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찐리뷰] 3만명 제주 사람들은 왜 무참히 살해됐나…'제주 4.3' 비극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6일 방송된 '백골시신과 시멘트-1948, 사라진 사람들'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겸 배우 강미나, 배우 장혁진, 김의성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다랑쉬굴에서 발견된 백골
1991년 12월 22일, 크리스마스를 3일 앞둔 제주도. 24세 은희 씨는 억새풀을 마구 헤치면서 걷고 있어. 커다란 배낭을 맨 은희 씨의 손에는 뭔가가 들려 있어. 바로 이 분이 은희 씨야.
은희 씨는 당시 150만원 정도 하는 비싼 캠코더를 장만했어. 이 비싼 걸 왜 샀을까. 그 때 은희 씨가 촬영한 영상이 있어.
"이 오름은 월랑봉(다랑쉬오름) 입니다."
은희 씨는 사람들과 뭔가를 찾고 있었어. 이들은 모두 탐사단 단원들이야. 이들이 찾던 것은 '잃어버린 마을'. 한 할아버지의 제보를 받고, 다랑쉬오름 근처를 헤매던 중이야. 그렇게 오랜 시간 찾아 헤매다가 지칠 대로 지친 단원들. 그런데 바로 그 때, 은희 씨와 같은 탐사단원인 동만 씨가 발 밑에서 수상한 구멍 하나를 발견했어.
동만 씨는 위에 막혀있던 돌을 치우고는 그 안을 들여다 봤어. 깜깜해서 잘 보이지 않아. 다른 탐사대원인 기삼 선배가 손전등으로 안을 비췄어. 그랬더니, 그 구멍 안에서 뭔가 반짝하고 빛나는 게 보여.
"그 굴 속에, 하얀 공 같은 게 보인다…들어가서 보니까, 바닥에 유골들이 쫙 펼쳐져 있는 거에요."
-김동만 탐사단원, 당시 대학생
하얀 공은 해골이었어. 손전등으로 아래 쪽을 비춰봤더니, 아래도 해골, 그 밑에도 해골. 백골 시신이 잔뜩 있는 거야. 백골이 왜 여기 있고, 이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 그걸 알려면, 시간을 좀 더 앞으로 돌려야 해.
▲ 제주도는 '빨갱이' 섬이다? 비극의 시작
1947년 3월 1일, 제주 시내에 있는 한 학교 운동장. 빼곡하게 모인 사람들이 저마다 손에 태극기를 쥐고 있어. 3.1절 기념 행사에 무려 3만명이 모였어. 당시 제주 도민의 1/10이나 되는 인원이야. 3.1절 기념 행사가 끝나고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갑자기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이 들려. 말을 탄 기마경찰이 길 모퉁이를 돌다가, 지나가던 어린 아이를 친 거야. 그런데 그 기마경찰, 그냥 가. 지금으로 따지면, 경찰차가 뺑소니를 치고 도망가는 격이야. 화가 난 군중들은 경찰을 쫓아갔어. 그런데 그 때, 경찰은 폭동이 일어난 줄 알고 시민들에게 총을 쐈어.
이 사건으로 8명이 중상을 입고 6명이 사망했어. 사망자 중에는 젖먹이 아이를 안고 있던 엄마, 15살 소년도 있었어. 3.1절 기념식을 본다고 구경 나왔다가, 경찰 총에 맞아 죽은 거야. 이날의 총성은 비극의 시작이었어.
당시는 한반도 북쪽에 소련이, 남쪽에는 미국이 들어와서 통치하던 미소군정기 시절이야. 근데 제주도의 분위기는 험악했어. 제주도는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들의 탄압이 특히 심했던 곳이야. 지리상 일본이랑 가까우니까. 해방이 되고 일본군이 나가면, 상황이 나아질 줄 알았어. 근데, 미군정은 악독한 친일 경찰들을 다시 고용했어. 그 지긋지긋한 친일 경찰들을 이제는 안 보나 했는데, 미국 입장에서는 행정과 치안을 해왔던 그들을 다시 고용하는게 편하니, 편의상 그들을 다시 고용한 거야. 미국은 친일파 청산에는 관심이 없었거든. 그런 상황에서 경찰이 사람들을 죽였으니, 제주 사람들은 크게 화가 났어. 그런데 경찰에선 사과는커녕, 이렇게 말했어.
