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 벚꽃길… 희망은 다시 피어난다

엄형준 2023. 4. 7.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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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하루 또 하루’ 양산 촬영현장을 가다
배우 박용기의 감독 데뷔작
한밤 흩날리는 꽃잎 맞으며
야반도주하는 네 명의 가족
한 컷 한 컷 고심 또 고심…
첫 장면 구도 잡기에만 3시간
김지완·현영, 부부 역할 맡아
사기당해 재산 날리고 쫓겨도
하루하루 가족 지키려 발버둥
생에 대한 반성이자 새출발 그려

사람들은 때로 예기치 않게 바닥에 떨어질 때가 있다. 희망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어둠 속에서 양산 벚꽃길을 걷는 네 명의 가족 풍경은 아름다운 한편의 그림 같지만, 역설적이게도 빚쟁이들을 피해 야반도주하는 중이다. 

김지완(현우 역), 현영(유리 역)이 주연을 맡고, 박용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하루 또 하루’의 경남 양산 촬영 현장을 찾았다. 

1일 밤 자정이 가까운 시각, 경남 양산시 원동면의 낙동강 지류에서 밤 촬영이 이뤄지고 있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이다. 엄형준 선임기자
1일 밤 11시30분. 흐드러진 벚나무에서 바람에 꽃잎이 떨어지는 광경을 조명 차량과 스탠드 조명이 아름답게 비추는 낙동강 지류 둑길 건너편에 카메라가 설치된다. 무전과 마이크, 때론 목청을 돋우며 200m는 족히 떨어진 양쪽 강둑에선 감독과 촬영감독, 조명감독과 조감독의 촬영 지시가 오고 간다. 

촬영 시간은 10분 남짓. 영화에 등장하는 건 길어도 20초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영화의 첫머리를 찍기 위해 조명 세팅과 구도를 잡는 데 세 시간여가 걸렸다. 한 컷의 울림을 위한 고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1일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의 한 움막집에서 영화 ‘하루 또 하루’의 촬영이 진행되고 있다. 촬영은 이날 밤 늦게까지 이어졌다. 엄형준 선임기자
낮으로 시간을 돌려, 가족들이 야반도주해 머무는 양산 시골 마을 농막.

“빚 독촉 전화야. 네가 받을래? 삼십 통 넘게 왔어.” 

휴대전화를 부여잡은 김지완이 현영에게 울분을 토해낸다. 수십 번의 시도 끝에 컷을 마친 배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박용기 감독(오른쪽부터)과 주연배우인 김지완, 현영이 연기 장면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엄형준 선임기자
영화는 찍는 이들의 삶을 반영하는 듯하다. “대본을 보고 제 삶과 닮았다고 생각했다”는 김지완은 ‘단팥빵’, ‘별순검’ 등에 조연으로 출연했고, 아침 드라마 ‘걱정하지마’에서 선우 역으로 주연을 맡았던 모델 출신 배우다. 사업 실패 등으로 긴 공백기를 가지며 대중에게서 멀어진 그에게 이 영화는 배우로 다시 날아오르기 위한 날갯짓이다.

김지완은 “본의 아니게 오래 쉬었고, 이 영화는 다시 출발할 기회”라며 “어려운 역할이지만, 이걸 극복해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다.

지난 1일 경남 양산에서 진행된 영화 ‘하루 또 하루’ 촬영 중 모니터에 잡힌 현영(오른쪽)이 연기 중 숨을 고르고 있다. 이 영화에서 현영은 애절한 눈물 연기를 선보인다. 엄형준 선임기자
현영에게도 이 영화는 남다르다. 특유의 콧소리로 밝고 웃음기 있는 역할을 주로 해왔던 현영은 이 영화에선 모성애 넘치는 엄마이자 사업에 실패한 남편을 위로하며 가정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아내 역으로 열연한다.

현영의 딸인 강채빈양(소망 역)이 유준혁군(소중 역)과 라면을 끓여 먹다 데인 후 이를 현영이 다그치는 장면.

