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칼럼] 촉촉했던 산들의 기억
내가 태어나 성장한 마을은 인왕산 아래 옥인동 47번지다. 결혼 이후 옥인동을 떠나 10여년간 살다가 2008년 연어처럼 회귀에 성공했고 그 뒤로 계속 경복궁 서쪽 마을에 살고 있다. 2010년 인왕산 계곡 자락에 얹힌 옥인아파트를 철거하고 수성동계곡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는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물소리가 울린다는 뜻을 가진 그 계곡의 이름에 의구심을 가졌다. 물소리가 들리는 계곡이라면 내가 살던 그 언덕이 아닌가? 옥인아파트 쪽이라면 위치가 다른데? 가까운 곳이지만 내가 태어나 자란 마을은 인왕산의 동남쪽 사면이었고 수성동계곡은 정남향 사면이라서 줄기가 좀 달랐다. 그런 작은 차이에도 예민해지는게 내 마음이었다. 우리 동네의 이름을 남에게 빼앗긴 것처럼 억울했지만 겸제 정선 선생님이 장동팔경첩에서 그 계곡의 모습을 아름다운 필치로 남기고 그 이름을 '수성동(水聲洞)'이라고 정확하게 기록해놓으셨으니 따질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내 마음 속의 수성동은 우리 동네였다.
우리 마을은 정말이지 사철 물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환각이나 환청이 아닌게, 정말로 인왕산 계곡 위에 한겹 얇은 시멘트를 덮고 게딱지만한 작은 집들을 세운 구조였다. 어릴 때 살았던 우리 집 화장실은 그 아슬아슬한 주거 형태의 가장 좋은 예가 되어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반듯하게 하얀 도자기로 된 신식 변기가 달려 있었지만 오로지 그 말단 부분만 문명의 흉내를 냈을 뿐 그 아래로는 거침없는 인왕산 계곡이 펼쳐져 있었다. 힘차게 치솟은 바위와 천둥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계곡물 위에 살포시 변기를 얹은 천연 수세식 화장실이었다. 친구들과 친척들은 우리 집에 놀러오면 무서워서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했다. 우리 가족들은 아무런 감흥 없이 힘차게 흐르는 계곡물을 보며 날마다 용변을 해결했다.
세월이 흐르며 물소리가 점점 작아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렁차게 힘차던 콸콸 소리가 졸졸 소리로 줄어들어 있었다. 수성동계곡 쪽도 형편은 마찬가지였다. 겸재 정선 선생의 그림 속 아름다운 바위들은 여전한데 그 아래 흐르던 물길은 명맥을 유지하기 위태로울만큼 줄어들었다. 느낌의 변덕이 아닌 것이, 예전에 옥인아파트가 있을 때 그 맨 꼭대기에는 계곡물을 받은 수영장이 있었다. 여름에도 뼈가 시린 그 물 속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첨벙거리며 놀았다. 이제는 아이들도 물도 없어, 그곳에 수영장이 있었다는걸 믿을 수 없다. 여름 장마철이 되어도 수영장을 만들만한 계곡물을 모으기는 터무니없다.
수성동계곡에서 시작된 물길의 흔적을 따라 걸으면 청계천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인왕산에서 발원한 그 물길이 청계천으로 이어지고 답십리로 흘러 한강으로 가는 거였다. 이제 인왕산에서 오는 물은 터무니없이 수량이 적기 때문에 청계천의 물은 모두 인공급수에 의존한다.
그 많던 물들은 어디로 갔을까? 기상청의 통계자료를 참조하면, 1970년대에서 2020년대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강수량은 큰 변화가 없다. 서울 외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대한민국에 한정해볼 때 하늘은 인간들에게 늘 비슷한 양의 물을 공급했다. 차이는 사용량에 있었다. 인구가 늘었고, 1인당 물 사용량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어릴 때 나는 주 1회 대중목욕탕에 갔지만 지금은 따뜻한 우리집 욕실에서 매일이다시피 씻는다.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어마어마하게 지하수를 퍼낸 토지는 말라서 파삭해졌다. 기후 변화라 하니 하늘을 원망해야 할 것 같지만 실은 사람이 문제다.
벚꽃이 한창이던 주말, 갑자기 인왕산 산불 소식이 전해졌다. 바삭하도록 오래도록 가물었던 산자락은 거침없이 타들어갔다. 마을 친구들은 메신저로 화재 이곳저곳의 장면들을 전해주었는데, 그 중에는 놀랍도록 정밀하게 화재 하한선에 소화액을 뿌리는 소방 헬기의 진화 장면도 있었다. 전국에서 산불과 싸우신 소방관님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반년 넘게 이어진 남녘의 가뭄에 다같이 근심하는 봄이었다. 전국에서 꼬리를 물던 산불 소식을 잠재우는 고운 봄비를 반갑게 맞이하며, 목마른 산들이 다시 촉촉해질 그날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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