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전 김훈에게 “소설 써보시라” 말한 전직 권투선수의 근황은[단독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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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래 전 술자리에서, 소설가 김훈에게 "방금 그 내용을 소설로 한 번 써보시라"고 권했다.
어느 날, 김훈의 자택을 방문한 그는 김훈 책상에서 지우개 가루가 수북한 소설 원고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을 보았다.
그는 세기말부터 지금까지 가장 성공한 문학출판인이자 보는 눈이 예리했던 문학편집계의 전설로 통한다.
―2019년 시 대신 첫 소설 '온전한 고독'을 출간하며 작가로서의 침묵을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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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김훈의 자택을 방문한 그는 김훈 책상에서 지우개 가루가 수북한 소설 원고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을 보았다. 이 소설은 그가 창립한 출판사 문학동네의 1994년 계간지 겨울호에 발표됐다. ‘소설가 김훈’의 첫 시작이었다.
오래 전 대학 후배였던 안도현 시인에게 ‘어른을 위한 동화’를 써보라고 권한 이도 그였다. 안도현의 ‘연어’다. 그는 안 시인의 시에서 “짙은 서사성”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연어’는 현재까지도 100만부가 팔린 스테디셀러다.
출판사 문학동네 창립자 강태형. 그는 세기말부터 지금까지 가장 성공한 문학출판인이자 보는 눈이 예리했던 문학편집계의 전설로 통한다. 써야 할 땐 과감히 베팅하는 타고난 사업가에 황석영 작가, 김정환 시인 등 문단 거물과 ‘형님 한잔, 아우 한잔’ 하며 소맥 말술을 마다 않는 노련한 문학인. 그 스스로도 시인이지만 이제 소설을 쓰며 이야기로 한 생을 살아낸다.
8년 전 대표직을 내려놓으며 서유럽으로 떠난 그가 올해 문학동네 창립 30주년을 맞아 잠시 귀국했기에 그를 서둘러 만났다. 3월의 어느 날 오후, 서울 여의도 북카페 까페꼼마에서 두 잔의 와인을 놓고 시작된 대화는 자정까지 8시간 계속됐다.
작가의 피땀 농사, 절대 망쳐선 안돼
문학은 인위개입이 아닌 자연발생적
문학, 정치성보다는 자율적으로 가야”

▷8년 전 스페인 마드리드로 떠난 뒤 발칸 9개국, 남미, 포르투갈 리스본 등을 떠돌았다. 해외에 가면 혼자가 되니 고독하다. 그러나 다른 생을 사는 것 같다.
―문학동네 창립 30주년이다. 출판계 어두운 관행을 바로잡는 파격적 시도로 출발해 ‘창작과비평사와문학과지성사 이래 가장 강력한, 그리고 전혀 다른 출판사’(김정환 시인)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초기엔 비판도 많았다.
▷1993년 12월 문학동네 설립, 1994년 겨울 계간지 ‘문학동네’ 발간 후 비판의 요지는 두 가지였다. 문학을 종교처럼 떠받드는 문학주의자라는 시선, 그리고 책 팔기 위해 뭐든 하는 상업주의자라는 단정. 문학동네는 문학으로 살다 문학으로 귀결되려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의 영토다. 문학을 신성시하고 문학에 모든 걸 바치는 사람들의 영토를 만들려 했으니 문학주의자 비판엔 기꺼이 동의한다.
―정론지 성격이 강했던 문지와 창비의 과두체제를 깼다.
▷문지와 창비는 ‘숭고하다’고까지 표현 가능한 분들이 운영해온 출판사다. 정말로 존경하는 그분들이 계신 상황에서 문학출판을 하려면 뭔가 다른 걸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분들이 간과했던 걸 살폈다. 신인 발굴, 계약서 작성, 선인세, 책 광고가 그것이었다. 문지와 창비는 신인을 뽑지 않고 신춘문예로 발굴된 신인을 지켜보다 책을 내주는 경우가 많았다. 문학동네는 문학동네소설상, 문학동네작가상을 신설했다. 문학이란 애드벌룬(풍선)을 공중에 띄워 먼 곳에서부터 문학주의자들을 모은 것이다.
―작가 선인세 지급을 두고 ‘작품 입도선매’라는 지적도 있었다.
▷당시 출판계엔 계약서 작성하는 문화가 없었다. 책 한 권 내자고 호의를 베풀면 작가들이 감격하는 분위기일 정도로 문턱이 높았다. 문학동네는 정식 계약서를 쓴 뒤 선인세를 지급했고 매출의 15%를 광고비로 집행했다. 농부들이 1년 농사를 짓듯이 작가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3년짜리 농사를 짓는다. 어떤 작가는 한 생에 걸쳐 한 번의 농사만 짓는다. 목숨과도 같은 글을 맡겨주시는데 절대 실패하면 안 된다. 돈 싸짊어지고 다니면서 문학판을 흐린다는 얘기까지 들었지만 마땅한 일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안 하는 출판사가 있나.

