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NBA 출신’ 우직했던 빅맨, 코트니 심스
2010년대 프로농구에서 오랫동안 뛰었던 선수들은 많았다. 애런 헤인즈, 로드 벤슨, 트로이 길렌워터 등이 있었으나 코트니 심스도 빼놓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선수들처럼 돋보이는 활약은 아니었으나 골밑에서 나름 데로 자신의 역할을 잘 해냈다. 외국 선수가 한 명이 뛸 때 주전과 벤치를 오가며 기복을 동반하긴 했으나 골밑의 확실한 파수꾼이었다.
대학 시절과 KBL 진출 이전
심스는 메사추세츠주 로스린데일에서 태어났다. 메사추세츠주에 소재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미시건대학교로 진학했다. NCAA 미시건 울버린스는 전미를 통틀어 최고 명문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러나 좋은 학교였던 만큼, 훌륭한 선수들이 즐비했다.
심스가 주로 벤치에서 나서야 했다. 그러나 큰 신장을 바탕으로 높이를 구축하는데 도움이 됐다. 신입생 때부터 중용되기 시작했다. 1학년이던 지난 2003~2004 시즌에는 34경기에 나섰다. 22.1분을 소화하며 7.7점(필드골 성공률 : 54.7%, 3점슛 성공률 : 12.5%, 자유투 성공률 : 57.8%) 4.7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미시건의 선수층을 고려하면 심스가 신입생임에도 20분 이상을 뛴 것은 고무적이었다. 2학년인 2004~2005 시즌에는 31경기에서 평균 23.2분 동안 9.8점(필드골 성공률 : 59.0%, 3점슛 성공률 : 20.0%, 자유투 성공률 : 20.0%) 5.2리바운드를 올렸다. 직전 시즌보다 좀 더 많은 누적 득점을 기록했고, 야투 성공률 역시 높았다.
3학년인 2005~2006 시즌에는 33경기에서 경기당 22.9분을 뛰며 10.9점(필드골 성공률 : 63.3%, 3점슛 성공률 : --.-%, 자유투 성공률 : 71.2%) 5.7리바운드를 올렸고, 졸업반인 4학년 때는 가장 많은 35경기에 나섰다. 평균 24.6분 동안 11.5점(필드골 성공률 : 57.0%, 3점슛 성공률 : --.-%, 자유투 성공률 : 72.3%) 6.2리바운드를 보탰다.
기록은 좋아졌다. 하지만 실력 상승이 뚜렷하지 않았다. 공격 기술이 제한적이었고, 활동 범위도 넓지 않았다. 졸업과 함께 지난 2007 NBA 드래프트에 명함을 내밀었으나 지명을 받지 못했다. 직접 지명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NBA와 인연이 없진 않았다. 인디애나 페이서스 트레이닝캠프의 부름을 받았고, 프리시즌을 거치면서 살아남았다. 2007~2008 시즌 첫 경기에 나섰다. 워싱턴 위저즈전에 나서 7분 여를 소화했고, 11월과 12월에 각각 한 경기에 나섰으나 득점을 올리진 못했으나 NBA를 경험한 건 의미가 있었다.
2008~2009 시즌에는 뉴올리언스 펠리컨스와 계약했으나 살아남지 못했고, 시즌 중에 피닉스와 10일 계약을 맺었으나 한 경기 출전에 그쳤다. 한 시즌을 D-리그에서 보냈다. 한 시즌 내내 D-리그에서 보냈다.
하지만 D-리그에서 가치를 높였다. D-리그 올스타전 MVP는 물론, D-리그 정규시즌 MVP에 선정됐다. 시즌 막판에 뉴욕 닉스와 10일 계약을 체결했으나 마찬가지로 한 경기를 뛴 것이 전부였다. 두 번째 10일 계약을 끌어내지 못했고, 그의 NBA 생활을 마쳤다.