"어쩔 수 없어 발포했다. 파괴의 집단은 철저 소청. 경찰관의 발포는 폭도를 선동하는 민중의 일부분이 있는 한 불가피한 일이었다."
-1947년 3월 4일자 한성일보 기사 中
치안을 위한 정당방위였다는 거야. 민심은 폭발했어. 사람을 죽인 경찰을 처벌하라며, 요즘 시대 '촛불혁명' 같은 일이 제주도에서 일어났어. 기관, 학교, 회사들이 총파업에 들어갔어. 무려 95%가 동참했대. 제주도에 묘한 긴장감이 돌았어. 그런데 총파업 후 '경찰이 파업한 사람들 잡아갔대', '죽기 직전까지 고문했대' 라는 소문이 돌았어. 당시 경찰은 시위 참가자 2500명을 검거했다고 해.
1948년 4월 3일 새벽, 산과 오름에 봉화가 올라왔어. 탄압에는 항쟁으로 맞서겠다며, 제주도에 있는 좌익 무장대가 경찰서를 습격한 거야. 이날 경찰관, 우익 인사 등이 사망했어. 이 소식은 서울까지 전해졌는데, 제주도를 아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한 사람이 있었어. 당시 유력한 대통령 후보, 이승만 박사야. 대통령 당선이 목표인 이승만 박사가 제주도를 못마땅해 한 이유가 있어.
사진 속 제주 도민들은 소 끌고 식량을 챙겨서 산으로 올라가고 있어. 이때는 1948년 5.10 총선거 일주일 전이야. 5.10 총선거는 대통령이 되려는 이승만한테 중요한 선거야.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고자 하는 계획의 일부였어. 김구 등 민족 지도자들은 '남북통일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어. 그래서 아예 5.10 총선거에는 출마를 안 했어. 그런데 사진 속 이 사람들은 총선거를 앞두고 산으로 올라갔지. 투표 보이콧을 하려고, 투표를 하지 않기 위해서 산에 올라간 거야. 5.10 총선거를 반대한 제주도민들은 통일 정부를 원하고 남한 단독선거를 거부했어. 그렇게 5.10 총선거에서 과반 투표율을 넘기지 못한 곳이 딱 두 곳 있어는데, 전부 제주도였어.
이 결과를 보고 이승만과 미군정은 탐탁지 않아 했지. 그래서 이렇게 몰아붙였어. "제주도는 빨갱이 섬이다"라고.
미군정은 곧장 구축함을 보내 제주도 해안을 봉쇄시켰어. 그리고 육지에서 응원 경찰 수백명을 파병했어. 제주도로 향한 경찰, 군인들. 이 때부터 제주에는 끔찍한 피바람이 휘몰아쳐. 이 사건,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그래 맞아. 바로 '제주 4.3 사건'이야.
▲ 6세 어린 소녀 가족의 비극
이때부터 제주도에는 이런 말이 돌기 시작했대. "쉿, 속솜허라이"라고. "조용히 해라"는 의미야. 종달리에 사는 6살 복순이도 이 얘기를 들었대.
복순이는 이날도 신나게 친구들과 놀다가 들어왔어. 근데, 집에 와 보니까, 분위기가 싸늘해. 그때, 창고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가서 봤더니, 누가 사다리를 타고 천장 위 다락으로 올라가. 복순이의 오빠였어. 그리고 아래 쪽에선 복순이 엄마가 그 사다리를 잡고 있어. 복순이의 오빠 명립이는 당시 스무살. 14살 차이가 나는 동생 복순이를 엄청 예뻐하는 오빠였어.
엄마가 복순이를 발견하더니 바로 그 말을 했어. "쉿, 속솜허라이"라고. 그러면서 누군가 오빠 어디 있냐고 물으면, 숨었다고 하지도 말고 봤다고 하지도 말라고 신신당부했어. 복순이는 영문도 모르고 알겠다고 했어. 그날 이후로 복순이 눈 앞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해.
해녀이던 엄마는, 매일 나가던 물질을 안 나가. 대신 남들 몰래 밥을 해서 다락의 오빠한테 전해줬어. 천장도 낮은 다락에서 허리도 못 펴고 숨어있는 오빠가 복순이는 너무 이상해 보였어. 그런데 어느 날, 집에서 엄마가 뛰쳐나와. "복순아, 네 오빠가 없어졌다. 분명히 네 오빠 누가 데려갔다"면서, 엄마 얼굴이 눈물 범벅이야.