▷엄혹했던 시대에 창비는 세상을 더 나아지게 하는 길을 걷고 있었고, 문지도 문학과 현실 간의 유기적 연관성을 중요시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요즘 산에 가보면 아욱도 자라고 쑥도 자라고 냉이도 자랄 것이다. 들판에 펼쳐진 저 식물들이 훗날 누군가에게 채취되어 나물로 무쳐지고 국으로 끓여지려 생장하는 건 아닐 것이다. 문학은 어떤 것에 쓰임이 되려는 목적을 갖고 만들어지는 게 아닌, 그저 자연발생적인 무엇이다. 작가의 내면에서 생성된 하나의 갈망이 백지 위에 펜을 들게 한다.
―김훈 작가에게 소설 집필을 처음 권했다고 들었다.
▷술자리 말씀이 너무 매혹적이어서 저 혼자 듣기 너무 아까우니 꼭 소설을 써보시라 권해드렸다. 그때도 소방관 말씀하시고(김훈 첫 소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으로 집필), 이순신 ‘난중일기’도 언급하셨다(김훈 대표작 ‘칼의 노래’로 집필). 처음엔 ‘절대 안 쓴다’고 하시다가 어느 날 댁에 가보니 원고 뭉치가 책상에 놓여 있었다. 제가 ‘발굴’한 게 아니라 이미 들은 얘기가 많았기에 권했던 것이다.
―장편 ‘새의 선물’ 10만부 판매 기념으로 은희경 소설가에게 차를 한 대 뽑아준 일화가 작년 뒤늦게 화제가 됐다.
▷10만부 돌파 기념보다는 문학동네소설상 공모요강에 의하면 상금 3000만원 지급이 끝이었다. 책이 너무 잘 나가니 출판사 대표 입장에선 미안한 마음이어서 현대차 쏘나타가 인기를 끌던 때라 한 대 사드렸다. ‘새의 선물’은 지금까지 100만부 넘게 판매됐다는데 이후 신차가 아니라 인세를 꼬박꼬박 드리는 것으로 안다.(웃음)

후지필름 사라졌다고 사진 없어졌나
책 소멸해도 이야기는 영원 불멸할 것
책은 상징화되고 권력화되지 않을까”
▷원고를 펼치며 ‘여기엔 또 어떤 세계가 담겼을까’ 하며 깊숙한 곳에서 설레는 사람, 그 세계에 푹 잠겨 작품에 담긴 한 생을 살아내길 희망하는 자가 편집자라고 믿는다.
―좋은 책은 뭘까.
▷김화영 선생님(고려대 불문과 명예교수)이 들려주신 얘기인데, 한 프랑스 출판사 편집장이 좋은 책의 조건을 이렇게 말했다. 첫째, 흥미진진할 것. 둘째, 새로울 것. 그리고 셋째가 가장 중요한데 바로 ‘독자를 불편하게 할 것’이다. 별 생각 없이 드러누워 보다가 엇, 하고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잡게 만드는 책이 좋은 책이다.
―그런데 이제 독자가 희귀해진다.
▷지리멸렬한 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은 보통 ‘하루가 정말 따분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엔 그 똑같은 하루를 이렇게 표현하는 사람이 있다.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김훈) 아무리 책이 사라진다고 해도 이런 문장을 갈망하는 독자는 영원할 것이다. 문자가 아니면 전달이 불가능한 영역이다.

