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만스', 거장 스필버그의 새 걸작을 극장서 영접하라!
아이즈 ize 정유미(칼럼니스트)
지난 달 열린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파벨만스'는 감독상, 작품상, 각본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음악상, 미술상 7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알다시피 결과는 '무관'. 이 정도로 여러 부문에 후보로 이름을 올린 작품이라면 한두 개 정도 상을 받기 마련인데, '파벨만스'는 단 한 개의 오스카 트로피도 가져가지 못했다. 감독상부터 남우조연상까지 5개 부문 트로피는 (여우조연상, 각본상을 더해 7개 부문 수상하며) 올해 시상식을 휩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차지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한 스티브 스필버그 감독은 카메라에 모습이 잡힐 때마다 언제나 그렇듯, 온화한 미소의 표정이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남우조연상을 받은 키호이콴이 눈물을 쏟으며 무대에 오르자 스필버그 감독은 객석에서 기립한 영화인들과 함께 축하 박수를 치며 그제야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자신이 '인디아나 존스'(1985)에서 첫 배역을 주었던 아역 배우가 38년 만에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고 외치는 순간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것이 어쩌면 거장에겐 자기 작품 수상보다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이지 않을까 짐작했다.
시상식 중계를 지켜볼 때까지만 해도 '파벨만스'의 무관이 크게 와 닿지 않았다. 그래도 골든 글로브에서 먼저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아서 그나마 다행이네 정도로 여겼다. 시기상 그때까지 이 어마어마한 작품을 보지 못했으니까. '파벨만스'는 시상식 며칠 후에 국내 언론배급 시사회가 열렸고 그 다음 주에 개봉했다.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은 '아카데미가 대체 무슨 실수를 저지른 거야'였다. 물론 그해 경합을 벌이는 후보작이 어떤가에 따라 대진운도 작용하고, 매년 쇄신을 꾀하는 아카데미 시상식 분위기를 감안해도 '파벨만스'와 스필버그가 올해 시상식에서 이렇게까지 외면에 가까운 대우를 받은 건 여러 가지 이유를 떠올려 봐도 납득할 수 없다.
'파벨만스'의 국내 흥행 성적은 어떠한가. 개봉 3주차에 접어든 이번 주까지 관객 수 6만 명이 조금 넘었으니 저조한 성적이다. 예전처럼 아카데미 수상 여부가 흥행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무관이라니. 스필버그가 유명한 감독이긴 해도 작품이든 흥행이든 이제는 예전만 못하지. 스필버그의 자전적 경험담이라고 해도 러닝타임 151분은 좀 부담스러운데. 게다가 요즘 극장에 달려갈 수밖에 없는 굿즈 특전도 부실하잖아. 이래저래 따져보니 좀 더 기다렸다가 스트리밍 서비스로 넘어오면 봐야지. '파벨만스'의 진입 장벽이라 생각하는 요인을 나열해 봤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 한다고 힘주어 외칠 까닭은 무엇일까. 영화를 둘러싼 오해와 편견을 허물고 설득을 해보고 싶어졌다.
'파벨만스'는 영화 마니아들과 스티븐 스필버그 팬들'만' 좋아할 영화일까. 물론 자전적 이야기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스필버그 감독의 기교와 물샐틈없는 연출력, 영화감독이 되기까지 주옥같은 일화들이 일부층을 열광시키는 영화는 맞다. 그러나 잊지 말자. 스필버그는 대중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스필버그의 자전적 캐릭터인 주인공 새미가 어린 시절에 부모님과 함께 처음 영화관에 가서 커다란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는 장면부터 곧장 관객 각자의 첫 영화관 체험 기억을 소환한다.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 나를 극장으로 안내한 부모 또는 함께 영화를 본 누군가들, 당시의 분위기와 기분을 기막히게 되살린다. 충격까지도. 그때부터 이 영화를 보는 지금까지 언제나 부푼 기대를 안고 영화관을 찾는 관객을 위해 스필버그는 '파벨만스'라는 이름의 특별한 선물을 마련한 것이다. '영화를 보는 건 어때, 놀랍고 재밌지? 영화 만드는 건 더 신나고 흥분되는 일이야. 내가 영화에 빠진 순간부터 감독이 되기까지 영화와 함께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들려줄게.'라고 속삭이면서 말이다.