복순이네 다락은 엄청 높아. 누군가 사다리를 받쳐주지 않으면 혼자서 못 내려와. 그러다 보니 엄마는 오빠를 누가 데려갔다고 의심한 거야.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 뿐만이 아니었어. 사람이 계속 없어져. 그 마을 청년들 몇 명도 연기처럼 사라졌어.
이때 남자들은 걸핏하면, '빨갱이', '폭도'로 몰려서 잡혀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어. 복순이 엄마는 오빠를 지키기 위해 다락방에 숨긴 거야. 그런데 오빠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고, 엄마는 매일 문 밖을 내다 봤어. 그런데 며칠 후, 동네 사람들이 누굴 업고 집으로 찾아왔어. 복순이 아버지였어. 온몸이 피투성이야. 아버지는 경찰서로 끌려가 오빠의 행방을 물으며 모질게 폭행한 거야.
"오빠를 누가 잡아간 줄로만 알지, 어디 갔는지는 몰랐어요. 우리 아버지가 '나도 모르게 나갔다'고 하니까. 아들 안 찾아온다고 막 때려버려서 걸어오질 못하니까, 사람들한테 들려서, 나무때기 안에 넣고 들려서 집에 온 거야. 뼈를 맞고 하니까 걷지를 못한 거야. 화장실에도 못 다녀. 그렇게 (경찰이 아버지를) 심하게 때린 모양이야."
-함복순, 당시 6세
근데 오빠가 없어졌으면 없어진 거지, 왜 아버지를 끌고 가서 때린 걸까? 그 시절에는 없어진 사람을 '산폭도들'이라 부르며, 산에 올라가서 전쟁을 일으키고 누군가를 죽일 것처럼 나쁘게 봤어. 위에서 이런 명령이 내려왔기 때문이야.
"과격분자를 숙청"
"군은 천인공노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적 극열 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해안선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포고를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1948년 10월 20일자 동아일보 기사 中
말하자면, 마을에 없는 사람은 산폭도이고, 그들을 총살시켜도 된다는 명령이야. 이른바, '초토화 작전'이야.
이 붉은 지역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거야. 제주 도민 중에 많은 사람들이 중산간 지역에 살고 있는데, 그 안으로 허락없이 들어가지 말라는, 말도 안 되는 지시가 내려왔어.
그리고 이승만은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어. 이후 그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한 거야. 이때부터 제주도는 완전히 군대와 경찰로 포위됐어. 아무도 밖으로 못 나가. 심지어 이승만은 '서북청년단'을 제주도에 같이 투입했어.
서북청년단. 한국의 서북 지방, 즉 이북 출신의 청년들이야. 공산당에 쫓겨 남한 땅으로 내려온 사람들인데, 공산당에 자기 가족을 잃은 사람도 있어. 그러다 보니 이들의 목표는 반공. 이승만은 서북청년단에게 "당신들이야말로 신원이 가장 확실한 사람들이다. 저기 남쪽 끝 외딴 섬에 빨갱이들이 있다"라고 말해. 대통령이 민간인에게 테러를 지시한 거야. 그렇게 제주도에 내려온 서북청년단은 경찰이나 군인보다 훨씬 더 잔인했다고 해.
복순이는 너무 무서워서, 매일 가던 바닷가도 더 이상 못 나가. 어느 날 밤, 해가 졌는데 이번엔 엄마가 집에 안 와. 복순이는 화장실도 못 가는 아버지 소변을 치우고, 밭에서 쑥도 캐서 아버지 상처에 발라드렸어. 어린 나이지만 기특했어. 그런데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엄마가 안 와. 복순이는 뒤늦게 겁이 덜컥 나기 시작했어.
어느날 새벽,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어. 복순이는 잠을 자다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어. 보니까 저 멀리 도로변에 사람들이 웅성웅성해. 가보니까, 저 끝 모래사장에 여러 사람들이 자고 있는 듯 누워 있었어. 복순이는 집으로 막 뛰어가 아버지한테 이 사실을 전했어. 근데 아버지가 복순이를 막 다그쳤어.
"'아버지, 저 뒤에 어떤 사람들 막 모래에 저 앞동네 사람들 막 누워있어' 했더니 우리 아버지가 '가지 마라, 너희 엄마도 잡아다가 죽여버렸을 거야' 그랬어요. '우리 어머니를 누가 죽여 우리 어머니는 오라방 찾으러 나갔는데' 했죠."