▷1500년 전쯤엔 말의 길이 끊긴 자리에서 진리가 시작됐다고 믿었다. 그게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기원이다. 문자로 전할 수 없으면 진리요, 전할 수 있으면 거짓이라고 선조들은 봤다. 현대인은 어떤가. 영상이 담아낼 수 없는 지점에서 보여지는 언어만이 담아낼 수 있는 것을 진리라고 믿는다. 아르헨티나의 대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눈이 먼 노년에 이르러 자신의 팔짱을 끼고 부축하는 영국인 기자 앞에서 문득 멈춰 시를 한 편 읊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언젠가 이건(언어) 다 사라질 거야.” 인간이 진리를 추구하는 방식은 생멸을 반복한다.
―책은 정말로 소멸할까.
▷후지나 코닥같은 필름회사가 기울어도 결국 사진은 남았고, 사람들이 레코드판을 찾지 않아도 음악은 죽지 않는다. 책의 사라짐은 유구한 역사의 도도한 흐름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이야기의 생성은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영상이든 게임이든 서사의 필요는 언제든 제기된다. ‘쓰는 사람’으로서의 작가의 존재는 존재할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책은 점점 소수의 장르, 상징화되고 권력화된 장르가 되지 않을까.

▷주노 디아스는 퓰리처상을 받은 2008년 ‘당신을 작가로 이끈 힘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했다. “거대한 책장 앞에 섰던 어린 날의 기억이 나를 작가로 만들었다.” 책 만드는 일을 평생 업으로 삼으면서 얻은 것도 받은 것도 많다. 문학동네가 성장할수록 ‘사람들 사이에 책을 더 오래 두고 싶다’는 욕망을 더 품었다. 지금 이곳 북카페 카페꼼마를 세운 것도 매출 욕심보다는 사람들 사이에 책을 두려는 마음이 컸다. ‘사람들아, 카페에 와서 책을 펼치보지 않아도 좋다. 그저 책 표지라도 바라보며 책을 가까이 하자.’ 그런 생각이었다.
―‘어쩌다’ 책의 길로 들어섰나. 프로를 꿈꿨던 전직 복서였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집에서 소 40마리를 키웠다. 고등학생 때 공부를 접고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복싱과 소설, 두 가지만 병행했다. 새벽 5시 기상해 운동하고 학교에서 종일 책 읽고 하교하면 서너시간 또 운동하고 집에 와서 바로 잤다.(웃음) 부상으로 복서는 관뒀고 문예장학생으로 대학에 갔다. 10대부터 30대 중반까지 소설을 ‘매일 한 권’씩 읽었고 주머니엔 항상 시집이 있었다.

