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의 시선] 기억이라는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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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손자 전우원 씨가 지난달 귀국해, 입국하자마자 광주를 찾았다.
전우원 씨가 광주에 간 것은 더 이상 사죄받을 대상이 없어 잊힐 뻔한 유가족들의 상실을 다시 되살려 '기억하는 일'이었다.
'기억하는 일'은, 잊지 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그래서 '기억하는 일'은 매번 처절한 몸부림이 되어 버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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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이선영 MBC 아나운서]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 씨가 지난달 귀국해, 입국하자마자 광주를 찾았다. 5.18 희생자 유가족과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싶다고 했다. 죄를 지은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조부이므로 엄밀히 말해 그가 사죄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유가족들은 그에게, '고맙다'라며 눌린 마음을 토했다. 전우원 씨가 광주에 간 것은 더 이상 사죄받을 대상이 없어 잊힐 뻔한 유가족들의 상실을 다시 되살려 '기억하는 일'이었다. 전 씨는 '기억하는 일'로 그들의 아픈 등을 쓸어주었다. 수십 년 만에 이루어진 치유의 장면이었다.
'기억하는 일'은, 잊지 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마주 보던 눈빛, 웃고, 울고, 소리 내던 입매와 온기가 느껴지던 손길. 아무것도 잊고 싶지 않지만 망각의 힘 앞에서 속절없다. 사진을 들고 볼을 비비고, 손으로 아무리 매만져도 소용없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옅어지지 않는 애틋함이다. 함께 기억하는 일은, 그 애틋함을 쓰다듬어주는 일이다. 망각의 줄다리기에 이리저리 당겨지는 사람들의 등을 쓸어주는 것이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상실이라도 함께 초를 들고, 꽃을 놓고, 노래를 부르고, 글을 쓰며 함께 하는 것은 그런 일이다.
어떤 비극을 만난 뒤 우리는 언제나 소망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이란 말로 시작해 지난한 입씨름을 거쳐 머리를 맞대고 문장을 만든다. 법을 고치고, 몇 주기 동안은 추모하다가 더 시간이 지나면 기억하는 일의 악력은 조금씩 풀어진다. 그쯤 되면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라는 어떤 저항이나, 사실에 아예 흠집을 내 버리는 왜곡에도 부딪힌다. 그만큼 간단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기억하는 일'은 매번 처절한 몸부림이 되어 버리곤 한다.
몸부림이 될지언정 기억해야 하는 다른 이유는 우리 중 누구도 비슷한 나쁜 일을 만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번엔 나의 일이 아니었지만 언제라도 나의 삶을 할퀴어 놓을 수 있는 비극에 대항해 단단한 벽을 쳐놓는 것이 또 하나 '기억하는 일'의 목적이다. 그렇기에 어떤 상실에 아무 관련도 없을뿐더러, 남의 일에 아무런 공감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다.
'기억하는 일'은 과거를 돌아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반드시 공적인 기억하기가 필요하다. 기억은 치유의 기본이자 나아가 비극에 대한 집단적인 예방 활동이다. 그저 개인과 시민사회가 공감으로 상실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리더십이 기억하는 일에 함께해야 한다는 당위는 여기에서 나온다. 그런 공적인 지지 속에서 기억하는 일은 더 이상 몸부림이 아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기억하기는 악으로 지켜내야 하는 몸부림이다.
아름다운 계절이다. 얼굴을 감싸는 바람에 가시가 없다. 바람에 몸을 뉜 봄씨앗들이 간지럽긴 하지만,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하다. 냄새도 곱다. 봄에는 여기저기 새순을 트이는 그 새로움만의 향기가 있다. 냄새가 기억을 불러오자 순간 통증이 번진다. 기억해야 하는 아픈 일들이 이 맘쯤의 봄에 많았다. 제주의 4월, 팽목항의 4월. 이렇게 아름다운 날에도, 굽은 등으로 기억이라는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이 있다. 언젠가의 아름다운 봄에, 또 다른 사람들이 같은 몸부림을 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그만하자'는 목소리가 번지기 전에 서둘러 먼저 전한다. 함께 기억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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