-함복순, 당시 6세
엄마는 오빠를 찾으러 갔던 게 맞아. 오빠를 찾아 다니다가 군인, 경찰, 서북청년단으로 이뤄진 토벌대를 만났어. 이 토벌대는 엄마와 마을 사람들을 모래밭으로 끌고 갔어. 그리고, 탕! 탕! 탕! 복순이 엄마를 총으로 쐈어. 왜 엄마를 죽였느냐, 바로 대살(代殺), 대신 죽으라는 거야. 도피자의 가족이니까.
복순이는 믿기지 않았어. 이 모든 게 6살 복순이한테는 비현실적이야. 복순이가 울면서 잠이 들었어. 그런데 이상한 냄새가 나. 밖으로 나가니까 집이 불바다야. 근데 아버지는 거동을 잘 못하시잖아. 이 어린 복순이가 죽을 힘을 다해 아버지를 일으키려 하는데, 그만 정신을 잃었어. 눈을 떴을 땐, 지붕이 아니라 파란 하늘이 보여.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복순이와 아버지는 목숨을 건졌어. 몸을 일으켜 세운 복순이는 마을 곳곳이 불에 타버린 걸 목격했어. 마을에 불을 낸 것도 토벌대의 짓이야. 빨갱이라 생각하는 도피자들의 가족이라고.
▲ 3만명의 희생자를 낸 끔찍한 학살
한편, 복순이네 마을 근처 바닷가 쪽. 8살 광치는 4살 동생 광언이의 손을 꽉 잡고 있어. 근데 이들이 있는 곳은 집이 아니라, 바닷가 움막이야. 광치네 가족도 도망친 거야. 아버지가 어느날 사라졌거든.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광치와 광언이까지, 온 가족이 다 같이 바닷가 움막에 숨어있어. 그런데 바로 그 때, 동생 광언이가 갑자기 울었고, 토벌대한테 들키고 말았어.
토벌대는 어린 광치랑 광언이는 풀어줬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대로 끌려 갔어. 그리고 가다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총으로 쐈어. 왜? 걸음이 느리다는 이유로. 어머니는 경찰서로 끌려 갔어. 광치 형제는 제발 엄마가 돌아오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했어. 하지만 엄마는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어. 복순이네 엄마처럼 '대살' 당한 거야. 그렇게 8살 광치랑 4살 광언이 형제는, 순식간에 가족을 잃었어.
"형님이 4.3 당시 8살이라 그 당시 상황을 전부 다 목격하고 그걸 전부 다 알고 있는데. 나는 전혀 기억이 없어요. 난 전혀 몰라요. 4.3에 대해 전혀 몰라. 나중에 형님이 어머니 제삿날 날 보고 '너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고. 그것이 내가 기가 막힌 거예요. 왜 그러냐 했더니, '그때 숨어있다가 네가 우는 바람에 잡혀갔다'는 거야. 그 때부터 형님이 눈물을 막 흘리면서 그 당시에 모든 상황을 나한테 얘기해주는데. 나도 울고 형님도 울고, 제사도 지내는 둥 마는 둥 눈물바다로 치르고 왔어요. 형님은 계속 그냥 그때 내가 울어서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잡혀가서 죽었다는, 그런 기억에 꽉 박혀서 나만 보면 그냥 갑자기 화가 나는 거야. 그거 때문에 나를 그냥 미워하는 거야. 평생 나를 미워한 거야."
-고광언, 당시 4세
그 어린 아이들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피해를 입은 사람들끼리 서로 원망한다는 게 너무 안타깝지. 복순이네와 광언이네, 종달리 마을에서만 이런 비극이 있었을까? 이건 제주도 마을 별로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정리한 거야.
여기 숫자들은, 당시 돌아가신 사람들의 수야. 노형리 마을은 538명으로 희생자가 가장 많았어. 마을마다 편차는 있지만, 사망자가 없는 마을은 제주도 전체에 단 한 곳도 없어. 이런 식의 학살이 얼마나 길게 이어졌을까? 무려, 7년 7개월. 피해자는 다 합쳐서 15,000여명으로 공식 집계됐어. 실제로는 3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해됐을 걸로 추정돼. 이는 당시 제주 사람 9명 가운데 1명이 죽은 셈이야.