▷환갑 때 첫 시집을 내겠다고 농담했는데 환갑이 벌써 5년 전이다. 시에는 통찰이 담겨야 하지만 문학출판하면서 잃어버린 것 같다.(웃음) 당시 썼던 30편 정도의 시를 갖고 있기에 몇 편 더 써서 시집을 억지로 만든다면 만들 수는 있겠지만 저는 문학주의자다. 문학주의자는 적어도 문학 앞에서만은 발가벗고 서야 한다. 억지로 시를 남기진 않으려 한다.
―2019년 시 대신 첫 소설 ‘온전한 고독’을 출간하며 작가로서의 침묵을 깼다.
▷먼 이국땅에서 밤하늘을 보다가 ‘다시 글 쓰는 자의 길을 꿈꾸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45일 만에 그 소중한 느낌을 안고 700매 경장편 ‘온전한 고독’을 썼다. 현재 집필중인 소설의 가제는 ‘육조단경’이다. 육조 혜능이 중심이다. 본래 김성동 형님(소설 ‘만다라’ 작가)께 써달라고 했던 작품이었는데, 성동 형님은 불교를 너무 잘 알아 쓰지 못하셨던 것 같다. 2000매로 초안은 다 썼는데 ‘현대와의 연결점’이란 마지막 고리를 못 찾아 전부 버렸다. 처음부터 다시 쓰려 한다.
―출간한 책 중에 아끼는 책은.
▷작가들의 ‘첫 책’을 좋아한다.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조경란의 ‘식빵 굽는 시간’ 같은 첫 책들. 기억에 남는 원고는 천명관의 장편 ‘고래’였다. 아마 2004년으로 기억되는데 파리행 12시간 비행기에서 꼼짝 않고 읽었다. ‘온 세계의 모든 걸 다 집어넣은 것만 같은 소설’이란 인상을 받았다. 그 책이 20년 지나 2023년 부커상 후보에 올랐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웃음)

▷문학에 권력이란 게 주어질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다만 권력이란 게 문학으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거라면 전 모두에게 여쭙고 싶다. 주어진 권력으로 문학동네는 무엇을 했을까요, 라고. 출판사 문학동네는 정말 좀 더 깊은 문학을 할 수 있는 영토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었다. 더 큰 영토를 만들어드리지 못했음에 안타까운 마음이다.
―‘문단의 문학동네화’라는 표현이 들릴 정도로 문학동네는 중량감이 크다.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은 유용하다. 그런데 ‘문학의 무용성’(김현)이란 은유처럼 문학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영화처럼 특정인을 캐스팅하거나 어떤 작품만 편애하거나 외면하는 것. 우리는 아무리 열어도 끝없이 문이 나오는 문학의 통로에서 그 문을 하나씩 열어 영토를 넓혀온 것이다.
―왜 그런가.
▷소설은 한국의 문화상품 중 가장 완전경쟁에 가까운 시장에서 거래된다. 출신, 학력, 나이를 가린 블라인드 테스트로 데뷔하고 전작의 상업적 성공과 무관하게 책값의 10%를 인세로 받는다. 피도 눈물도 없는 시장이다. 다른 업종과 달리 밀리언셀러를 내도 3년을 가지 못하고 그렇기에 성공했다고 해서 결코 반석 위에 설 수 없다. 작가들께는 그 반석을 만들어드리고자 했다.

▷전 작가들을 정말로 사랑하고 진심으로 존경한다. 30년, 아니 출판업에 뛰어든 40년 세월을 복기해보면 작가들이 즐거워 할 때 저도 지극히 즐거웠고 작가들이 고통스러워 할 때 저도 너무나 괴로웠다. 작가들이 문학을 하면서 꿈꾸는 것들, 원하는 것들, 이루고자 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 작가 중심 출판사의 사명이어야 한다.
―‘쓴다는 것’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일까.
▷작가에게 글을 쓴다는 건 무명의 들판이거나 빛이 없는 터널을 걷는 시간일 것이다. 출판사는 작가들이 견딜 수 있도록 어둡고 축축하고 습한 길을 밝고 단단하고 찬란하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문학동네의 다음 30년은.
▷2003년 몽골초원을 다녀왔다. 현지 교수님이 ‘돌책’을 보러가자 하셔서 가보니 돌로 만든 책은 바로 7세기 돌궐족이 남긴 엄청난 양의 설형문자 비석이었다. 돌궐 장군 돈유쿠크 공적을 남긴 비석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내는 자는 흥한다.’ 아무리 유명한 책도 3년을 가지 못하고 한곳에 안주하면 망한다. 책도 출판도, 그래서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 있어야 한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웠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잡을 수 없는 저 별을 잡으려 했다’는 돈키호테처럼, 걸음을 옮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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