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예진, 전작 잊게 만드는 '스며들기'의 달인
아이즈 ize 박현민(칼럼니스트)
맑고 씩씩한 캔디. 요즘 TV 속 표예진 배우를 보고 있자면, 그러한 느낌이 잔뜩 묻어난다. 월화에는 tvN 드라마 '청춘월담' 장가람으로, 금토에는 SBS 드라마 '모범택시2' 안고은으로 시차를 두고 변화한다. 두 캐릭터 모두, 평범하고 녹록한 인생을 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명랑하고 밝다. 그 밝은 기운은 주변 캐릭터는 물론 작품 전체로 삽시간에 번져 자칫 무겁게만 가라앉을 수 있을 드라마를 햇살 좋은 양지로 끄집어내는 역할을 도맡는다. 무거운 작품이라면 거부 반응이 돋는 일부 시청자에게 표예진은, 해당 채널에 머무를 수 있도록 돕는 일종의 구원자다.
"캔디라니, 그거 좀 뻔한 거 아닌가?"라는 의문은 표예진 배우의 전작들을 챙겨봤다면 입 밖으로 쉬이 나올 수 없는 대사라는 것을 안다. 뇌리에 또렷하게 각인된 표예진은 지난 2017년 방영된 드라마 '쌈, 마이웨이'에서 애인 있는 남자를 직진으로 유혹하는 밉상 장예진, 2019년 'VIP'에서 불륜으로 한 가정을 파괴하는 희대의 악녀 온유리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VIP'를 통해서는 'SBS 연기대상' 베스트 캐릭터상을 수상한 바. 이는 캐릭터가 그만큼 리얼했고, 더 공분을 자아냈다는 소리다. 드라마 종영 이후에도 한동안 '불륜녀', '악녀'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은 것도 감내해야 할 수순이었다.
배우는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야만 하는 직업이지만, 잔상이 짙게 남은 캐릭터를 걷어내는 일은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밉상'이나 '악녀'처럼 색이 짙은 캐릭터는 더욱 그렇고, 흥행한 작품에 주목까지 받았던 강렬한 캐릭터라면 더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모범택시'에 안고은이 나왔을 때, 그 누구도 '아닛! 저 못된 애가 왜 저기 있지?' 라고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언니를 잃고 해커가 된 사연, 이후 무지개 운수에 합류해 활약하는 안고은이 어떤 의미에서 안쓰럽기까지 했다. 과거를 극복해 옳은 미래로 나아가는 모습에는 응원도 보낼 정도. 그렇게 장예진과 온유리는, 대중의 기억에서 속성으로 지워졌다.
'모범택시'가 시즌2로 돌아오면서 안고은(표예진)의 쓰임새는 점진적으로 확장된 분위기다. 시즌1에서 주로 김도기(이제훈)가 소화하던 매력 넘치는 '부캐' 변신이, 고은에게로 옮겨붙은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카우걸 복장의 가수, 내 집 마련을 원하는 새색시, 청소부와 간호사까지 자유로이 오가며 에피소드마다 시선을 사로잡았다. '부동산 빌런' 퇴치를 위해 김도기와 신혼부부 연기를 펼칠 때는 잠시나마 드라마 장르를 로맨스로 바꾸는 마법을 시전하기도 했다. 그동안 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그걸 참았나 싶을 지경이다. 머리를 질끈 묶고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며 무지개 운수 후방 지원을 전담하는 해커로서의 모습과 180도 다른 여러 '부캐'는 표예진이라는 배우의 역량을 다시금 검증하는 용도가 된 셈이다.
'청춘월담'에서도 이러한 소화력은 십분 발휘된다. 양반집 몸종에서 남장, 남장에서 다시 비단옷을 입은 여인으로 등장하며 한 작품에서 다양한 비주얼과 캐릭터를 내비치고 있는 탓이다. 그만큼 남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했을 터다.
어쩌면 곧바로 배우가 된 것이 아니라, 승무원으로서 사회생활을 했던 과거의 경험 등이 연기를 보다 사실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돕는 연료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MBC 예능 '나 혼자 산다'를 통해 공개된 '표또청'(표예진 또 청소한다)의 모습이나 베이킹에 보인 진심, 자연스러운 '따릉이' 탑승, 그리고 개인 SNS와 필름 카메라 계정까지 곳곳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표며드는'(표예진에 스며드는) 순간에 직면한다.
물론 스며들기의 진정한 달인은 단연코 표예진 배우다. 밉상과 불륜녀에서 천재 해커와 남장 몸종으로, 사극과 현대극, 극의 경중과 장르까지 쉴 새 없이 오가며 캐릭터와 작품에 깊게 몰입하고 스며든다. 김은희 작가의 신작 '악귀' 특별출연, 물망에 오른 ENA 드라마 '낮에 뜨는 달' 등 차기작에 대한 정보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그런 기대에서다. 이전에 봤던 인물과 또 다르게 스며들, 하지만 여전히 강한 끌림이 있는 배우. 지우개처럼 전작을 쓱쓱 지워내며 또다시 백지에 새로운 인물을 세밀하게 그려내는 배우. 아마도 우리는 다음 작품을 보면 이렇게 툭 말할 것이다. "표예진이 또 작품에 잔뜩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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