"그 여인은 남편이 산에 오르자 만삭의 몸을 이끌고 친척이 있는 성읍리로 와 갓 출산한 상태였는데 마을에 남아있던 경찰은 그녀를 끌어내 발가벗긴 채 마을의 여인들에게 창으로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결국 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아기가 옆에서 바둥거리자 경찰은 아기 얼굴에 대고 총을 쏘았습니다."
-표선면 성읍리 김원형 씨의 증언
"나와 10살 난 동생은 어머니와 함께 묶였죠. 어머니의 호소로 10살 난 동생은 풀려났지만 내게는 '눈망울이 동글동글한 게 폭도들에게 연락함 직한 놈'이라며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순간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바로 옆에 나란히 묶인 어머니가 나를 덮치며 쓰러졌습니다. 총에 맞은 어머니의 몸이 요동치자 내 몸은 온통 어머니의 피로 범벅됐습니다."
-애월면 하귀리 부모를 잃은 안인행 씨의 증언
시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나서 자행한 끔찍한 학살. 피바람이 몰아친 후, 복순이, 광치 광언이 등 많은 사람들은 입을 닫아 버렸어. 가족끼리도 그 때 일은 입 밖으로 안 꺼냈어. 연좌제로 엮여서, 가족들에게도 그 죄를 물을까봐. 잡혀갈까봐 말을 못하는 거야. 그렇게 4.3은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되었어.
▲ 백골 사체들이 나란히 누워있던 이유
세월은 흐르고 흘러 다시, 백골 사체들이 발견된 1991년 12월 24일. 잃어버린 마을의 조사단 은희, 동만, 기삼 선배가 다시 제주도 다랑쉬오름을 찾았어. 사실 이들은 '4.3연구소' 소속이야. 이들은 앞서 발견한 백골의 실체가 뭔지 확인하기 위해, 폭 60cm의 좁은 구멍에 몸을 밀어 넣었어. 오리 걸음으로 조심조심 한 2m쯤 내려갔을까, 갑자기 좁았던 구멍이 확 넓어지고 큰 동굴이 나와. 눈 앞에 펼쳐진 놀라운 광경에 이들은 말을 잇지 못했어.
"제가 들어갔을 때 첫 느낌은, 여기 되게 폭하다(아늑하다). 유해가 그런 상태인 줄 모르고 간 거죠."
-김은희, 4.3연구소 연구실장
"처음 들어가는 입구는 굉장히 좁은데, 좀 들어가면 넓게 하나의 방같이 돼 있는데, 그런데 이게 유골들만이기 때문에 한꺼번에 죽은 건지 어떤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때 살았을 때 모습 자체가 연상이 될 정도로 그렇게 쭉 있었던 거예요."
-김동만, 당시 제주 4.3연구소 연구원
허파 모양처럼 생긴 두 개의 방, 10구의 시신이 나온 한 쪽 공간은 17평 정도, 1구의 시신이 있던 곳은 12평 정도 크기였는데 솥, 그릇, 칼, 수저 등 부엌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어. 사람들은 이 동굴 안에서 생활했을 것으로 추정돼. 근데 볼수록 이상한 게 있어. 백골 시신들이 줄 지어 나란히 누워있는 모습이었어.
"어떻게 이렇게 누워있지? 누워 있어서 그게 제일 충격이었고. 저희가 오키나와 자살 관련한 간접 학살에 대해서 그것도 많이 공부한 상태여서. '4.3도 이런 자살이 있었나' 이걸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했나 이 분들이, 이런 생각을 제가 했었던 거 같아요."
-김은희, 4.3연구소 연구실장
연구소 사람들은, 일단 '속솜하기'로 했어. 조용히 비밀로 하고 은밀하게 알아보기로 한 거야. 91년도만 해도, 4.3에 관련한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쉬쉬하는 분위기였거든.
3개월 뒤, 1992년 3월. 제민일보 막내 기자 김종민 기자는 차를 타고 취재를 가던 중에 전화를 받았어. 다랑쉬굴을 발견한, 바로 그 동만 씨의 전화였어. 동만 씨는 "형 놀라지 말고 들어요. 얼마 전에 동굴에서 백골이 나왔어요"라고 알려줬어. 이 말을 들은 김종민 기자는 갑자기 말이 없더니 "그거 혹시 구좌읍 쪽이야?"라고 물었어. 김종민 기자가 알고 있으니, 동만 씨는 깜짝 놀랐어. 몇 년 전에 김종민 기자의 선배가 4.3을 취재하면서 어떤 한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그 할아버지가 "내가 다랑쉬 인근 동굴에서 잠깐 살았어"라고 말했었대.
