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은 네 몫, 정의감은 내 몫[책과 삶]

허진무 기자 2023. 4. 7.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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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수치심 자극하는 미디어
특정한 신체에 대한 선망 부추겨
권력자 향해 수치심 자극하면
‘미투 운동’처럼 긍정적인 변화도
캐시 오닐은 수치심의 긍정적, 부정적 효과를 모두 조명한다.

셰임 머신

캐시 오닐 지음·김선영 옮김 | 흐름출판 | 320쪽 | 1만8500원

미국 보스턴에 살던 소녀는 또래보다 덩치가 컸고 과체중이었다. 학교에선 친구가 없어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 체력 검사 때 아이들이 줄 서서 한 명씩 체중계에 올라가면 보건 교사는 큰 소리로 체중을 외쳤다. 아이들은 소녀를 며칠 동안 놀렸다. “너 진짜 그렇게 많이 나가? 진짜 47㎏이야?” 소녀는 부모와 함께 다이어트를 시도했지만 빠졌던 살은 금방 돌아왔다. 체중계 눈금을 속였다가 부모에게 들키기도 했다. 소녀는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눈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수치심을 기억한다.

미국의 수학자이자 데이터 과학자인 캐시 오닐이 책 <셰임 머신>에 밝힌 자신의 경험담이다. 오닐은 하버드대에서 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의 박사후과정을 거쳐 버나드 칼리지 수학과 종신교수를 지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수학 천재’였지만 ‘뚱뚱한 몸’에 대한 수치심에선 벗어날 수 없었다. 오닐은 “수치심은 본질적으로 우리 내면에 품고 다니는 것”이라며 “수치심으로 깊은 상처를 받으면 자아가 공허해지고, 존엄성을 부정당한 기분이 들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의심하게 된다”고 적었다.

오닐은 비만, 약물 중독, 빈곤, 외모 등에 대한 수치심을 이용해 대기업은 돈을 벌고, 정부는 권력을 통제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다이어트 리얼리티 쇼 <더 비기스트 루저>(한국 방영명은 <도전 FAT 제로>)는 트레이너의 가혹한 지도를 받아 뚱뚱한 참가자들이 광적으로 운동하는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오닐은 이 프로그램이 참가자를 인생의 낙오자로 묘사하며 시청자에게 우월감을 느끼게 하고 비만에 대한 조롱을 부추긴다고 비판한다.

수치심에는 ‘선택의 문제’라는 전제가 숨어 있다. 뚱뚱한 사람은 뚱뚱하기를 선택한 것처럼 비난받는다. ‘날씬해질 수 있었는데도 노력하지 않았다’고 전제한다. 미국 모델 킴 카다시안은 ‘이상적인 몸매’가 아닌 사람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돈을 번다. 인스타그램에 식욕억제 사탕, 디톡스 프로그램, 모발 비타민 등의 광고 게시물을 올릴 때마다 50만달러를 받는다. 이런 수치심은 위험한 자기혐오로 발전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10대 학생들이 다이어트를 위해 마약성 식욕억제제를 불법 처방받는다는 언론 보도가 많았다.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발전으로 수치심은 전 세계적으로 공유된다. 공동체 규범을 어긴 인물에게 수치심을 주는 온라인 괴롭힘이 ‘참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이런 참교육의 동력은 ‘좋아요’ ‘팔로’ ‘공유하기’ 등으로 정의감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2020년 5월 미국에서 일어난 ‘에이미 사건’이 대표적이다. 백인 여성 에이미 쿠퍼는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반려견과 산책하다 흑인 남성이 ‘목줄을 채워달라’고 부탁하자 “흑인 남성의 공격을 받았다”고 경찰에 거짓 신고했다. 흑인 남성이 이 상황을 촬영해 페이스북에 올린 영상 조회수가 3800만건을 넘기면서 비난 여론이 폭발했다. 에이미는 사과했지만 직장에서 해고당했다.

오닐은 “사람들은 이런 공격이 사회적 순기능을 한다며 쉽게 정당화한다”며 “도덕성을 과시하는 트윗이 정작 근본 문제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인종주의를 없애려면 개인을 공격하기보다 인종별 거주지 분화를 완화하고 경제적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닐이 긍정하는 수치심도 있다. 오닐은 권력자의 수치심을 자극해 사회를 유익하게 바꾸는 행위를 ‘펀치 업’이라고 부른다. 펀치 업의 대상은 ‘현실을 바꾸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력자’이다. 오닐은 대표적인 펀치 업으로 2017년 여성들이 남성들의 성폭력을 고발한 ‘미투 운동’을 제시한다. 미투 운동은 ‘성적 수치심’을 여성 피해자가 아닌 남성 가해자가 겪도록 역전시킨 사건이다. 할리우드의 거물 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타인이 몰락했을 뿐 아니라 사회 제도와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변화도 일어났다.

오닐은 펀치 업의 대상인 ‘권력자’의 기준이 무엇인지, 어떤 수준이나 방법이 적정한 수치심인지, 집단적 행위라면 목표한 방향으로 통제할 수 있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진 않는다. 대형 자산운용사의 고위 임원이었던 에이미 쿠퍼의 해고에 대해선 “그런 이유(거짓 신고)로 직장에서 잘려야 할까”라며 그가 과도하게 비난받았다는 의견을 은근히 드러낸다.

인간은 모두 실수한다는 점을 인정하며 서로를 신뢰하고 존엄하게 대우하자는 결론은 다소 순진하게 보인다. 오닐은 “때로 수치심은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우리의 유일한 도구”라며 “우리가 수치심에 대한 자각력을 길러 세심하게 사용한다면, 공유 규범을 강제하는 목적으로만 이를 활용한다면, 사람들의 인생이 밝아질 수 있다”고 적었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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