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에 대한 대중의 호감은 어떻게 줄었나…신간 '동맹의 풍경'

송광호 2023. 4. 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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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쇼버 교수가 분석한 주한미군 이야기
미군 범죄근절 '금요집회'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1992년 기지촌에서 일하던 윤금이 씨가 잔혹하게 살해됐다. 혐의의 잔혹성 때문에 케네스 마클 이병은 한국 법정에 섰다. 범죄 현장을 담은 한장의 사진 덕택이었다. 대중은 이 사진에 분노했고, 들불처럼 일어난 반미 시위가 마클의 법정행을 견인했다. 한국 전쟁 후 국내에 수십 년간 주둔했던 미군이 한국 법정에 서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엘리자베스 쇼버 오슬로대 사회인류학 교수가 쓴 '동맹의 풍경'(나무연필)은 주한 미군 주둔이 초래한 한국 사회의 변화와 주한 미군에 대한 국내 여론의 동향을 추적한 연구서다. 광복 이후 한국 정부의 역사를 세밀하게 다루는 데다 기지촌부터 홍대 문화까지 미군과 연계된 복잡다단한 사회 문제를 세계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다뤘다는 점에서 눈길 끄는 학술서다.

훈련 중인 주한미군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금지]

책에 따르면 미군의 주둔은 "1950년대 이후 미국이 한국의 정치·경제·군사 문제에 얼마나 넓고 깊게 관여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게다가 "한국의 미군기지는 미 제국 건설의 중요한 공간적 접점으로서, 고립된 게 아니라 전 세계의 다른 미군 시설과 연계됐다"는 점에서 지정학적으로도 중대하다.

남북 간 대치 국면 속에서 국내 역대 정권은 미군의 주둔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아울러 경제적·정치적 이유 등으로 미국의 지지를 받기 위해 노력했다.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원조에 기댔고, 박정희 정부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미국과의 안보 동맹은 경제적 이익과 직결됐다. 베트남전 참전으로 벌어들인 달러는 국내 경제발전에 마중물 역할을 했다.

"친미 성향이 무척이나 강했던 한국"에서 미군은 경제적으로도, 안보적으로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러나 오랜 군사독재 정권이 막을 내리고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힘을 얻으면서 미국에 대한 시각은 새롭게 교정됐다. "자애로운 미군"이라는 개념이 약화했고, 당연했던 미군의 주둔도 논쟁거리가 됐다.

윤금이씨 사건 소재로 한 연극 '금희야 사랑해' 중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 서막을 알린 게 윤금이 사건이었다. "윤금이의 죽음은 미군이나 그 가족이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나타나는 대중적 분노의 시발점"이 되었다. 2002년에는 열세살 중학생 두 명이 미군의 군용차량에 치여 사망하면서 전국적 반발을 초래했다. 2007년 홍대 인근에서 발생한 성폭행 사건,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금지 조처에 대한 반발로 이뤄진 '광우병 시위'는 반미 감정을 고조시켰다.

좌파 지식인들은 반미주의적 흐름 속에서 이른바 '기지촌 문학'을 써 내려가며 미군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대중문화 속에서도 이런 경향은 포착됐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은 미군이 버린 화학물질 탓에 한강에 괴물이 생겼다는 내용을 다뤘고,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2009)은 한국인 대학생을 살해한 뒤 주요 용의자로 거명된 미군을 소재로 했다.

저자는 "살인, 비행, 무법을 저지른 미군 이미지를 보고 있노라면, 한국의 대중적 상상에 자리한 호전적이고 폭력적인 미군 이미지가 쉽게 사라지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영화 '괴물' [연합뉴스 자료사진]

미군의 범죄는 2000년대 들어 대부분 서울에서 벌어졌다. 이는 대중교통의 발달로 이제 미군이 기지촌에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휴일이나 쉬는 시간이면 미군의 발길은 놀거리를 찾아 홍대나 이태원 등 서울 주요 유흥지로 향했다. 그 가운데 일부 미군들은 이른바 '즉석만남'을 하러 유흥지를 찾았다. 저자가 인용한 사회학자 이나영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기지촌 지역을) 성공적으로 게토화해 미군이 한국 사회에 진입하는 것을 막고 평범한 한국인, 특히 '정숙한' 한국 여성이 미군 남성과 접촉하지 못하게 완충지대"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전략은 "완전히 실패"했다.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에 서울이 거대도시로 급부상"하면서다.

동두천시 양키시장의 한산한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기지촌도 지구적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기지촌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 대부분은 필리핀이나 구소련의 일자리 중개소를 통해 고용된 경우가 많다. 이는 외화벌이를 권장하는 송출국 정부, 일자리를 찾아 나선 여성들의 개인 사정, 이들을 한국에 보냄으로써 수익을 거두는 알선업자, 성 산업에 필요한 여성을 충원하려는 한국 사회의 이익이 맞물려서 벌어진 결과였다. 그러나 막상 한국에 온 외국 여성들의 삶은 대개 신산했다. 기지촌 접대부 중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외국인 여성의 목소리는 사실상 침묵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고객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내 이주노동자로서 서로 다른 국가 및 법체계 사이에서 희생되어 부유하는 상태가 삶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책 표지 이미지 [나무연필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냉전체제에서 신자유주의 시대까지를 거치며, 주한미군의 위상은 국내에서 변해갔다. 자애로운 존재였던 미군은 호전적이고 폭력적인 이미지를 덧입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가면서 그들에 대한 대중적 호의는 서서히 균열이 갔다. 저자는 "한미 관계와 주한미군의 앞날에 어떤 어려움이 놓여 있는지는 예측하기 어렵다"면서 "하지만 비교적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국에서 미국의 패권이 난공불락이던 시절은 갔다"고 말한다.

강경아 옮김. 348쪽.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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