"이것이 이제야 세상에 드러나는구나. 확신을 갖게 됐죠. 4.3연구소가 발견했다는 그 굴이, 저희들이 취재한 내용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된 것이죠."
-김종민, 당시 제민일보 기자
며칠 뒤 김종민 기자는 그때 그 할아버지를 모시고, 굴 입구에 도착했어. 당시 61세였던 채정옥 씨. 동만 씨는 동굴에 들어가기 전, 채정옥 씨한테 내부가 어떻게 생겼냐고 물었어. 할아버지가 정말 이 동굴을 알고 있는지 확인해보려 한 거야. 채정옥 씨가 입을 열자마자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졌어. 굴 안을 엄청 세세하게 묘사하는 거야. 잠시 후 채정옥 씨는 동굴에 들어섰고, 들어가자마자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어.
"맞네요. 내가 이 시신들을 정리한 사람입니다.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당시 학교 선생님이었던 채정옥 씨는 1948년 11월, 토벌대를 피하려고 이 다랑쉬굴에서 2~3일 정도 머물렀대. 여기서 사람들이랑 밥도 나눠먹고 잠도 같이 잤어. 그 힘든 와중에 함께 했으니 서로가 의지가 됐겠지. 그리고 며칠 후, 채정옥 씨는 다른 피난처로 옮겼어.
얼마 후 12월 18일, 채정옥 씨가 피난처 밖으로 나왔는데 저 멀리 들판에 방목해 놓은 말들이 도망을 치더래. 군경 토벌대가 등장한 거야. 토벌대의 대토벌 작전이 시작됐어. 채정옥 씨는 급하게 피난처로 몸을 숨겼어. 제발 무사히 지나가라며 빌었고, 다행히 발각되지는 않았어. 그리고 한참 후에 밖에 나왔는데, 사방이 불길이야. 토벌대가 인근 중산간 마을을 다 태워버린 거야.
채 선생님은 다랑쉬굴 쪽도 피해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급히 다랑쉬굴로 향했어. 근데 입구가 돌로 막혀있어. 그리고 돌 사이로 연기가 막 새어 나와. 사람들이 위험하다는 걸 직감한 채정옥 씨는 돌을 헤집고 안으로 기어 들어갔어. 숨을 참고 다가가는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다 벽 쪽에 붙어있어. 가까이 가보니까, 사람들이 돌 구석이나 땅 속에 코를 파묻고 죽어있는 거야. 숨을 쉬려고 애쓰다가 죽어간 거야. 시신들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어. 눈, 코, 귀에서 피가 흘러. 어떤 사람들은 손톱이 다 빠질 정도로 땅을 파놓은 흔적이 있어.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웠을까.
다랑쉬굴 사람들은 어쩌다가 토벌대에게 발각된 걸까. '냄새' 때문이었대. 누군가 굴 밖에서 볼일을 보고 처리를 제대로 못했던 거야. 토벌대는 그 냄새를 맡고 이들을 찾아냈고, 다랑쉬굴 안으로 총을 마구 쐈어. 안에 있던 사람들은 총격에도 밖으로 안 나왔어. 그래서 토벌대는 그 굴 입구에 불을 피웠어. 그래도 아무도 안 나왔어. 결국 토벌대는 굴 입구를 막았어. 질식사 시키려고. 토끼몰이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을 죽인 거야. 그렇게 다랑쉬굴 사람들은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어.
그날 굴에 들어갔던 채정옥 씨는 그냥 떠날 수가 없었어. 그래서 시신을 한 분 한 분 가지런히 눕히고, 순서대로 번호와 이름을 기록했어.
"4.3사건 나고 나니까 하여튼 종달리는 서북청년회나 경찰이나 혹은 군인들이 와서 젊은 사람들을 아주 못 견디게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죽는다' 그 당시에는 저 어디 육지나 이런 데도 갈 수 없었고 계엄령 선포했으니까. 피할 수 있는 곳은 산 밖에 없단 말이에요. 그래서 산에 피신한 게 결국 그 굴 속에 있다가 토벌대를 만나게 된 거지. 그 사람들이 뭐 당초부터 4.3사건에 관여됐거나 이런 사람들은 아닙니다. 내가 알기에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입니다."
