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 받아 어두워졌어도… 우린 다시 스스로 빛날 수 있다[북리뷰]

나윤석 기자 2023. 4. 7.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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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롭힘은 어떻게 뇌를 망가뜨리는가
제니퍼 프레이저 지음│정지호 옮김│심심
학폭 피해자·가해자의 뇌 특징
신경과학 차원으로 접근해 분석
성장기 학대 경험 성격왜곡 초래
의학적 치료해야 악순환 끊어져
어릴적 망가진 뇌, 중장년 되면
암 등 위험질환 유발 확률 높아
의지 따라 변화·치유 가능한 뇌
일상속 ‘마음챙김’ 으로 회복을
게티이미지뱅크

‘학교 폭력(학폭)’은 요즘 한국사회의 가장 뜨거운 이슈다. 고위공직자 후보에 오른 법조인의 아들이 고등학교 시절 언어폭력으로 전학 조치를 받고도 서울대에 진학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연예계와 스포츠 스타의 과거 행태도 피해자의 폭로로 줄줄이 도마 위에 올랐다. 학폭을 다룬 드라마 ‘더 글로리’까지 가세했다. 정부는 대입 전형에 학폭 징계 이력을 반영하는 것은 물론 졸업 후 취업에도 불이익을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주 출간된 ‘괴롭힘은 어떻게 뇌를 망가뜨리는가’는 ‘학폭’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탐구한다. 캐나다 작가이자 고등학교 교사인 저자가 주목한 것은 폭력과 괴롭힘이 뇌에 미치는 영향이다.

저자 역시 수많은 학폭 피해자처럼 폭력으로 얼룩진 삶을 살았다. 고등학교 때 세 명의 교사에게 성추행을 당했고, 결혼해 낳은 첫아들은 학교 농구팀 코치의 언어폭력에 시달리다 농구를 그만뒀다. 선천적 유전 질환을 앓은 둘째 아들 역시 학급 친구들의 따돌림 탓에 힘겨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런 저자의 무너진 삶을 일으켜 세운 건 ‘신경과학’이었다. 최신 뇌과학과 심리학 이론을 ‘독학’하면서 괴롭힘은 뇌를 망가뜨리지만, 뇌는 부단한 노력과 훈련으로 손상을 회복할 힘이 있음을 알게 됐다.

다양한 연구와 실험을 통해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의 뇌 역시 온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저자는 학폭을 ‘윤리적 차원’을 넘어 ‘의학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통찰을 전한다. “신경과학계의 발견은 괴롭힘이라는 유행병에 ‘해독제’ 역할을 한다.”

책은 이유 없는 괴롭힘뿐 아니라 훈육과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폭력의 잔혹성을 ‘과학적’으로 폭로한다. 각종 연구에 따르면 손바닥으로 어린아이의 엉덩이를 때리는 것만으로 근육 조절과 정서 고양에 필수적 물질인 회백질을 감소시키고, 물리적 폭력을 동반하지 않은 정서적 학대 역시 뇌의 집행 기능을 떨어뜨린다. 학대받은 아동에게 화난 얼굴 사진을 보여주면 뇌가 전쟁에 뛰어든 병사와 유사한 수준의 ‘과잉 각성’ 상태를 보이는 것은 한정된 대뇌피질 공간에서 창의력과 사고력에 필요한 에너지를 ‘(가짜) 위협’에 맞서는 데 끌어다 쓰기 때문이다.

아동·청소년기의 망가진 뇌는 세월이 흘러 중장년기에 암을 비롯한 위험 질환을 유발할 확률이 높다는 점도 여러 연구를 통해 입증됐다. 학폭 이슈와 맞물려 시청자들의 열광적 호응을 얻은 드라마 ‘더 글로리’ 속 대사처럼 폭력의 끝에는 ‘폐허’뿐인 삶이 기다린다.

그런데 한 사람의 삶을 망가뜨리는 가해자의 ‘학대하는 뇌’ 역시 어린 시절의 ‘학대받은 뇌’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발달기에 경험한 트라우마가 ‘마음속 가해자’를 만들어 우울과 불안 증세, 자살 충동 등으로 자신을 괴롭힐 뿐 아니라 바깥을 향한 공격적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 뇌스캔 연구에 따르면 미국 캘리포니아 교도소 수감자의 70%는 ‘상처받은 뇌’를 안고 있었다. 공감에 관여하는 뇌 부위가 현저히 줄어든 폭력 가해자들에게선 흔히 나르시시즘과 반(反)사회적 성격 장애, 성도착증, 타인을 조종하고 기만하는 마키아벨리즘 같은 특성이 발견된다.

저자는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영화 ‘위플래쉬’에서 강력한 카리스마와 잔혹한 가학성을 번갈아 표출하며 밴드 단원을 몰아붙이는 지휘자 플레쳐에 대해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분열 장애를 앓는 인물”이라며 “성장기에 당한 학대가 왜곡된 성격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한다. “가해자들에게 ‘상처받은 뇌’ 영상을 보여주면 수치심 없이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무작정 처벌하고 나무라기보다 의학적 관점에서 뇌를 치료해야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모하는 ‘상호 비극’의 악순환이 끊어진다.”

폭력의 비극이 낳은 폐허 같은 삶은 의지에 따라 변화하는 뇌의 ‘신경가소성’ 덕분에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상처받은 뇌를 치유하는 해결책은 뜻밖에 ‘손 닿는 곳’에 있다. 뇌는 ‘많이 사용한 만큼 자라는’ 근육과 같아서 일상 속 훈련으로 손상 부위를 ‘리모델링’할 수 있다. 현재에 집중하는 ‘마음 챙김’은 대뇌 피질과 해마 용적을 높여 행복감을 낳고, 뇌세포 간 연결을 촉진하는 운동과 놀이는 과잉 각성에서 벗어나 타인의 눈길에 자신감 있게 응대하는 힘을 부여한다. 이와 함께 저자는 자신이 겪은 피해를 ‘글’로 풀어내는 것도 평온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고 조언한다. 왼쪽 언어 중추를 활용해 공포와 슬픔에 짓눌린 과거를 ‘시각적’으로 마주하면 분노에 관여하는 변연계가 진정되면서 ‘마음-뇌-몸’이 총체적으로 치유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와 두 아들 역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새 삶의 희망을 찾았다고 한다.

“우리 뇌는 860억 개 이상의 뉴런으로 이뤄져 있다. 누구도 ‘은하계’만큼 광활한 뇌를 뺏어갈 수 없다. 괴롭힘과 학대로 반짝이던 별 일부가 침침해져도 다시 밝힐 수 있다.” 이 아름다운 문장이 요약하듯, ‘괴롭힘은 어떻게 뇌를 망가뜨리는가’는 무지막지한 악행을 벌이는 인간의 어두운 그늘을 직시하면서도 폭력에 주저앉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의 숭고함을 발견하는 책이다. 512쪽, 2만60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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