지난 2009~2010 시즌부터 해외 리그를 찾아다녔다. 러시아 명문인 CSKA 모스크바를 시작으로 푸에르토리코와 벨기에를 거쳤다. 2010~2011 시즌에는 자신이 뛰었던 아이오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중국과 라트비아를 경험하기도 했다.
전주에서
심스는 2012~2013 시즌을 앞두고 한국 무대로 향했다. 당시 외국 선수 드래프트에서 KCC가 엄청나게 낮은 확률을 뚫어내고 1라운드 1순위 지명권을 손에 넣었다. 허재 감독(현 캐롯 사장)이 이끈 KCC는 1순위 지명권으로 당시 모인 선수들 중 최고의 경력을 자랑했던 심스를 호명했다.
당시 KCC의 전력 약화는 뚜렷했다. 하승진이 군에 입대했고, 귀화혼혈선수 규정 때문에 전태풍이 팀을 떠났기 때문. 심스의 활약이 중요했다. 그러나 시즌 준비 과정에서 잔부상이 있었던 그는 잠시 자리를 비워야 했다.
하지만 복귀한 후 나름의 활약을 했다. 안쪽에서 분전하고도 패하는 경기가 많았다. KCC는 시즌 내내 하위권을 전전했다. 주요 선수의 이탈로 인한 공백을 메우지 못했다.
다른 외국 선수도 문제였다. KCC는 레니 다니엘을 드래프트에서 불러들였으나 시즌 개막 전에 교체를 피하지 못했다. 심스에 이어 또 다른 NBA 경력자인 존 토마스를 불러 들였으나 토마스도 뚜렷한 대안이 되지 못했다.
KCC는 심스가 부상일 때 안드레 브라운을 일시 대체 선수로 불러 들였다. 이후 심스가 돌아온 후에는 토마스를 방출하고 브라운을 두 번째 외국 선수로 낙점했다. 시즌 중 외국 선수 부상과 교체가 적지 않았기에, KCC의 2012~2013 시즌이 얼마나 험난했다. KCC는 시즌 중에 결단을 내렸다.
서울에서
KCC는 핵심 전력인 주요 외국 선수인 심스를 매개로 다른 전력을 확보하기로 했다. KCC는 시즌 도중 SK와 트레이드는 단행했던 이유.
애런 헤인즈를 중심으로 리그 1위를 질주하고 있던 SK는 골밑에서 힘을 보탤 만한 센터 부재로 골머리를 앓았다. 트레이드를 통해 안쪽을 보강하기로 했다. SK는 크리스 알렉산더와 전력 외로 밀려난 김효범을 보내고, KCC로부터 심스를 받았다.
당시 SK는 김선형과 헤인즈를 필두로, 최부경, 김민수, 박상오 등 다수의 토종 포워드를 주요 전력으로 삼았다. 가드부터 포워드까지 탄탄했으나 센터가 부족했다. SK는 KCC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심스를 더하면서 높이를 보강했다.
KCC에서 핵심 전력으로 활약했던 심스는 SK에서 벤치에서 나섰다. 팀내 유일한 센터로 역할을 했다. 헤인즈의 쉬는 시간을 메우기는 충분했으며, 매치업에 따라 SK가 다양한 전력을 꾸릴 수 있었다.
SK는 결국 정규리그 1위로 플레이오프에 나섰다. 통합 우승을 원했다. 4강 플레이오프에서 안양 KGC인삼공사를 네 경기 만에 제압했다. 이어 울산 모비스(현 울산 현대모비스)와 챔피언 결정전을 치렀다.
그러나 SK는 챔피언 결정전에서 모비스에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단 한 경기도 따내지 못한 것. 이전까지 맹공을 퍼부었던 헤인즈가 결승전 네 경기에서 평균 11.8점에 그친 것이 뼈아팠다. SK의 빅포워드는 모비스의 문태영과 함지훈을 당해내지 못했다. SK는 심스를 뚜렷하게 활용하지 못했다. SK는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SK는 외국 선수 전력을 유지하기로 했다. 선수층이 두터웠고, 우승에는 실패하긴 했으나 모비스를 제외하면 다른 구단을 압도하긴 충분했다. 그러나 SK는 선전했음에도 3위로 2013~2014 정규리그를 마쳤다.