-채정옥, 당시 다랑쉬굴 시신 수습(1997년 인터뷰)
괴롭혀서 도망치게 만들고, 도망가면 죽였던 토벌대. 심지어 시신 중에는 9살 아이와 여자의 시신도 있었어. 다랑쉬굴 얘기는 여기가 끝이 아니야.
▲ 40년이 지나도, 여전히 목소리를 못 낸 유족들
1992년 종달리 복순이네 집. 6세 어린 나이였던 복순이는 어느새 49세가 됐어. 복순 씨는 TV를 보다가, 다랑쉬 마을 동굴에서 1948년 4.3사태 때 희생된 것으로 보이는 사람의 유골 11구와 생활용품들이 발굴됐다는 뉴스를 접했어. 그리고 복순 씨는 전화 한 통을 받았어. 44년 전에 사라진, 오빠 명립 씨가 발견됐다는.
"아이고. 정말 그때 생각하면 눈물이 나서 살지 못해. 다랑쉬에서 시체 발견됐다고 하니까 아이고 '어디서 시체 발견됐어요? 나 그때 (다랑쉬오름에)다닐 땐 그런 데 못 봤는데. 나무하러 다녔을 때도 못 봤는데'. 그 다랑쉬에 거기 있을 줄은 우린 꿈에도 생각 못 했어. 뭐 그렇게 다랑쉬에 있는 줄도 모르고. 어디 갔는지도 모르고. 난 우리 어머니를 묻었어도 모르니까 한 40년을, 40년 이상 몰랐어."
-함복순, 故함명립 유족
바로 지척에 오빠가 있었는데 몰랐어. 당시 복순이 오빠는 마을 청년들과 다랑쉬 굴로 숨어들었던 거야. 종달리에서 다랑쉬굴까지는 고작 12km 정도 거리야. 바로 지척에 있었는데, 평생을 그리워하기만 한 거야. 그리고 광치, 광언 형제 아버지의 유해도, 이 다랑쉬굴에서 발견됐어.
동생 광언 씨는 1992년 당시 직업 군인이었어. 그런데 이 다랑쉬굴이 발견되고 엄청난 결정을 해. 30년동안 입었던 군복을 벗은 거야. 전역이 불과 6개월 밖에 안 남은 상태에서. 군이랑 토벌대가 가족들을 죽였는데, 그 군인과 똑같이 자신도 군인이라는 걸 참을 수 없었던 거야.
"(아버지가) 4.3때 돌아가셨다는 말만 들었지, 언제 어디서 누구한테 죽었는지 전혀 몰랐거든요. (조부모님과 부모님을) 나와 같은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가서 죽였다는데, 내 스스로가 그냥 죄인이 된 거 같고. 내가 국가에 충성을 한 건지, 조상들한테 뭐 효도한 건지 불효한 건지. 그것도 모르고 내가 군복을 입고 근 30년 가까이 그들하고 똑같이 놀았다는 게 기가 막힌 거야."
-고광언, 故고순환 유족
그 후, 이 사건은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졌어. 유족들은 유해를 잘 수습해서 합장하고, 제대로 진상조사를 하기 원했어. 이 다랑쉬굴 자체가 4.3 학살의 증거잖아. 증인도 있고. 그런데, 보도가 나간 뒤 며칠 안 돼 다랑쉬굴은 이렇게 됐어.
다랑쉬굴 입구를 시멘트로 막아놓은 거야. 그리고 허가없이 무단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까지 붙었어.
"어쨌든 유해가 발견된 곳이니까 그 유해를 누군가 훼손해서도 안 되니까. 뭐 명분은 보존이었겠죠 명분은. 그런데 나중에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니까, '이건 의도가 그게 아니구나'라는 걸 이제 알게 된 거죠."
-김종민, 당시 제민일보 기자
또 한 번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 발견된 유골을 화장하기로 결정했다는 거야. 사실 제주도에서 화장 문화는, 당시만 해도 큰 결례였어. 이 화장은 읍내의 장이 주최한 유족회의에서 결정됐대.
"유족들이 화장을 원한다, 행정에서는 오히려 매장을 권함에도 불구하고 유족들이 화장을 원한다(고 이야기한 읍관계자) 근데 제가 취재했던 유족들의 뜻과 완전히 180도 다른 얘기였거든요? 그래서 이게 무슨 소리냐, 했죠."
