있더라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다.
김규식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최근 우리 법원은 지배력이나 경영권 방어를 위해 기업가치, 주주가치를 침해하는 거래에 대해서 매우 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본건 판결은 이러한 우리 법원의 입장을 확실히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2심 판결 확정 시 현대엘리베이터의 지배구조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할 수 있다는 부담이 있음에도 원심을 확정해 부당하고 불법적인 관행을 근절하기로 결정했다”고 논평했다.
다만 5%대 지분을 보유하며 현대엘리베이터 3대 주주로 자리해 온 국민연금과 경영권 방어를 위한 유상증자를 승인한 금융감독원의 대처는 곱씹어볼 대목이다. 한 기업의 주요 주주인 기관투자자와 시장을 감독하는 금융당국으로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했다는 측면에서다.
김 회장은 “국민연금은 현대엘리베이터의 5% 지분으로 3대 주주인데 쉰들러가 10년간 소송할 동안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하지 않았다”며 “국민연금은 쉰들러에게 맡겨 놓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쉰들러는 경영권 방어를 위한 유상증자를 금융감독원이 승인하는 과실로 수천억의 손해가 발생했다며 네덜란드 헤이그중재재판소에 ISD 중재신청을 제기했다”며 “지배주주의 경영권 방어 목적의 불법, 부당한 편법에 금융감독원 등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감시, 감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쉰들러는 지난 2018년 한국 정부에 1억9960만 달러(약 2500억원)규모의 ‘ISDS(투자자-국가 분쟁해결)‘를 제기했다. 현대엘리베이터의 유상증자와 전환사채 발행이 오너 일가의 ’경영권 강화‘ 차원에서 이뤄졌지만, 금융당국이 이를 방치해 최소 3억 달러 규모의 손해를 입었다는 취지에서다. 사건을 심리 중인 네덜란드 헤이그 소재 상설중재재판소(PCA)는 오는 6월 첫 심리기일을 열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이 오랜 기간 묵혀온 이번 분쟁을 올해가 돼서야 판결할 수 있었던 것도 최근 강조되는 기업 거버넌스에 대한 개혁 요구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평가다. 김 회장은 “주주, 임직원, 시민들이 기업거버넌스 개혁과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라는 사회적 합의를 지속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다면, 우리 법원도 틀림 없이 공정한 판결을 하리라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김우진 서울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매우 의미있는 판결”이라며 “이번 판결을 계기로 한국 자본시장이 주주 이익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더 발전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다만 이번 판결에 대해 한 재계 관계자는 “경영권 방어를 위한 정당한 경영적 판단이 훨씬 많은 부분이 인정되는데, 일부 승소한 주주권 강화부분만 부각돼 유사한 문제 제기시 기업의 방어권 제한으로 이어질 수 있어 재계에서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근우 (roothelp@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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