6강 플레이오프에서 고양 오리온(현 고양 캐롯)을 따돌린 SK는 모비스와 4강 플레이오프에서 만났다. 전년도에 결승에서 조우했으나 준결승에서 만나게 된 것. SK는 이번에도 모비스를 넘어서지 못했다. 심스는 로드 벤슨과 라틀리프(현 라건아)를 상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SK와 심스의 동행은 이듬해에도 계속됐다. SK는 2014~2015 시즌을 앞두고도 헤인즈와 심스로 외국 선수 진영을 꾸렸다. 헤인즈와 심스는 세 시즌 연속 함께 했고, SK는 어김없이 플레이오프에 올랐다. 6강 플레이오프를 무난히 뚫을 것으로 예상됐다. 상대가 인천 전자랜드(현 대구 한국가스공사)로, SK보다 약한 전력을 지녔기 때문.
그러나 SK는 뜻하지 않은 부상에 흔들렸다. 전자랜드와 1차전을 치르는 도중 3쿼터에 헤인즈가 다친 것. 헤인즈는 아킬레스건이 파열됐고, 시리즈 남은 일정을 소화할 수 없게 됐다. 이로 인해 SK는 심스만으로 남은 일정을 치러야 했다. 심스와 SK의 토종 선수들은 선전했으나 고비를 넘지 못했다.
부산에서
SK는 더 이상 기존 외국 선수와 함께 할 수 없었다. 보유 가능 기간이 만료됐기 때문. 심스는 다시 드래프트에 다시 나섰다. 부산 KT(현 수원 KT)의 부름을 받은 심스가 KCC 시절처럼 주도적인 농구를 펼쳐야 했다. 그러나 심스가 한계를 보였고, 가드가 강하지 않았던 KT에는 심스를 제대로 활용하는 것도 어려웠다.
좋은 요소도 있었다. KBL이 2015~2016 시즌 중반부터 2, 3쿼터에 한 해 외국 선수 동시 기용이 하도록 했기 때문. 심스는 볼핸들링이 가능한 블레이클리와지위력을 떨쳤다. 2010~2011 시즌을 D-리그에서 호흡을 맞췄기에 다양한 옵션으로 동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토종 선수층이 취약했던 KT는 심스와 블레이클리에게 너무 많이 의존했다. 이내 한계를 드러냈다. 설상가상으로 시즌 막판에 심스가 부상을 당하면서 시즌을 마감했다. KT도 심스도 마지막에 웃지 못했다.
다시 서울에서, 이후 일본에서
심스는 2016년 여름에 다시 돌아왔다. 그는 외국 선수 드래프트에서 SK의 부름을 다시 받았다. SK는 테리코 화이트를 단신 선수로 붙잡기로 하면서 장신 선수로 경력자인 심스를 택했던 것.
화이트가 외곽에서 공격을 이끌 수 있었기에 심스로 하여금 안쪽에서 버틸 수 있는 게 중요했다. 심스의 높이가 중요했다. 하지만 그의 활약은 저조했다. 그러나 그가 이전의 경쟁력을 보이지 못했다. 시즌 중에 방출을 피하지 못했다 (SK는 심스를 내보내고 제임스 싱글턴을 새로운 선수로 낙점했다.).
2016~2017 시즌을 끝으로, 심스는KBL에서 뛰지 못했다. 이후 그는 일본에서 한 시즌을 보냈다. 지난 2017~2018 시즌을 일본에서 뛴 후 선수 생활을 마쳤다.
사진_ KBL
바스켓코리아 / 이재승 기자 considerate2@basket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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