‘하루 또 하루’의 아역 배우인 유준혁군(뒤 오른쪽)과 강채빈양(뒤 왼쪽)이 ‘액션’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 영화 제작진 제공
채빈양은 감독의 액션 사인과 함께 눈물을 쏟아내고, 준혁을 야단치던 현영은 딸의 눈물에 오열한다. 웃음기 넘치는 코맹맹이 소리의 현영은 여기 없다. 이제 엄마가 된 현영도 나이만큼 제법 성숙해진 듯하다. 지켜보는 스태프의 눈시울까지 붉어진다.

현영은 “결혼 전에는 밝은 역할만 했다면 이제는 엄마도 됐고, 인생도 어느 정도 겪은 만큼 변화한 나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며 “저한테 굉장히 도전적인 작품”이라고 했다. 현영은 “내 안에 ‘엄마’가 이렇게 강할 줄 몰랐다. 리허설하고 대본 리딩할 때는 이 아픔을 어느 정도까지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막상 찍으면서는 나에게도 이렇게 뜨거운 모성애가 있었구나 느꼈다”고 심상을 풀어놨다.

김세동 배우(가운데)와 아역배우 강채빈양(오른쪽)이 야외 촬영을 준비 중이다. 영화 제작진 제공
또 다른 장면. 술잔을 부여잡은 김지완의 손이 떨린다. 한 번, 두 번, 세 번… 재촬영이 반복될 때마다 그는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더 세게 잔을 꼭 잡았다. 세상에 울분을 토해내는 것처럼. 그리고 현영이 그의 손을 잡는다. 이 어려움을 이겨내자는 듯이.

극장 관객이 흘낏 지나칠 수 있는 장면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오랜 시간 연극과 함께 해온 박 감독의 연륜과 고집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박 감독에게도 이 영화는 특별할 수밖에 없다. 배우로 살아온 그에게 ‘하루 또 하루’는 첫 감독 도전인 동시에, 생의 과오에 대한 반성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좀처럼 오케이 사인을 내리지 못하는 듯하다. 박 감독은 “잘했다. 이제 90%까지 왔다”면서도 부족한 10%를 채우지 못했는지 촬영을 길게 이어간다.

밤늦게까지 촬영이 이어지는 강행군 속에 정해진 스케줄은 막바지에 다다르고 2일 촬영에선 두 주연 배우의 감정이 한계치까지 끓어오른다.

슬픔의 강행군 중에도 “저는 아직 삼춘기”라며 밝게 재잘거리는 채빈양은 촬영 땐 연기에 몰입하지만, 연기가 끝난 뒤엔 “제 연기 보고 울었어요?”라고 묻는 당찬 아이다. 지쳐가는 배우들과 촬영팀에게 아역 배우들은 때때로 웃음을 주는 비타민 같은 존재다.

많은 저예산 영화들이 그렇듯이 카메라 한 대로 같은 장면을 찍으려니 풀샷과 클로즈업이 반복된다. 아마도 이 중 많은 장면은 잘려나갈 것이다. 그렇다고 어느 한 장면도 쉽게 찍을 순 없다.

짧은 촬영장 방문으로 종합예술인 영화가 어떤 길을 가게 될지는 예단할 수 없지만, 배우와 감독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고스란히 전해진다.

영화는 사업을 하다 사기꾼을 만나 재산을 날리고 야반도주할 수밖에 없었던 남자와 그의 가족 얘기를 그린다. 우리가 어쩌면 겪게 되거나 때론 듣게 되는 실패의 경험담. 그래서 너무 과해서도 안 되고 너무 관조적이어도 안되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업.

1일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의 한 움막집에서 영화 ‘하루 또 하루’의 촬영이 진행되고 있다. 촬영은 이날 밤 늦게까지 이어졌다. 엄형준 선임기자
인생도 영화도. 사람들 눈에 비치는 세계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무심하고 간단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많은 이들이 수면 위의 백조처럼 물밑에서는 열심히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이들이 영화의 완성을 위해 떼는 발걸음 하나하나엔 깊은 무게가 실려 있다.

한국 영화 산업의 침체에 대한 우려 속에 여전히 영화인들의 노력은 하루 또 하루 그렇게 계속되는 중이다. 바람에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는 양산에서 영화는 새로운 희망을 그리고 있다.

양산=엄형준 선임기자 ti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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