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치킨게임 30년 만에 다시 감산… 4조 적자에 결국 ‘백기’
1분기 반도체 적자 4조원 안팎 예상
메모리 가격 잇딴 하락에 원가경쟁력도 빛바래
삼성전자의 주력 사업인 DS(반도체) 부문이 예상보다 심각한 반도체 불황에 ‘인위적 감산은 없다’는 기조를 철회했다. 삼성전자는 7일 “의미있는 수준까지 메모리 생산량을 하향 조정 중”이라며 사실상 감산을 공식 선언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1996년 D램 ‘치킨게임’ 이후 첫 감산 선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날 삼성전자는 지난 1분기 연결 기준 잠정 실적을 집계한 결과 매출 63조원, 영업이익 6000억원을 기록했다고 공시했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19% 줄었고, 영업이익은 95.8% 급감했다. 삼성전자의 분기 영업이익이 1조원 밑으로 떨어진 것은 2009년 1분기 이후 14년 만에 처음이다.
시장에서는 반도체 부문의 적자 규모가 4조원 안팎에 달해 전체 실적을 끌어내린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 부문의 적자 기록도 14년 전이 마지막이다. 도현우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업황 둔화에도 삼성전자의 투자 축소 및 감산 규모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어서 업계 최고 캐파(생산능력)와 공정 경쟁력에도 이익 둔화폭이 경쟁사보다 컸다”고 말했다.
◇ 1분기 메모리 안 팔려… 가격 추가 하락
올 1분기 반도체 부문 적자가 4조원까지 불어난 것은 메모리 출하량과 가격이 모두 예상보다 부진해서다. 1분기 고객사들이 쌓인 재고를 소진하는 데 집중하면서 메모리 거래량이 매우 적었고, 이에 따라 삼성전자를 비롯한 메모리 제조업체들은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 가격을 더 깎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가격이 크게 하락하면서 삼성전자의 원가 경쟁력도 빛이 바랬다. 메모리 재고 수준도 지난 1분기 사상 최대 규모에 달한 것으로 예측됐다.
위민복 대신증권 연구원은 “1분기 초 D램 가격 협상이 전분기 대비 -20% 정도로 시작했는데, 1분기 제품이 거의 팔리지 않아 가격 하락폭이 -25~-30%로 늘어났다”며 “과거에는 삼성전자가 공정 미세화에 많이 앞서있었으나, 공정 격차가 최근에는 6개월 이내 수준까지 좁혀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김동원 KB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출하 부진과 가격 하락이 동시에 맞물리면서 재고 평가손실이 늘어났다”며 “1분기 D램 가격은 24%, 낸드플래시는 16% 하락해 최근 9개월간 D램과 낸드플래시 가격은 각각 76%, 68% 하락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PC용 D램 범용 제품(DDR4 8Gb)의 평균 고정거래 가격은 지난달 1.81달러로 1년 전(3.41달러)의 절반 수준이다. 올 1분기 글로벌 D램 시장의 공급초과율도 112.5%로 2011년 D램 치킨게임 당시 공급초과율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30년 만 첫 감산 선언
메모리 업황이 당초 예상보다 더 나빠지면서 삼성전자는 이날 감산을 공식화 했다. 삼성전자는 “그동안 메모리 시황에 전략적인 대응을 위해 노력해 왔다”며 “특히 난이도가 높은 선단공정 및 DDR5, LPDDR5 전환 등에 따른 생산 비트그로스(bit growth·비트 단위로 환산한 생산량 증가율) 제약을 대비해 안정적인 공급력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를 통해 특정 메모리 제품은 향후 수요 변동에 대응 가능한 물량을 확보했다는 판단 하에, 이미 진행 중인 미래를 위한 라인 운영 최적화 및 엔지니어링런(시험생산) 비중 확대 외에 공급성이 확보된 제품을 중심으로 의미 있는 수준까지 메모리 생산량을 하향 조정 중”이라고 밝혔다.
시장에서는 삼성전자의 감산 규모가 업계 수준에 부합하는 정도로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DDR4를 중심으로 감산이 진행될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삼성전자는 이날 감산 선언을 ‘단기 생산 조절’로 정의하고 미래 투자를 지속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단기 생산 계획은 하향 조정했으나, 중장기적으로 견조한 수요가 전망되므로 필수 클린룸 확보를 위한 인프라 투자는 지속하고 기술 리더십 강화를 위한 R&D(연구개발) 투자 비중도 확대해 나갈 예정”이라고 했다.
◇ 세계 3대 메모리 기업 중 마지막 감산 선언
그동안 삼성전자 안팎에서는 상반기 적자 규모를 더 키우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감산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세계 3대 메모리 기업 중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이 지난해 3분기부터 감산을 공표한 것과 달리 삼성전자는 이날 전까지는 ‘인위적인 감산은 없다’는 기조를 고집해왔다.
앞서 시장은 메모리 부문 실적이 크게 악화한 지난해 4분기 감산 발표를 예상했으나, 삼성전자는 당시 컨퍼런스콜에서 “올해 시설투자(CAPEX)는 전년과 유사한 수준이 될 것”이라며 인위적 감산은 안 한다는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 대신 생산라인 최적화(장비 재배치) 등을 통한 간접적인 생산량 조절에 나섰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의 1분기 D램 생산량은 8~9%가량 줄어든 것으로 시장은 보고 있다.
하지만 실적 전망이 악화하면서 감산 확대 필요성은 높아졌고, 삼성전자는 긴 논의 끝에 결국 공급량 조절을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쪽으로 방침을 선회했다. 불황의 골이 예상보다 깊어 수요가 회복할 때까지 버티기 전략을 고수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도현우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일부 테스트·부품 업체에 의하면 1분기 삼성전자에서 수주한 물량이 30% 이상 감소했다”며 “삼성전자가 현재 보유한 D램 재고는 경쟁사와 비교해도 높은 21주를 웃도는 수준으로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감산 수준을 오히려 확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 업계 “공급 초과 상황 다소 개선 기대”
세계 D램 공급량의 절반가량을 담당하는 삼성전자가 보다 적극적인 공급 조절을 공식 선언하면서 업계에서는 업황 반등 시기도 앞당겨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메모리 업체 중 가장 빠르게 감산을 선언한 마이크론도 지난달 말 실적발표에서 추가 감산을 언급하는 등 업계가 발맞춰 공급 조절에 나선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현재 업계 재고 수준이 매우 높아 공급 전략이 가장 큰 변수가 됐다”며 “삼성전자가 추가 감산을 하지 않으면 다운턴(하강 국면)이 장기화가 확실시됐으나, 지금이라도 공급 전략을 바꿔 보다 빠른 반등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위 연구원도 “삼성전자 실적은 1분기를 저점으로 점진적으로 개선될 것으로 전망하며, 감산을 통해 실적 개선을 앞당길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2분기에도 메모리 가격 하락세가 이어져 실적 반등은 하반기부터 가능할 전망이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D램 평균판매가격이 1분기 20% 하락한 데 이어 2분기에도 최대 15% 하락할 것으로 내다봤다.
고영민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D램과 낸드플래시 모두 재고 부담이 지속되고 있어, 업황이 반등하는 수요 회복 시점은 올해 3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도 연구원도 “작년 2분기부터 진행된 고객사의 공격적인 재고 조정으로 세트 재고가 1분기 정점을 찍고 감소세를 보일 것이며 메모리 재도고 2분기부터 감소가 예상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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