-김종민, 당시 제민일보 기자
알고 봤더니 유족대표한테 도장만 빌려 달래서 빌려줬는데, 읍이랑 행정기관에서 마음대로 화장해버리기로 처리하고 도장을 찍어버린 거야. 사기를 친 셈이지. 실제로는 회의가 열리지도 않았대.
"압력이 막 들어오더라고 벌써. 빨리빨리 정리해야 된다는 식으로. 지금은 (화장한 걸) 후회를 많이 하죠. 억지로 한 거죠. 그냥 강제로 한 거 아닙니까. 빨리빨리 정부에서 빨리 처분하라 해서."
-고관선, 故고태원(다랑쉬굴 발견) 유족
"동의, 뭐 어떻게 그때야 뭐 자유가 있어? 자유가 없어. 거기서 하라는 대로 그냥. 지금 같으면 우리도 희생자로 알고 하면 큰소리 내겠지만, 폭도라고 하니까 그때 하겠다고 말도 못해요. 그래서 내가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그런 말 하지도 못하고. 완전 나쁘게 봐."
-함복순, 故함명립 유족
평생 빨갱이 가족 취급을 받았잖아. 그걸 또 겪게 될 까봐 두려웠던 거야. 그래서 유족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꾹 참았어. 11구의 유해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화장터로 이동했어. 그렇게 44년동안 어둠 속에 갇혀있던 다랑쉬굴 사람들은, 제대로 빛 한 번 못 보고 한줌의 재가 됐어.
"너무 조촐한 장례식. 술잔 11개만 놓여진 너무 초라한 이 장례식이, 똑같이 우리 유족들도 너무 초라해 보이는 거예요. 진짜 의견 하나, 자기 주장 하나 못하는, 너무 무기력한 이런 것들이 너무 눈에 보였고."
-김은희, 제주 4.3연구소
"이건 남의 시체라고 생각 안 하고 이렇게 장갑도 안 끼고 (유골 가루를) 손으로 잡으니까 재가 따뜻해요. 남의 시체라고 생각 안하고 '내 오빠 시체인가' 그것만 생각하니까. 맨손으로 그 재를 잡아봤으니까. 물에 가서 가족들이 다 뿌렸으니까. 있을 거 아니에요 뿌려도 물에는 있을 거 아니에요. 있는지 없는지 몰라도 그렇게 생각해요. 찾지 못했던 시체 못 찾는 거 그렇게 화장해서 바다에 뿌리니까. 그래도 마음이 놓여."
-함복순, 故함명립 유족
복순 씨와 광치 형제가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바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가장 아픈 기억이 있는 그 바다에, 오빠랑, 아버지를, 보내드렸어.
▲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은 4.3
그래도 다랑쉬굴 사건은, 4.3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됐어. 이 사건 이후 7년만에 4.3특별법이 통과됐고, 이 법을 토대로 4.3진상조사도 이뤄졌어. 2003년에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 사과했지. 그게 국가 원수로는 최초로 4.3에 대해 사과한 거야. 무려 56년 만의 일이야.
"유가족 여러분, 우리는 오늘 분단과 냉전이 불러온 불행한 역사 속에서 무고하게 희생당한 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함께 모였습니다…. 오랜 세월 말로 다 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가슴에 감추고 고통을 견뎌오신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국가 권력이 불법하게 행사되었던 잘못에 대해서 제주도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사과할 때 우리 (유가족) 4만명 다 울었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사과를 해주니까. 나라 원수가 이렇게 와서 사과하니까 4만명이 눈물바다가 돼버렸어요."
-고관선, 故고태원 유족
"그냥 난 먼저 우리한테 '희생자'라고 하니까. 그렇게 막 '산폭도'라고 막 하다가 희생자라고 나오니까. 아이고… 난 희생자로, 우리 오빠 한 풀어서 그걸로 만족하죠."
-함복순, 故함명립 유족
입 밖에 꺼내지 못했던 말들. 평생 들어온 빨갱이라는 누명을 43년이 지나서야 벗었어. 그 이후 많은 이들이 4.3 공원을 찾고 있어.
그래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과제가 많아. 행방불명돼서 생사를 모르는 분들, 불법 군사재판을 받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신 분들,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산 유족들까지.. 이분들에게 4.3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야. 제대로 된 표지판 하나 없이 여전히 황량한 다랑쉬굴처럼.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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