영화관에 앉아 스필버그와 동일화되는 체험은 방구석에선 도저히 느끼지 못할 감흥을 안긴다. 영화가 주는 위로,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가 어찌 스필버그만의 사적인 이야기에 머물 수 있겠는가. 영화 만들기의 열망에 빠진 소년 스필버그는 가족을 촬영한 8밀리 홈 비디오 영화로 시작해 보이스카우트 단원 친구들을 동원한 단편 영화 작업으로 뻗어나간다. 완성한 작품을 본 가족과 친구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소년 감독 스필버그의 열정에 불을 지핀다. 대본 작성, 캐스팅, 연기 지도, 편집까지 연기를 제외한 영화 만들기의 모든 역할을 경험하며 연출 수업을 쌓아간다. 이 귀중한 시간이 재현되는 초반부야 말로 극장에 앉아 극에 몰입하는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스필버그 영화의 원형 찾기부터 가내 수공업 형태의 아마추어 제작 현장의 소동 그리고 연기 디렉션의 마법까지 스필버그는 숙련된 내공으로 영화 공세를 펼친다. 누군가는 이때부터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영화는 꿈이란다. 절대 잊히지 않는 꿈." '파벨만스'의 명대사로 새미의 엄마가 극장에서 처음 영화를 본 어린 아들에게 들려주는 말이다. 이런 멋진 말을 들려주고 영화를 찍어보라며 카메라를 쥐여준 어머니의 존재가 있었기에 스필버그라는 위대한 감독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영화를 보면 피아노 연주자였던 어머니는 아들 스필버그에게 예술가 기질을 물려주고 끊임없이 용기를 불어넣어 준 지원군이다. 반면에 컴퓨터 공학자였던 아버지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가장이지만, 아들의 영화 만들기를 만류하기도 하고 일에 매달리며 아내의 불행을 외면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십 대 소년 스필버그가 꿈에 가까이 다가갈 때, 자녀들에겐 다정한 부모의 결혼 생활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파벨만스'가 스필버그 자신과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는 작품이라고 했을 때, 부모 캐릭터와 그들의 사연이 이 정도로 무게감 있게 다뤄질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이혼을 겪지만 영화감독을 꿈꾸는 아들을 격려하는 조연 캐릭터 정도에 머물지 않을까 했는데, 맙소사. 스필버그는 다 계획이 있었다. 혹자들은 스필버그가 너무 사적인 이야기를 깊게 다룬 게 아니냐며 볼멘소리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여기가 '파벨만스'가 거장의 평범한 회고록에 머물지 않고 걸작으로 도약하는 지점이다.
스필버그 감독은 자전적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때를 기다렸다.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가족의 해체, 어머니의 비밀, 십 대 시절의 상처를 담고 있기에 아픈 과거를 마주하기까지 오랜 결심의 시간이 필요했다. 스필버그가 밝혔듯이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영화화를 준비한다. 가족의 이야기를 영화로 옮기기 위해 동생들의 동의까지 얻고 시작한 걸 보면 그가 얼마나 심사숙고한 자세로 작업에 임했는가 짐작이 간다.
'파벨만스'에 담긴 스필버그의 가족사는 보통 사람의 인생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랑도 주었지만 시련까지 함께 준 부모의 존재,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한 유년기를 스필버그는 비범한 재능으로 재현하면서 자신의 과거와 조우하고 해묵은 마음의 상처를 씻어내는 의식을 치른다. 얼마든지 감독의 성공담으로 신명 나게 풀어나갈 수 있는 지름길 대신에 스필버그는 관객의 지지를 얻지 못할 위험이 도사린 가시밭길을 택함으로써 스스로 광명을 찾는다. 극장의 어둠 속에서 빛을 내뿜는 스크린에 매료되는 것처럼, 관객은 스필버그의 과거와 조우하면서 그가 주장해온 선과 사랑, 인간다움, 존엄성이 얼마나 아름다운 보편적 가치인지를 깨닫는다.
더불어 '파벨만스'는 위대한 영화는 혼자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장과 베테랑 동료들의 완성도 높은 협업물이다. '죠스'에서 인연을 맺어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은 '이티' '쉰들러 리스트'(1993)를 비롯해 50년 동안 스필버그 영화의 음악을 담당해온 전설적인 영화음악가 존 윌리엄스, '쉰들러 리스트'와 '라이언 일병구하기'(1998)로 아카데미 촬영상을 받은 야누시 카민스키, '레이더스'와 '쉰들러 리스트' '라이언 일병구하기'로 아카데미상 편집상을 수상한 마이클 칸, '뮌헨'(2006)과 '링컨'(2013) '파벨만스'로 세 번이나 아카데미 후보에 이름을 올린 현존하는 최고의 극작가 토니 커쉬너. 이들이 오랜 시간 함께해온 친구 스필버그의 자전적 영화에 참여해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 기량을 발휘한다. 나의 세계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함께하는 이들이 곁에 있다는 것, 이게 억만장자 감독이라는 타이틀보다 값진 성공 아닐까.
비록 오스카와 인연을 맺지 못했지만, '파벨만스'는 스필버그 감독에게나 그의 존재를 잊어가거나 모르던 이들에게 꽤 오랜 시간 동안 특별한 영화로 남을 것이다. 뒤늦게나마 이 영화를 본다면 스필버그 찬가 행렬에 동참하게 될 테다. 보편성과 호소력을 지닌 뛰어난 연출, 성숙하고 절제된 작품이 주는 감동은 모든 감독이 해낼 수 있는 성취가 아니다. 그렇기에 아카데미가 작품상, 감독상, 작품상 중 하나는 주었어야 맞는 게 아니냐고 마지막까지 우렁차게 외쳐본다. 거장에 대한 예우가 아닌, 영화 한 편에 인생을 통째로 쏟아부어 걸작을 빚어낸 장인에 대한 온당한 평가로서 말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50년이 넘도록 왕성하게 활동해온 스필버그가 여전히 대표작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한편으로는 고맙다. 초능력 히어로, 그 흔한 쿠키 영상 없이 오직 전통적인 영화 만들기 방식으로 관객을 쥐락펴락 하는 어른이 아직도 현역이라니 놀랍고 기쁘지 아니한가. 스필버그의 35번째 영화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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