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선고 뒤 오진 판정… 새 삶을 얻은 남자의 유려한 사색[북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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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판정을 받고 좌절했다가 그것이 오진임을 알게 된 남자.
새 삶을 살기로 한다.
삶이란 근본적으로 모두에게 시한부다.
메르시어는 피터 비에리라는 본명으로 쓴 '삶의 격' '자기 결정' 등 철학서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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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메르시어 지음│전은경 옮김│비채
시한부 판정을 받고 좌절했다가 그것이 오진임을 알게 된 남자. 새 삶을 살기로 한다. 그는 조급해하지도, 서두르지도 않으며, 서서히 시간의 밀도를 높인다. 삶이란 근본적으로 모두에게 시한부다. 책상 앞에 앉아 지난날을 돌아보던 남자는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수신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아내. 자연스럽게 이 편지는 일방적인 말하기이면서, 오직 자신만이 독자가 되는 ‘일기’가 된다.
동명의 영화 원작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작가로 잘 알려진 파스칼 메르시어가 16년 만에 내놓은 신작에서 주인공 레이랜드는 생사의 기로를 지나며, ‘쓰기’를 결심한다. ‘모든 것이 이름이 불리고 이야기된 후에야 실제로 존재한다’고, ‘언어로 이해해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 그는 부유하던 기억들을 구체적인 언어로 소환해 ‘확실성’을 부여한다. 동양학자인 삼촌을 동경해 번역가를 꿈꾼 어린 시절, 강압적인 아버지로 인해 가출해 낡은 호텔에서 일했던 나날, 독학으로 번역 공부를 하던 숱한 밤과 드디어 번역가로 데뷔한 날의 환희, 열차에서 아내를 처음 봤던 순간 등. “글로 쓴 생각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말하는 그는, 이 행위의 고귀한 가치를 안다. “이 확실성을 통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 생각 속에서 나는 과연 누구인지 제대로 알게 되고 배우지.”
메르시어는 피터 비에리라는 본명으로 쓴 ‘삶의 격’ ‘자기 결정’ 등 철학서로도 유명하다. 그의 소설엔 철학자로서의 면모가 강하게 드러나는데,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 작품도 인물이나 사건 중심의 일반 소설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주인공이 가장 집중해서 하는 일이라곤 편지를 쓰며 삶을 복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정신’을 점검하고, 잠언적 문장을 쏟아내며 우리를 사색하게 한다. 인생이라는 불안하고 괴로운 나날 속에서도 허무나 쾌락, 욕망에 지지 않을 수 있다고, 언어와 문학으로 마음을 벼리면 온전한 정신으로 자신과 세상에 맞설 수 있다고.
주인공의 아내는 생전 출판사를 운영했었다. 주변엔 온통 언어와 문학을 삶의 지침으로 여기며 사는 인물들. 자신이 써야 한다고 믿는 글에 모든 걸 걸고 집필하는 소설가들을 좇다 보면, 이 작품이 문학을 애호의 대상이 아닌 ‘생존의 도구’ 그 자체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책은 마치 ‘문학으로 버텨낸 사람들’의 사례집처럼 읽힌다.
대중 독자들의 열광과는 별개로, 메르시어의 소설은 이지적이지만, 때로 현학적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그의 최대 강점이기도 하다. 전작에서 리스본이라는 정체 모를 동경과 낭만을 이끌어 낸 그는, 이번에도 이탈리아와 영국을 횡단하며 우리를 ‘낯선 설렘’ 속에 가둔다. 시끄럽고 번잡한 세상을 차단한 채 우리가 무엇에 기대고, 또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조금 ‘각성’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우아한 경험’도 없을 것이다. 632쪽, 2만2000원.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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